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문제

한국사회에 미래는 있나?(백낙청, 최장집 논의 평가)

파랑새호 2007. 6. 16. 12:21

 (최장집 고려대 교수) 

 

(백낙청 서울대 교수)

 

(이상 한겨레 신문 6월16일자 '한국 사회 미래 논쟁'참조)

 

 

 

① 남북한이 공존하는 나라.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과 통일

② 경제적 평등, 경제민주화 혹은 복지와 평등의 가치가 보다 더 진전되는 방향

③ ①②를 실현할 미래의 이념, (혹은 비전의 생성) 실현 방법

 

  ①, ②는 미래의 내용이다. 백낙청과 최장집은 ①, ②에 대해선 거의 일치한다. 약간의 표현이 다를 뿐이다. 차이는 ③에 있다. 이 말은 미래의 내용에 대해선 거의 일치하나, 미래의 이념, 비전에 대해 합의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의 비전이라 함은 보다 더 나은 사회, 보다 더 나은 환경에 걸 맞는 철학이랄까 세계관, 이념을 말한다. 미래의 실현 방법이라 함은 이를 실현할 조직이나 과정을 말한다.

 

  우선 최장집은 철학이나 이념으로서 ‘자유주의’를 제시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덕적 자율, 평등사상 등 인간적 가치를 기본에 둔다. 시장은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문들의 한 단위인데, 지금은 시장이 전체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가 됨으로써 인간적인 가치가 그보다 하위로 떨어지고 해체되는 구조다.” 한마디로 말해 ‘시장보다 인간을 우선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은 ‘정당’이 가장 좋다. 결국 최장집은 ‘정당’조직에 의한 ‘자유주의’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주의’는 “민족해방, 민중민주, 시민민주의 3자가 함께 연대해야 하는 것. 한마디로 온건개혁 세력과의 연대전략.”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종의 ‘전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백낙청의 철학이랄까 이념은 위의 3자가 연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의 3자 중 어떤 하나를 강조하지는 않는다.

 

  최장집은 주체세력이랄까 주도세력 보다는 조직의 특성에 기인한 세력을 말하고 있다. 최장집은 “정당만이 사회 내에서의 갈등을 분출할 수 있도록 하고, 갈등을 통해 권력을 추구하는 게 인간성의 일부이니까 정당은 그런 것을 묶어주면서, 경쟁을 여러 이슈에서 여러 단위로 조직해서 제도화하는 역할을 한다. 여러 방법 중에서 정당이 현실적인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이라고 본다.”고 주장한다. 최장집의 설명은 예를들면 미국이나 선진국 등에서 정당간의 차이가 거의 없거나 실제 지향하는 가치가 질적 구별이 없다는 점에 대해선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이웃 일본의 경우처럼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대중적 조직이 없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거나, 국가보안법이 존속되어 있는 상황에서 비추어 볼 때 타당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최장집의 설명이 유효하려면 정당의 고유 특성이 있어야 한다. 국가적 단위로 봤을 때 ,분파나 계파가 아니라 확실한 정책의 차이, 지지계층의 차이 등이 구별되는 본래의미의 정당이 자리 잡는 것이 전제로 된다. 만일 한국 정치정당의 특징이 수구, 자본, 노동자, 중소상인, 농민 등의 여러 세력이 ‘짬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본래 의미에서의 정치정당으로 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또한 정치정당화 되었을 때의 한계, 그리하여 각국에서 제기되고 있는 반세계화 비정부조직이라든가 운동조직이 정치정당의 한계를 비판하는 그 내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가 불투명하다. 우리 한국에서는 서구 선진국과는 다른 정당의 출현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정당을 미래한국사회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주장하기가 어렵다.

 

  이런 면에서 백낙청의 주장은 일단 타당하다. 한국사회는 급속하게 이익집단화 되고 있고, 각 계층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면에 부딪히고 있다. 각 세력은 이제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각 세력이나 계층의 이해관계가 관철되지 않는 한 한국사회가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한 단계 상승하기 위해서는 시급하고 우선적인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아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의 최소한의 공통분모는 바로 신자유주의 철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학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국차원의 대응은 불가능하다고 단정한다. 아울러 기업별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절대로 자본의 이해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리하여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공화국’을 강조하고, 소비자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중국이나 베네수엘라, 쿠바 등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아직 확실하게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은 황당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이를 반박할 확실한 사실적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신자유주의가 대세인 세상이고, 자본이 대세인 세상이며, 사회주의가 무너진 판국에 이런 저런 미래 대안을 내오기가 무지하게 갑갑한 그런 상황이다. 지금은 자본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그런 상황이다. 살기위해 일단은 자본을 수긍해야하는 그런 상황이다. 쪽팔리지만 진보세력의 노력이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르게 신자유주의는 무소불위의 자세를 확립했고, 대안은 안 보이는 그런 상황이다. 노무현은 당당하게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한미FTA도 마찬가지이다), 경제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자신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한계’ 라고.

 

  역사는 어느 한순간에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 아주 우연히, 아주 황당하게 그동안의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써야 한다. 기존의 생활로부터, 기존의 경험으로부터 골몰하겠지만, 그러나 아주 새로워야 한다. 상상하고 꿈을 꾸자. 더 나은 생활과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꿈을 꾸자. 신자유주의가 맹렬하게 우리를 공격하고 있지만, 우리는 일본놈들의 압제에도 살아남았고, 동족끼리의 그 잔혹한 전쟁도 극복했으며, 어쨌든 민주주의도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냈다. 우리는 힘들겠지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