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구체성의 변증법-카렐코지크

파랑새호 2016. 10. 19. 12:24

이 책은 80년대에 소개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출판되었다. 부제로 ‘인간과 세계의 문제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저자 카렐 코지크는 체코출신이다. 원서가 발행된 해는 1968년이다. 책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당시의 상황을 약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흐름](변상출 옮김, 유로, 2007년 초판1쇄)이라는 아주 두꺼운 책에서 <레세크 코와코프스키> 라는 폴란드 학자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이후 발생한 소련의 변화와 동유럽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였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우선 1956년 2월 소비에트연방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개인숭배에 관한 유명한 연설을 했다. 흐루시초프는 이 연설에서 스탈린의 범죄와 과대망상, 고문, 탄압, 당 관료의 암살 행위를 조목조목 밝혔다. 레세크에 의하면 ‘개인숭배’라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집단 지도부를 소홀히 하고, 무제한적 권력이 스탈린의 손에 집중된 점, 2) ‘오류와 왜곡’의 주요 원천이 스탈린 개인의 성격 결함, 권력욕망과 독재경향 등에 있었다. 개인숭배의 핵심은 모든 문제가 스탈린 개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따라서 스탈린의 사망이후 당이 적합한 민주적 원리를 따름에 따라 모든 문제들이 치유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탈린은 “비난받아야 할 범죄자와 광인일 뿐이었다.” 소련의 이러한 반성은 대단히 비변증법적인 것이다. 한 사회의 운영이 한 개인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수 있다는 것이나, 당의 무오류성을 강조한 것 자체가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비역사적 평가일 뿐이다. 이리하여 모든 책임은 스탈린에게 돌아가고 나머지 당 관료들은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았다. 철학의 측면에서 보면 스탈린주의는 대중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미명하에 모든 논리를 계급투쟁으로 집중시켰으며, 모든 철학을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으로 설명하였다. 그 결과 철학의 다양한 범주가 빈곤화되었다. 레닌은 진리로부터 오류를 허용하기 쉬운 점을 경고했다. 올바른 주장에 대한 형이상학적 극단화는 그 주장을 허위로 만들 수 있다. 일정한 속성, 관계 방식을 과장하면 그것의 긍정적 성격마저 부정적인 것으로 역전시키고 만다. 아무리 현실을 밝히는 진리라고 해도 지나치면 의미를 상실하고 마는 것은 변증법적 진리이다. 탈스탈린주의 운동으로 인하여 1958년 소련은 철학교과서를 개정했다. 개정의 핵심내용은 변증법의 세가지 법칙으로 주장하는 엥겔스의 논리를 따르면서 부정의 부정을 삭제했던 스탈린주의를 반영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동유럽을 중심으로 소위 ‘동유럽수정주의’가 태동했다.


동유럽의 수정주의는 이전의 베른슈타인에게 적용되었던 수정주의와는 달랐다. 동유럽 수정주의는 공산당원 자격을 유지하고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공산주의의 여러 지침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당의 보수주의자들에게 '교조주의'라고 공격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이들에게 '수정주의'라고 공격했다. 레세크 코와코프스키는 동유럽 수정주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사실상 주류집단이었다. 2)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주의, 국가와 당의 조직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보유, 3) 자신들이 지도해야 한다는 생각, 4) 마르크스의 권위에 호소함. 사실 레세크 코와코프스키는 레닌주의를 스탈린주의의 원인으로 본다. 아예 레닌-스탈린주의라고 명명하고 한통속으로 몰아붙인다. 이 점은 레세크가 오버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나간 역사를 평가할 때 어느 한쪽면을 보고 전체를 규정하는 것 또한 비변증법적 태도이다. 스탈린주의에 대해서도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카렐 코지크는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성의 변증법]을 썼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저자는 변증법과 마르크스주의에서 제기하는 ‘구체성’, ‘추상성’, ‘총체성’의 개념을 해명한 후에 변증법적 사고를 방해하는 여러 사이비 철학을 비판한다. 또한 세계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인식을 심화시켜 가며, 철학적 사고나 세계관을 형성하여 가는지를 자세하게 언급한다. 인식의 심화는 반드시 고전 저작에 대한 학습을 필요로 한다. 이같은 학습은 고전 텍스트의 대중화를 수반할 수 밖에 없다. 이때 특정세력이나 사람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전담하는 행위로 인하여 또다시 왜곡이 발생하는 현상에 대해 설명한다. 마르크스주의에는 특히 이런 현상이 심한 경향이 있다. 스탈린주의를 들먹거릴 필요도 없이 어떤 특정 전문가의 해석이 기준이 돼 버리면서 같은 견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물론 브레히트의 주장처럼 “집단으로서 당의 판단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 해석이라는 것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우 핵심은 철학에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철학이란 무엇보다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은 영원히 새롭게 철학의 존재와 그 존재 이유를 정초해야 한다. . . . 