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 [マルクス疎外論の視座], 다가미 고우이치(田上孝一)지음, 本の泉社、2016年 76~81쪽
보론 소외론으로서의 실천적 유물론
-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새로운 체계화를 위하여
‘중국의 특색에 맞는 사회주의 방향과 이론 문제’라는 이번의 심포지움에 대해 마르크스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본질에 대해 한가지 제언을 드리고 싶다. 철학에 대한 제언은 중국의 특색에 맞는 사회주의에 대해 현대 중국의 지도적인 철학자들이 작성하고 있는 다양한 교과서적 저작에서 마르크스와 관계없는 내용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철학적 기초를 경시하지 않는다는 설명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중국의 특색에 맞는 사회주의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서 나타난 현대적인 발전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인 마르크스 자신의 철학적 원형을 밝혀내고, 원형에 근거해서 마르크스주의 본래의 철학적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국의 특색에 맞는 사회주의의 장래와 관련해서 중요한 이론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A라는 사상가의 원형을 탐구하려 하는 경우, 기준이 되는 것은 A가 쓴 저서나 노트, 편지글 등이다. 즉 A의 사상의 원형은 무엇보다도 A자신의 저작속에서 탐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때 설령 A에게 B라는 공동연구자가 있고, A와B가 밀접한 사상적 동맹관계에 있다해도, A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A자신의 저작이나, 양자의 공동저작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B자신의 저작에 탐구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있다. 또한 A와 B 사후에 두사람의 사상을 계승했다고 하는 C가 나타나서, 역사적인 진행속에서 C가 A와B에 관한 최고권위자로 인정된다고 하여도, 또 이로인해 C의 해석을 즉각적으로 올바른 견해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C의 말을 그대로 A의 사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두말할 나위없이 위의 A는 마르크스, B는 엥겔스, C가 레닌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단히 비상식적인 것을 상식으로 인정해 왔다. 실제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가장 단호한 태도로 철학적 유물론을 지켰으며, 이런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심각한 오류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설명했다. 그들의 견해가 가장 명료하고 상세하게 설명된 것은 엥겔스의 저작 [루드비히 포이어 바흐]와 [반 듀링론]이며, 두 저작은 -[공산당 선언]과 마찬가지로서- 모든 자각한 노동자의 곁에 둬야 할 책이다.(레닌)
위의 문장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전체적으로 동일하게 취급 하면서, 마르크스 철학의 본질을 마르크스 저작이나 공동저작이 아니라, 엥겔스의 단독저작인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반듀링론]으로 제시한다. 확실히 레닌의 살아생전에는 [경제학 철학 수고]나 [독일이데올로기]는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제약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라고 판단하는 것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레닌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구별하지 않고, 게다가 마르크스 철학을 엥겔스의 저작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이로인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주로 엥겔스의 계몽적 저작과 레닌 자신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토대로 그 연장선상에서 구축되어 갔던 것이다.
이런 작업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대하여](1938년)이다. 여기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라는 것의 실제적인 내용이 자연변증법에 기초한 ‘변증법적 유물론’이고, 사회현상에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 역사적 유물론이었다. 이후 ‘推廣論’(중국식용어 ; 일종의 마르크스주의 보급판인 것으로 추정 ; 역자주)을 마르크스주의 철학체계화를 위해, 기본적인 방향으로 삼았다. 이러한 체계화 과정이 문제인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형이상학과의 대결선상에서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새로운 형이상학, 심하게 본다면 하나의 신학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현상의 운동법칙의 한 범주에 불과했다. 자연현상이라는 것은, 사회현상과 비교하여 단순하고, 법칙적 파악을 주장하기 쉬운 인식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자연 이외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근거로서 작용했다. 이로인하여 사회현상의 원리적 복잡성이 사상되어 버렸고, 역사적 유물론의 인식도 자연현상에 대한 파악과 동일한 수준에서 절대적 진리로 간주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도 절대법칙이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과학도 거시적인 사회변동을 절대적 확실성으로 예상하지는 않는다. 이럴 경우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예언의 영역에 속한다. 예언을 과학적 인식이라고 참칭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가짜과학이고, 예언을 절대시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종교적 태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리하여 스탈린주의적 추광론은 자신의 인식을 끊임없이 반성하는 것을 기본태도로 삼는 마르크스주의철학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상응하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자신의 말에 기초해서 해명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마르크스 자신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방법론은 변증법이었으나, 존재론적 전제는 유물론이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엇보다도 실천적 성격을 본질로 한다. 