마르크스주의

모순의 변증법 - G. 슈틸러

파랑새호 2016. 11. 2. 22:03

[모순의 변증법], G 슈틸러 지음, 양운덕 · 김재용 옮김, 중원문화, 2013년 재판4쇄


모택동은 [모순론]에서 사물의 모순법칙을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으로 표현하고, “유물변증법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라고 강조했다. 즉 모택동은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을 모순으로 본 것이다. 다만 모택동은 마르크스는 대립이 해결을 향해 노력하는 관계가 될 때를 모순으로 표현한다. 상호 자극하는 능동적 관계인 것이다. 엥겔스는 내적 대립관계로 모순을 보고 있으며, 레닌은 대립적인 힘들과 경향들의 현존을 모순으로 규정했다. 이런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개념이 모순의 역동성을 보다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슈틸러는 대립물이 서로 능동적으로 관계 맺기 시작하면서 모순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일본에서는 마키노 히로요시(牧野広義)가 [변증법적 모순의 논리구조]라는 그의 저서에서 “변증법에서 모순은 핵심범주”라고 강조하고, 구체적 연관이나 구조의 핵심으로 ‘모순’이 있고, ‘모순’에 의해 현실세계도 인간의 인식이나 실천도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순은 진실로 ‘모든 운동과 생명의 근본’(헤겔)인 것이고, “모든 변증법의 원천”(헤겔의 모순에 대한 마르크스의 말)인 것이다. 따라서 “본래의 의미에서 변증법은 대상의 본질 자체에 대한 모순의 연구이다.”(레닌)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결국 모순이라는 것은 변증법의 법칙 중에서 대립물과 관련된 여러 운동을 언급한 것이다.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개념, 대립물의 투쟁, 대립물의 상호침투, 대립물의 상호전화, 대립물의 자기배제, 대립물의 자기제약 등등의 표현들에 대해 대립물이라는 말은 모두 ‘모순’이라는 말로 바꿔써도 무방한 것이다.


헤겔은 모순을 본질론에서 다루고 있다. 제2편 본질론의 제1부 제2장에서 다룬다. 헤겔의 기본적인 관점은 떠한 본질이든 그것 자체로서 일정한 내용을 안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즉 본질이라는 영역은 그것 자체로서는 비존재로서, 어떤 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규정성, 요컨대 <다양한 데이터>를 기초로 하여 우리가 반성=사유를 궁리하는 과정에서 정립되는 그러한 것, 즉 인간의 사유속에서 <설정되는>존재로 본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문답법에 기원을 두고, 계승하는 차원에서 서로 대립하는 의견을 싸우게 함으로써 종합적인 참다운 견해를 도출한다는 개념인 것이다. 결국 이것은 모순이 인식상의 개념이라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고, 모순의 해결이라는 것은 인식상의 문제로서 단정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과 ‘변증법적 모순’을 구별하는 것이다. 슈틸러는 헤겔 철학이 논리적 모순과 변증법적 모순을 분명하게 구분짓는 것을 포기했다고 본다. 그러나 헤겔은 대립과 모순의 구별을 제기했으며, 대립을 외적인 것으로 모순을 내재적인 관계로 보면서, 그 자체가 사물과 개념의 대립적 존재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헤겔은 철학사상 최초로 실재적(내적)대립을 철저하게 모순으로 표현했고, 객관적인 관념론의 입장에서 모순에 대하여 뚜렷한 의미를 부여했으며, 모순을 객관적 사태로 파악했다. 모순은 헤겔에게서 근본적으로 항상 논리적인 것이며, 사유의 내적 관계에 머물러 있다.


