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격동의 역사와 개인 혹은 쁘띠부르주아(김연수의 소설)

파랑새호 2010. 9. 28. 17:44

최근 나는 김연수의 소설을 3권 읽었다. 어떻게 하다보니 3권을 내리 읽었다. 특별히 김연수를 좋아해서 읽은 것은 아니다. 주제가 맘에 든 것도 아니지만, 그가 전달하고픈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김연수는 적어도 내가 읽은 3권의 소설에서는 공통된 사람을 다룬다. 지식인이랄까, 사회경제적으로는 중간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운동권 식 용어의 표현을 빌리면 쁘띠부르주아에 해당한다.

 

일단 연수의 소설은 소재 자체가 대중적이거나 일상적이지 않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는 학생운동, 통일운동의 주체들이 소재이다. [밤은 노래한다]의 경우는 만주의 통일전선 혹은 민족해방운동, [굳빠이 이상]의 경우에는 식민지 시대 이상의 데드 마스크, 혹은 이상의 유고, 이상의 작품세계 자체가 소재이다. 이런 소재들은 예를 들어 최근 많이 팔리고 있는 신경숙의 소설이나 박민규의 소설과 비교한다면 대단히 비대중적 소재들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지적할 점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전형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지금 전형적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기에서 필자가 의미하는 전형적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학생운동이면 학생운동, 독립운동이면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갖고 있어야 할 일반적인 특징, 지극히 상식적인 개념을 의미한다. 또한 예를 들어 학생운동을 소재로 했으면 주인공이 학생운동의 중심인물이던가 혹은 학생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김연수의 소설속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활동에 대해 전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 않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주인공은 비록 총학생회 선전부 차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으나 누가 보더라도 열렬한 학생운동가는 아니다. [밤은 노래한다]의 주인공은 어찌어찌 해서 항일 빨치산 유격대에 가담하게 되지만 본인 스스로 치열한 고민을 통해 가담하였다기 보다는 상황에 의해 떠밀려서 가담한다. 오히려 주인공은 일제시대의 일본기업에 취직하는 사람으로서 민족의식이나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소설 전체적으로도 주인공이 민족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굳빠이 이상]의 경우에는 누가 주인공인지조차 헷갈린다. 주인공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고 해야 한다. 여기선 이상의 시에 대한 해석과 이상의 유물에 대한 진본이냐 가짜냐에 대한 해석이 주된 내용이다. 이상의 유물을 둘러싼 진본에 대한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김연수의 소설은 90년 이후 우리사회가 개인들이 저마다 한 시대의 몰락을 주관화하고 내면화시키면서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환경을 전제로 한다. 즉 치열한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달하면서 한 단계 상승하는 그런 찰나에 소련의 붕괴, 독일의 통일이 발생하고, 전반적인 운동의 흐름이 하강하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김연수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개인의 성찰이랄까, 세상에서 개인이 갖는 의미, 깊은 내면의 성찰로부터 세계를 다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상황이다. 나는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80년대는 가히 민주화 운동의 시대였다. 독재정권 연장을 획책한 군부쿠데타 세력의 광주학살로 시작했던 우리의 80년대는 군사정권의 몰락으로 끝났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80년대 전반부를 장악했고, 좌파의 부각이 80년대 후반을 규정했다. 바야흐로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개인의 삶을 먼저 규정하는 그런 시대였다.

 

독일의 통일, 소련의 몰락은 이제 90년대를 나타냈다. 소련의 몰락은 바로 사회주의의 폐기를 의미했다. 한국 사회는 충분히 민주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젠 돈 벌일 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 자리잡았다. 90년대는 기대고 살아가야 할 가치나 이념이 사라지고 각개격파 당하지 않기 위해 홀로 서야 하는 시대였다. 세상이 나를 규정하기 보다는 내가 세상을 규정하는 상황. 한 시대의 우울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면, 그래야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내 등에 떠메기로 나는 마음먹었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127)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결국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그 모든 이념이나 민주주의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의 삶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것은 실제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역사의 위풍당당한 흐름에 한발 비껴가거나 혹은 묻혀버린 개인들의 실존적 삶이 전면에 부각되어야 하며, 그런 상황에 의미를 부여한다. 모든 진실, 살아있는 상황을 개인의 의미와 결부시킨다. 그렇다고 세상을 완전히 개인의 주관에 파묻는 것은 아니다. 마치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각나거나 혹은 김훈 [칼의 노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김연수는 그렇게 까지 극단적이지 않다.  역사의 흐름에 한발 걸쳐 있으나 언제든지 뺄 수도 있고, 두발을 넣을 수도 있는 그런 가변적인 상황, 가변의 기준은 개인의 성찰, 개인이 갖는 의미, 상황에 대한 주체성(혹은 주관)에 부여된다.

 

아직 완전한 개인으로 돌아서지 않았지만, 실존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않았지만 필경 그런 방향을 추구하고 마는 그런 소설이라는 느낌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