인식은 진리의 도달로서 끝나는 것이며, 이런 인식상의 자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식은 실천으로 검증받고, 현실변혁을 위한 이론적 무기가 되어야만 한다. 결국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다만 변증법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천적이기도 한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다음과 같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실천적인 유물론자, 즉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현존의 세계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즉 기존의 사물을 실천적으로 파악하여 변혁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위에서 언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은 실천적 유물론자이고, 공산주의 철학이라는 것은 실천적 유물론이다. 주요 목적은 인식 자체가 아니라, 인식된 대상의 변혁에 있다. 위의 문장 자체가 유명한 포이어바흐의 열한번째 테제와 의미가 동일하다는 점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 문장에서 원래 문제로 삼았던 것은 위 문장 자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는 것, 현실세계를 무엇을 위해 어떻게 변혁하는 가에 있다. 변혁의 테로스(종국목적)는 무엇인가에 있다. 위에서 인용한 명제는 같은 저작의 다른 곳에 서술한 유명한 동일내용의 한 문장과 조합해보면 본래 의도했던 내용과 반대의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공산주의는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또는 현실이 따라야 할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인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일컫는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존하는 전제들로부터 생겨난다.
공산주의, 그리고 철학이라 할 수 있는 실천적 유물론은 확실히 무엇보다 현실의 변혁을 중시하지만, 그것은 무언가 큰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같이 공산주의자는 실천적 유물론자이고, 공산주의 철학은 실천적 유물론이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과제를 그저 해결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만일 이런 식으로 해석할 경우 운동이라는 것은 실천의 행위라기 보다는 무언가 ‘일상적인 작업’수준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확실히 스탈린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철학’이라면 이러한 빈약한 실천개념에 만족했을 것이다. 역사는 자연현상처럼 예측가능한 법칙으로 결정된다. 역사를 창조하기위한 실천의 여지는 인간에게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마르크스는 실천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가?
우리들은 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물론은 문자 그대로 언어 본래의 의미에서의 실천을 중시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실천이라는 것은 단순한 신체활동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 이후의 전통이었던,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라는 의미에서의 ‘프락시스’이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이상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일반적인 이상이 아니라고 언급하는 것이기 보다, 달성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의 이상은 아니라는 의미가 훨씬 강하다. 원래 공산주의라는 것은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사회이고, 공산주의 실현을 이상으로 하는 것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적 운동이며, 현실이라는 것은 지향해야 할 규범적 상태를 의미한다. 결국 공산주의는 가능한 것이고 이상이 아닌, 진실로 실현 가능성 있는 현실적인 이상인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이러한 명제가 기록된 [독일 이데올로기]의 초고에서 이론적 전제였기 때문이다. 다른 지면에서 밝힌바와 같이, 이 저작의 이론적 과제는 직전 저작인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 자신이 제시했던, 소외된 노동의 역사적 기원에 답을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는 질문만 했고, 답은 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분업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분업은 소외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분업의 발전은 소외를 심각하게 만들면서, 소외를 지양하기 위한 여러 전제조건을 만들어낸다. 소외의 원인이 분업에 있다는 점을 밝히면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인간은 분업에 종속되는 것 아니라, 스스로의 아레테(덕, 좋은 것)를 증가시키기 위해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전면적으로 발달한 전체적 인간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이상이고, 공산주의에서 실현될 인간이다.
실천적 유물론의 실천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소외된 인간의 본질을, 공산주의로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천이다. 이것이야말로 ‘프락시스’인 것이다.
이리하여 마르크스주의 철학체계를 구상할 때 전제로 해야할 마르크스의 철학이라는 것은 실천적 유물론이고, 실천적 유물론에서 표현한 실천이라는 것은 소외를 지양하기 위한 윤리적 실천 = 프락시스인 것이다. 요컨대 마르크스 철학의 본체는 소외론이고, 실천적 유물론의 본질은 소외론인 것이다. 스탈린주의적 ‘추광론’을 대체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새로운 체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핵심이 소외론에 있는 실천적 유물론을,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중심내용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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