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20세기],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지음, 백승욱 옮김, 그린비, 2009년
저자 아리기는 자본주의 경제사를 금융팽창-실물팽창-금융팽창이라는 3단계의 장기적인 특징으로 서술하고, 현재는 지금까지의 3단계와는 다른 국면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국면은 헤게모니를 유지해 온 미국체제의 구조가 파괴되고 있으며, 새로운 구조가 탄생하는 상황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축적과정에서 새롭게 강자로 떠오른 중심지들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볼 때 금융위기를 가장 심각하게 겪은 곳이었다면서 그렇다면 동아시아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유추한다.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축이 이동할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경제사를 기존 정치경제학적 관점이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맹아 - 고전 경쟁자본주의 - 독점자본주의(제국주의) - 국가독점자본주의 라는 도식과는 다르게 자본주의 축적의 일정한 패턴을 제시하여 사실은 자본축적 과정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의도는 아니겠으나, 슘페터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슘페터는 자본의 지속적인 증식을 위해 5가지 혁신의 요소를 제시한 바 있다. 즉 1) 새로운 상품, 2) 새로운 원료공급지, 3) 새로운 노동수단, 4) 새로운 시장, 5) 새로운 조직이 그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사는 이러한 5가지 혁신요소를 얻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자체임을 입증한다. 아리기의 구체적인 설명은 바로 이점을 입증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설명은 자본주의 경제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이라 할 수 있는 계급간의 투쟁, 각 계급간의 역동성, 처절한 경쟁 등이 사라지고 다만 패턴만이 남는 단점을 남긴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힐퍼딩의 금융자본, 레닌의 제국주의론 같은 책들을 깍아 내리면서 자본주의 축적에서 필수적으로 거론해야 할 세계적 규모의 반자본 민중항쟁을 생략한다. 자본운동에 초점을 둔 경제사 서술은 학술적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정치경제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계급투쟁의 의미가 사상된, 자본주의 축적과정상의 자체 모순만을 부각하는 제한된 내용만이 남는다. 계급투쟁 없이 자본주의는 자체적인 모순으로 계속해서 변화해 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한 구체적인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서술에 대한 내용도 대단히 추상적이다. 구체적인 수치가 부족한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차라리 [먼슬리 리뷰] 등에서 꾸준하게 게재해 온 금융독점자본주의에 대한 내용이 훨씬 더 다가온다. 자본주의가 축적을 진행하면서 예컨대 금융팽창과 실물팽창을 반복하고 있고, 새로운 국면은 앞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더 큰 차원에서 더 확대된 모순을 산출한다는 서술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사람의 역할, 혹은 역동성이 배제된 그런 상태인 것이다. 차라리 종속이론에서 주장하듯 중심-주변의 구도가 그나마 제국주의 시기 민족해방운동이나 제3세계 국가나 민중들의 희생을 부각한다는 측면에서 훨씬 더 유용하다고 본다. ‘헤게모니’라는 표현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 저자는 현재 여러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다는 식의 표현으로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지배집단 내의 특정 분파나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서술하는 내용이 아니다. 맨 처음 그람시가 헤게모니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나오는 내용, 즉 권력을 동의와 강제의 결합으로 보는 관점에서 차용한 것으로서,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등 피지배계급을 통치하는 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제기한 것이다. 말하자면 지배계급이 적대적 폭력행위로서만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일부의 일정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민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략 전술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라는 것은 강제 일변도나 동의 일변도의 정책구사가 아니라 동의와 폭력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는 지배행태로서 자본주의 권력의 유지 온존이 비교적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갖게 하는 것이며, 이럴 때 사회주의 운동은 ‘진지전’의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자본주의가 곧 멸망할 것이며, 투쟁만이 살길이라거나, 혹은 모든 현상을 자본주의 멸망이 곧 임박했다는 차원에서 계급투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당시의 일반적 분위기를 탈피하고, 이념의 경직성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긍정적 개념인 것이다. 자본가계급 혹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특정 분파나 국가의 주도적 특징을 서술하기 위한 개념은 아닌 것이다. 어디까지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권력관계를 서술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배계급이라고 언급할 때 이의 구체적 내용이라는 것은 사실상 추상적이다. 일반적으로 지배 계급은 여러 분파, 여러 계급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경우 궁극적으로 자본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는 하나, 그것이 분파나 개인의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런 관점이라면 ‘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치와 경제를 운영한다’는 한 문장으로 모든 특징을 서술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루이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저작을 통해 결국 모든 유산계급을 보호하지만, 유산계급 보호라는 것이 유산계급내의 여러 분파간의 치열한 경쟁과 투쟁을 통해서 달성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서술의 구체성, 역동성을 확보하여야만 온전한 서술로 인정하는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리기의 저작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서술에서 필수적으로 담보해야 할 이러한 각 분파간의 혹은 각 그룹간의 치열한 경쟁이나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역동적 계급투쟁이 나타나지 않는다. 학술적인 의미는 모르겠으나 이런 두꺼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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