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마르크스주의 읽기], 페리 앤더슨 지음, 이현 옮김, 이메진, 2003년 초판
이 책은 약 10년 전에 ‘알튀세’를 공부하면서 읽은 책이다. 최근에 다시한번 읽어보니 저자 페리 앤더슨이 구체적으로 많은 저작을 직접 읽지 않았다면 표현할 수 없는 내용으로, 그러나 대중이 알기 쉽게 서술하는 상당히 뛰어난 저술임을 느낄 수 있었다. 페리 앤더슨은 마르크스주의를 논의할 때 주된 기준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고 강조한다. 페리앤더슨은 스탈린 체제의 대두와 2차 대전 이후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안정화로 인한 서구혁명의 실패가 ‘서구마르크스주의’가 태동한 계기라면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고 설명한다. 1) 마르크스 초기저술의 중요성을 강조, 2) 직업이 거의 대학교수, 3) 철학논의가 득세, 4) 대중이 이해 못하는 난해한 신조어의 양산, 5) 이론과 실천의 분리, 6) 서구관념론의 수용, 7) 문화적 상부구조에 대한 지대한 관심(특히 미학이론), 8) 혁명에 대한 염세주의 등이다.
그러나 페리 앤더슨은 그람시의 경우 상당한 예외가 있고, 나아가 서구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속하는 주요사상가들은 개량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호르크하이머만이 변절했다고 평가했다. 그람시를 제외하곤 이론과 실천이 분리된 사람들에게 도대체 변절은 무엇이며, 또 개량주의는 무엇인지 궁굼하지만, 앤더슨은 더 이상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학생운동시절 나의 기억으론 서구마르크스주의는 대체로 수정주의라는 말로 지칭했었다. 페리 앤더슨은 의도적으로 ‘서구마르크스주의’라는 말로 표현하고 ‘수정주의’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론과 실천이 분리된 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인가하는 문제는 페리 앤더슨에게는 논외이다.
페리 앤더슨은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서구마르크스주의에 독창성도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나 사르트르의 ‘희소성’을 내세운다. 또한 과연 트로츠키가 서구마르크스주의에 포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트로츠키의 추상적 긍정성과 구체적 부정성에 대해 언급한다.(트로츠키에 대해 쓰고 싶지만 내용이 너무 많아져서 다음을 기약) 한마디로 서구마르크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이 분리된 상태로, 잡다한 관념론적 내용을 받아들이고 혁명에는 대단히 비관적이다. 그렇지만 새로운 세대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내용들에 대해 단순히 무시하거나 간과해선 안된다면서, 이런 전통을 청산하는 것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고-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새롭게 하기 위한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페리 앤더슨은 대체로 합해서 9가지의 과제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1) 선진 국가들에서 자본주의적 권력양식의 전형이 되어버린 부르주아민주주의의 본질과 구조는 무엇인가? 2) 이런 역사적 국가형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혁명전략이 필요한가? 3) 서구에서 이것을 넘어서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형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3가지과제는 서구에 국한된 내용이다. 시야를 서구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확장한다면 4) 국가의 의미와 위상이란 무엇인가?, 5) 민족주의의 복합한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6)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현대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은 무엇인가? 이 운동법칙에 특수한 새로운 위기의 형태가 존재하는가? 7) 제국주의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8) 후진국들에서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등장한 관료국가들의 기본적인 특징과 동학은 무엇인가? 특히 유사점과 차이점은? 9)중국이나 그 밖의 지역에서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없이 혁명의 수행이 가능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등의 6가지 내용이 추가로 제시된다.
페리 앤더슨은 대체로 ‘서구’라는 개념에 일본이나 중국은 제외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서구와 유사한 부르주아민주주의적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나 운동의 경험이 다르고, 또 일본마르크스주의가 갖고 있는 독특한 특징과 비교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일본 공산당의 경우 중국이나 소련과의 대립과 투쟁속에서 조직을 건설하고 지켜냈으며,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무장혁명투쟁의 포기를 강령에 내걸었다. 대단히 치밀하게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연구하고 있고, 서구의 다른 국가와는 달리 최근까지 당원의 현저한 감소가 없었으며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마저 있다.
결정적으로 페리 앤더슨은 레닌의 신경제정책이나 철학노트 등 레닌 후기의 활동과 저서에 대해선 언급이 전혀 없이, 레닌주의의 이론적 문제점으로 소련이 결국 망한 것 아닌가하는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 레닌주의의 문제점으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과 같은 내용을 판단하지 못한 점이나 제국주의론 등에서 나타난 자본주의의 자동적 붕괴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들이 페리 앤더슨 역시 서구마르크스주의의 틀 내에 있구나하는 인상을 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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