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논술이란 무엇인가?

파랑새호 2007. 2. 10. 12:34

  ‘논술’이란 무엇인가? 논리적 서술의 줄임말이다. 서술이라 하는 것은 어떤 내용을 말하거나 주장하거나 옮기는 행위를 말한다. 논리적 서술이란 말 그대로 어떤 내용을 ‘논리에 입각하여’, ‘논리에 어긋남이 없이’ 말하거나 주장하거나 옮기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논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논리’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다.

 

  논리는 세상의 이치, 즉 사람 살아가는 것의 이치, 사물의 이치를 말한다. 따라서 논리적 서술을 하기 위해선 사람 사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사물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세상의 이치에 대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이치란 무엇인가? 사물의 정당한 조리, 도리, 사물이 그 본래의 의미대로 드러나게 하는 순리이다. 결국 사람 사는 사회와 자연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한 논리를 구사하기 어렵다. 사람 사는 사회와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어쩌면 대단히 쉬운 일일 수도 있고, 한평생을 바쳐야 하는 작업일 수도 있다. 책 한권을 읽거나 단 한사람과 교류해도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이면서 동시에 수천권의 책을 읽거나 수만의 사람을 만나도 깨달을 수 없는 내용이다. 사람은 어린아이와 이야기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어른과 이야기해도 새로운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논술은 결국 한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사물에 대한 이해와 세계관이 드러나게 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드러나게 하고 지식이 드러나게 하는 과정이다. 논술은 한 사람의 사물에 대한 이치, 사람에 대한 이치에 대해 평가하는 계기가 된다.

 

  세상의 이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 사람은 스스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이치를 배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행위 속에 스스로 세상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각각의 사람은 가정이면 가정, 학교면 학교, 직장이면 직장 등 각각이 속한 조직단위에서 세상의 이치를 보고 배운다. 이것은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이치라고 할 수 있다.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이치는 시간이 걸리고, 더딘 과정이지만 스스로 보고 느낀 내용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힘이 있다. 적어도 한 개인에게 그와 같은 경험은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생각을 변경시킨다. 주변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치를 깨닫는 과정은 물론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스스로도 변하지만 관계하는 사람들의 변화도 수반한다.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이치는 ‘상호관계’를 떠나선 이야기 할 수 없다. 결국 경험의 이치는 ‘관계’의 이치이다.

 

  그러나 사람은 일생동안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살 수 없다. 사람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사람과 만날 뿐이며, 사물과 접할 때도 그렇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사람이나 사물과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관계형성의 ‘특수성’을 의미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어제는 한국에서 오늘은 미국에서 내일은 사우디에서 지낼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부자애인과 연예를 한다면 소설책 ‘우리는 사랑일까?’에서처럼 아침에 런던에서 밥을 먹고 콩코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점심은 뉴욕에서 먹을 수도 있다. 이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횡무진 날아다녀도 결국 한사람이 갈 수 있는 영역은 그의 일생동안 대단히 한정된다. 더군다나 구체적으로 ‘비용’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아무리 권유해도 스스로 포기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관계를 형성해간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부터 관계를 형성해간다. 부모를 만나고, 형제와 관계를 맺고, 동무들과 어울리고, 애인을 만난다. 모든 관계는 자신이 갈 수 있는 영역,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관계의 묘미는 바로 이점에 있다. 그렇게 한정된 영역에서 한정된 인간관계에 불과하지만 만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공감도 할 수 있다. ‘세 사람만 모여도 천하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특수한 내가 특수한 당신과 만나 관계를 형성하는데 특수한 제3자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다. 특수한 내가 특수한 너와 만나 특수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 생활조건이 다르고 문화환경이 달라도 우리는 특수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고민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라는 보편성의 영역 속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세상이치는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것이고,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즉 보편과 특수가 한데 어울려 있다.

 

  주변의 사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 또한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앞서간 여러 사람의 지식을 배우는 과정이 없다면 돌멩이 하나, 빗방울, 눈, 소나무, 다람쥐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은 한계가 있다. 첨단 우주과학의 시대이지만 우리는 달에서 살고 있는 토끼도 알아야 하고, 은하수의 견우와 직녀를 배울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로부터 과학지식을 배운다.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운다.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로부터 감성을 배운다. 우리는 앞서간 사람들로부터 모든 것을 배운다.

 