모든 철학의 출발점은 세게 속에서 인간의 존재,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있다.” “철학적인 물음은 일상적 의식과 일상적인 물신화된 현실이 가지는 확실성을 분쇄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바로 그 현실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묻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코지크는 철학의 의미, 철학의 역할, 그리고 철학의 목적에 대해 사람을 우선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특별히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 조차 이러한 철학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체제를 불문하고 인간중심의 철학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막스베버가 자본주의가 성립하자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사라지고 “정신없는 전문가, 가슴없는 향락자‘라는 공허한 인간이 대두되었다고 설명했듯이, 사회주의사회가 탄생하자 변증법없는 유물론자, 인간이 없는 변증법이 대두한 것이라고 하겠다. 코지크에 의하면 변증법은 ‘사상(事象) 자체’(Sache Selbst)를 추구한다. 그러나 ‘사상 자체’는 결코 일상적인 사물이 아니며, 심지어 그것은 전혀 사물이 아니다. 철학이 다루는 ‘사상 자체’는 인간과, 우주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의미한다. 인간이 역사 속에서 밝혀내는 세계의 총체성과 이를 다시 변증법적으로 사유하여 되새김하는 세계의 총체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이다. 책을 번역한 역자는 코지크가 ”하이데거의 현상학과 청년 마르크스의 개념들을 독창적으로 종합“,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하이데거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하이데거의 철학에 사회 역사적 차원을 주는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실존적 · 존재론적 지평을 도입한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너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코지크는 단순히 변증법과 실존철학을 결합하려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중심이라는 주제를 실존철학을 빌려 변증법적으로 풀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코지크의 변증법에 대한 견해는 변증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약간 고개를 꺄우뚱거리는 측면, 뉘앙스가 다른 점이 있다. 이것은 어떤 결정적인 오류라기보다는 일상용어로 “2%부족한 인식‘인데, 현상과 본질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가 그것이다. 코지크는 ”현상은 곧 가상이라서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회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굳이 문제삼을 수도 있고 문제삼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우회로‘를 ’매개항‘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변증법적 추론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냥 넘길수 있다. 그러나 현상과 본질은 늘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헤겔은 [소논리학]에서 “현상에는 본질에 없는 것은 나타나지 않으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본질에도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코지크는 현상과 현실성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혹은 변증법적 추론의 과정이나 인식의 과정을 본질과 현상 범주에 잘못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가능성과 필연성을 논의할 수가 없다. 코지크처럼 현상과 본질을 맞짝개념으로 보면서 현실이라는 매개항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현상은 모두 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이나 본질 모두 그 자체가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 현실에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헤겔은 본질과 현상을 본질론에서 다룬다. 본질-현상-현실성의 3항 범주로 구성하고 있다. 변증법적 추론은 개념론의 영역이다. 이때는 현상과 본질이라는 범주보다는 개별-특수-보편으로 설명한다. 변증법의 꽃은 추론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서문에서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들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서술하였다. 마르크스는 역시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그룬트리세) 서문에서 “가장 일반적인 추상은 일반적으로 가장 풍부한 구체적 발전의 경우에만 비로소 성립하는 데, 이 경우에는 어떤 하나의 것이 많은 것에서 공통으로, 모든 것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경우에는 단지 특수한 형태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 추상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또한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총체”라는 표현을 쓴다. 