슈틸러는 또한 모순에 대한 레닌의 설명을 소개하였다. 레닌은 변증법적 방법의 핵심은 대립물의 통일을 인정하는 것이며, 탄력성, 즉 대립물이 동일성에까지 나아가는 탄력성으로 특징지워진다고 주장하였다. 레닌은 “변증법은 어떻게 대립물들이 동일한 것이 될 수 있으며 동일하게 되는가에 대한(어떠한 조건하에서 대립물들이 동일한 것이 되며 그리하여 그 대립물들에 서로 변화하게 되는가)가르침이며, 왜 인간 지성이 이러한 대립물들을 죽고 굳어서 화석화된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제약하고, 운동하며, 서로 서로 뒤바뀌는 것으로 파악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고 했다. 레닌의 말에 따르면 수정주의는 곧바로 일면성을 이론으로까지 끌어올리려고 한다.


이 책의 특징은 스탈린주의라는 체제가 끝난 후에 사회주의 사회속에서 어떻게 모순을 인식하고 해결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 있다. 스탈린주의는 사실상 변증법을 형해화시켰다고 볼 수 있는 데, 이런 점이 저자에게 책의 집필동기가 된 것이 틀림없다. 저자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모순은 존재하며, 특히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모순이 사실상 사회주의사회의 추동력이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대립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새로운 것의 등장과 완성이 최대한 쉽게 이루어지도록 사회가 조직되어 있는가의 여부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것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서도 변증법적 부정, 즉 존립하는 것의 부정으로 나타난다. 최대의 발전 속도를 위해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의 생성을 위한 광범위한 기초가 주어져 있으며 전체 인민의 자발성이 사회적 과정을 위해서 유동화되고 . . . 동시에 많은 인민들이 사회적 과정의 계획과 지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한다.”고 서술하였다. 결국 저자는 대중의 주도성이 사회주의사회에서 모순을 해결하고 발전해가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고 판단한다. 사회주의 사회라고 해서 대중이 순식간에 사회주의적 의식에 기초한 높은 도덕, 세계관, 수준높은 사실적 지식과 함께 집단적 이해관계와 개인의 이해관계의 통일을 갖출 수는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늘 개인의 욕구충족을 우선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개인과 집단간의 대립 모순이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에 “강력한 자극을 부여”한다고 주장하여, 사실상 개인의 자기개발에 대한 점을 어떻게 집단화할 것인가에 대한 집중적인 고민을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자가 판단할 때 “모순이 사회주의 발전의 원천으로서 자기 기능을 실현하는 경우는 단지 대중의 행위에서 기존 모순의 해소를 위한 조건들이 마련되는 때이다.”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자유지만, 대중들의 수용이나 자발성이 없는 집단농장 등 일련의 경제적 조치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저자의 포인트는 항상 대중 혹은 대중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중의 주도권은 어떻게 관철될 수 있는가? 사실 기존의 사회주의, 특히 스탈린주의에서는 대중의 주도권에 대한 고민이 실제적으로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스탈린주의는 항상 자본주의 국가에 둘러싸인 사실상 준전시상태에서 일국사회주의의 존속을 제일차적 급선무로 생각하고 대중속에 침투한 스파이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혈안이 되어 있어, 대중들의 권리에 대한 일정한 제한을 해도 무방하다는 견해가 널리 퍼지는 효과를 초래했다.


슈틸라는 대중의 주도권을 위해, 혹은 사회주의 사회의 모순 해결의 과정으로서 다음과 같은 7가지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1) 사실에 대한 올바른 파악- 고유한 대상의 고유한 논리에 대한 파악이며, 개념적 파악

2)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공개적인 논쟁과 솔직한 토론

3) 주의깊은 현실분석

4) 모순 해결을 위한 계획마련 -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협력과 지지가 필요.

5) 중심기관의 주도적이고 조직적인 행위(새로운 형태의 지도 구현)

6) 대중의 주도성을 전개하는 것. 의식적 협동.

7) 포괄적이고 실제적인 민주주의, 즉 자유로운 의견대립이 가능한 분위기는 모순해결의 유일한 토대.

위 7가지의 핵심은 무엇인가? 나는 민주주의 원리의 확고한 관철과, 대중들의 물질적 욕구에 대한 세심한 배려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