  세상이치는 결국 앞서간 사람들의 지식으로부터 앞서간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앞서간 사람들의 감성으로부터 파생된다. 앞서간 사람들의 모든 행위와 사상, 감성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한 첫걸음이자 최상의 방법은 독서이다. 인터넷의 지식검색은 알고 싶은 특정 내용에 대해 여러 사람의 지식을 순식간에 전달해준다. 이런 신속성을 이유로 인터넷 지식검색이 책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사용자가 스스로 작성하고 수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가장 효과적인 백과사전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인터넷 지식검색은 독서보다 신속할지는 몰라도 풍부함과 다양성, 깊이를 상실한다. 결정적으로 인터넷 지식검색은 검색어를 알아야 한다는 제약조건이 있다. 누군가 무엇을 배워야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검색할 것인가? 설상가상 인터넷 지식검색은 ‘지식’만을 전달한다. 인터넷 지식검색은 도저히 삶의 의미를 전달할 수가 없다. 인터넷 지식검색에 실제로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법’하고 쳐보라. 짜증만 날 뿐이다. 우리에게 독서는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고, 특수성을 이해하고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며, 풍부한 감성을 느끼는 과정이다. 사람에게 있어 독서는 인생 그 자체이거나, 공기와 같은 것이다. 독서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앞서간 사람들로부터 세상의 이치를 배웠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세상이치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고 앞서간 사람들은 현재가 아닌 이미 지나버린 세월을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박지원이 청나라를 방문했다고 해서 열하일기 속의 청나라가 지금의 중국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읽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었다고 해서 임꺽정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의 누구든지 세상 이치를 말 할 수는 있어도 정답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세상사는 것에 정답이란 없기 때문이다. 앞서간 사람들은 우리에게 오늘의 이치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있지만 헬레나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처럼 앞서간 사람들이 우리의 미래가 열릴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해 준다. 오늘의 문제는 어제의 문제였으며, 내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의 이치는 어제의 이치이며, 내일의 이치이기도 하다. 사실상 오늘은 어제의 내일이자 내일의 어제이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이 통일되어 있는 그런 날이다.

 

  세상이치를 서술하는 논술에도 정답은 없다. 세상이치가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십억명의 삶이 있다. 수십억명의 삶은 다 소중하다. 한국전쟁으로 한꺼번에 수십만명이 죽었지만 그들은 다 개별의 인생을 살았다. 그 어떤 누구의 삶도 ‘정답이 아니다’, 혹은 ‘정답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자연은 오직 수천의 생명에게 단 한번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과학적 사실에는 정답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따라서 정답이라는 것이다. 주로 자연과학의 진리들이 이에 해당된다. 자연과학의 진리를 어떤 사람은 ‘법칙’으로 표현한다. 만유인력의 법칙, 질량보존의 법칙 등등.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자연법칙으로서 진리이다. 누구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무한정 언제까지 돌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생물학자들의 책을 읽어보면 공룡이 일시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이유는 운석의 충돌, 충돌에 의한 연기, 재의 발생과 태양빛의 차단 때문이라는 것이다. 운석의 충돌로 발생한 연기와 재가 지구상공을 가득 덮었고, 태양빛이 차단되자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운석이 지구와 부딪힌 장소까지, 충돌의 흔적까지 사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날엔가 거대한 운석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가 박살나리라는 가정도 충분히 과학적인 가정이다. ‘지구는 돈다’는 특정조건이 결부되어 있다. ‘거대한 운석이 지구와 부딪혀 박살나지 않는 조건’이 그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 질량보존의 법칙도 특정조건이 있다. 바로 ‘태양계’에 한정된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우리가 법칙을 주장할 수는 없다. 인간이 파악한 모든 진리는 조건이 있다. 오직 그 조건이 적용될 때만이 진리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는 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단지 사실을 말한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갈릴레오가 사는 당시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다는 점에 있다. 당시 세상에서 판단하는 사실은 ‘태양은 돈다’ 였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 이것이 사실 어렵다. 특히나 사실이 동 시대의 보편적인 인간의 상식, 동 시대의 보편적인 인간의 신념체계 등과 어긋날 때가 가장 어렵다. 사실은 전달하는 것 자체로 힘이 되고 체제를 흔든다. 사실에 대한 전달은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물이나 사람사회의 모습이 한 인간의 두뇌 속에 투영되는 과정을 말한다. 인간의 인식은 인간의 언어를 매개로 하는 고도의 두뇌작용이다. 언어의 매개과정 없이, 인간 두뇌의 활동 없이 사실이 사실대로 드러나기는 어렵다. 사실은 오직 언어로서 인간에게 전달될 뿐이다. 수많은 사진, 그림, 영화도 인식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면 사람에게 전달될 수 없다. 언어는 모든 사실의 기본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사실을 믿고, 사실을 평가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믿건 상관없이 ‘지구는 돈다’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사실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식이나 관념과 무관하다. 반면 인간의 역사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실에 맞게 생각하고, 사실에 입각한 행동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다. 사람 사는 사회는 ‘지구는 돈다’고 단지 사실만을 이야기해도 재판을 받지만, 한편에선 아직도 구체적인 사실을 알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 에이즈, 암등 불치병에 대한 사실인식은 아직 멀기만 하다. 사람들은 광활한 우주까지 눈을 돌리지 않더라도 지구 땅속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우리 몸의 구체적인 구성과 운동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른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인식은 새로운 사실을 드러내는 출발점이다. 논술은 사실에 입각해야 하고, 사실을 드러내야 하며, 새로운 사실을 유추해야 한다.

 

  사람은 앞서간 사람으로부터 배운 모든 세상이치를 오늘에 적용하여 살아간다. 세상이치는 사실에 대한 판단으로 출발하고, 사실에 대한 판단은 풍부한 독서가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모든 독서의 전제는 언어에 대한 지식이다. 언어를 모르고서는 논술이 될 수 없다. 언어로 표현된 세상이치가 독서를 통해서 습득된다. 습득된 세상이치는 인간의 행위로 오늘에 다시 살아난다. 오늘에 살아난 세상이치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논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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