역시 [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문에서 밝힌 바 있듯이 “구체적인 총체가 사유에 의해 만들어진 총체로서, 사유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구체물로서 사실상 사유의 산물이며 개념행위의 산물인 한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관과 표상의 바깥에, 또한 이것을 뛰어넘어 사유하며 또한 자기자신을 산출하는 개념의 산물이 결코 아니며 직관과 표상을 개념에 의하여 가공한 산물이다. 두뇌 속에서 사유 전체로서 나타나는 전체는 사유하는 두뇌의 산물이고 이 두뇌는 자기자신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그 방식은 이 세계를 예술적, 종교적, 실천적 정신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로 서술하였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바는 개념을 통해 직관과 표상(여기서는 사상 자체)을 서술하는 방식이 구체적인 총체라는 점에 있다. 이는 현실과 다른 추상적 사유행위이다. 코지크는 이런 추상의 개념을 현상과 본질 범주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과 본질은 현실속의 관계이다. 코지크가 주장하는 현상과 본질은 플라톤의 인식관, 즉 독사(doxa)와 에피스테메(episteme)의 관계같은 것이다. 플라톤의 여러 저서를 통해 확인하는 ‘독사’(doxa)는 바로 피상적인 견해, 주관적이면서, 피상적이고, 현상으로 파악하며, 근거가 없다. 이것은 헤겔이 이야기한 ‘오성’의 개념과 같다. 사물의 겉모습만 보고 실체를 보지 못하는 관점, 오성의 관점, 추상의 관점인 것이다. 반면 에피스테메(episteme)는 본질(우시아; ousia)에 도달하는 관점, 필연성과 보편성을 획득하는 관점이다. 플라톤은 [메논] 등에서 근거가 없는 독사(doxa)는 엘렝코스(elenchos ; 논박)를 통해 거짓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피스테메(episteme ; 인식)는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자기이성을 통해서 지성의 합리적 사유로부터 자기확실성을 입증한다. 코지크가 이야기하는 현상과 본질은 플라톤이 언급한 독사, 에피스테메와 표현만 다르다.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서 현상의 벽을 뚫고 들어가 본질의 열매를 투사하는 식으로 표현할 때의 그런 현상과 본질인 것이다. 헤겔은 이런 차원의 내용은 아예 오성과 이성으로 구별하였다. 그리고 잡다한 개별이나 특수한 내용속에서 관통하고 있는 보편, 필연성을 찾아내는 작업을 추론으로 범주화하였다. 현상과 본질이라는 범주는 인식의 발전과정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설명, 실재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한 현실속에서 우리가 무언가 핵심으로 인식하려 할 때 즉 본질을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추론과정을 거쳐야 한다. 코지크가 현상에서 본질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변증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 자체는 틀리지 않지만, 그러나 현상을 가상으로 규정하고 본질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추상화, 추론의 과정으로 설명해야 한다. 현상은 현상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말하자면 본질과 현상은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 통일된 관계, 맞짝 개념이고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따라서 현상이 허위이거나 가상일 수는 없다. 현상은 본질의 현상 형태인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구별이 저자의 의미를 삭감할수는 없다.)


저자는 이 책을 발간한 이후 대학에서 쫒겨나고 상당한 시간을 활동하지 못했다. 변증법에 대한 책을 썼는 데, 약간의 실존주의적 용어나 가치가 나온다고 해서, 즉 관념론적 색채가 있다고 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직장을 잃었다는 것이 당시 체코가 처한 상황이다. 당시의 체코상황을 아주 잘 드러내는 책이 있는 데, 바로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서 잘 드러난다.(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chanhopark/15677012 참조) [농담]은 발표년도가 1967년이기 때문에 [구체성의 변증법]과는 딱 1년 먼저 발행된 책이다. 당시의 체코는 출세를 위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공부해야 하는 사회였으며, 당의 이름으로 자신의 경쟁자를 모함하는 사회였다. 주인공은 책의 제목인 바로 그 농담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라는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힌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지배적 국가이데올로기와 그런 철학을 주장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상황을 꼬집은 풍자였으며, 화풀이였다. 그러한 농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가 체코였던 것이다. 책이 발표된 1968년 8월 체코는 소련 군대의 침공으로 전반적인 민주적 요구가 땅속에 묻힌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가 되고, 사람의 사상을 막아버린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과도기에 대한 몰이해, 냉전구도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경시를 답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내가 볼 때 더 중요한 것은 변증법에 대한 깊은 천착이 없었다는 점, 이로인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점, 결국 코지크가 이야기하려 했던 점이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