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생명-3

파랑새호 2009. 12. 11. 15:49

에드윈 슈뢰딩거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다른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제임스 왓슨의 유명한 책 [이중나선]에서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일본사람 후쿠오카 신이치가 쓴 책 [생물과 무생물사이]에서도 상당히 많은 분량을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다. 슈뢰딩거는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것임이 틀림없다. 다만 슈뢰딩거의 생각은 후쿠오카 신이치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물과 무생물 사이]

에드윈 슈뢰딩거 지음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대호 옮김, 궁리                      김소연옮김, 은행나무

2007                                     2008

 

슈뢰딩거는 생명에 대해 원자의 운동을 근거로, 특히 확산 현상을 예로 들면서 무질서속에서 질서가 자리잡는, 혹은 무질서를 통해 질서가 구축되는 점을 강조했다. 이 점은 일본사람 후쿠오카 신이치의 책에서도 거의 비슷하다. 신이치는 동적 평형개념을 사용하면서 생명이라는 것은 계속 변화해가는 존재이면서도 일정한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책에서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것 뿐만 아니라, 정신과 물질이라는 내용도 담고 있다. 슈뢰딩거 시절만 해도 자연과학자가 철학적 사색을 하는 통합된 사고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슈뢰딩거는 자연과학자로서 철학을 깊이있게 공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해도 학문이 세분화되어 현재와 같이 분야별로 파편화되어 있는 환경에서는 본 받아야할 자세이다. 엥겔스는 그의 저서 [자연변증법]에서 주장했다. 근대 자연과학의 제성과는 이론적인 것들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론적, 일반적 제결론으로 접근하도록 몰아세우고 있으며, 이점은 오늘날의 자연연구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자연변증법], 중원문화사 37)

 

슈뢰딩거는 서양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정신과 물질의 통일을 강조하는 듯한 주장을 한다. 대개의 서구철학은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한다. 플라톤이 그렇고 칸트도 그렇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변증법에 익숙하지 않은 얼치기 맑스주의도 사실상 이분법의 연장선 속에 있다. 하이데거가 실존이라는 개념으로 주체와 세계와의 통일을 시도했지만, 그가 내세우는 실존이라는 것이 세계 속에 한 부분이면서 세계를 구성하는 통일되어 있는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런 면에서 슈뢰딩거는 생물학이나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에 근거하여 사실상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지 않는 동양적 사고에 주목하고 있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슈뢰딩거는 인간의 뇌의 발달을 언급하면서 특히 인간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만 행동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추상적이다. 인간의 행위는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슈뢰딩거는 행동과 노동을 혼동한다. 슈뢰딩거는 인간의 발전에서 노동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노동과정에서 손의 역할, 감각기관 특히 신경계통의 발전, 언어의 발전 등에 대해 대략적인 인식은 하고 있으나 과학적인 구성으로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인간의 주체적인 행동을 강조할 뿐이다. 그는 다윈은 알았지만 맑스나 엥겔스는 알지 못했다. 그가 인식하는 노동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라는 훌륭한 존재가 하기에 너무 하찮은 노동을 기계가 맡아야 한다.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값비싼 기계가 하기에 너무 하찮은 노동을 인간이 맡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찮은 노동을 기계가 맡는다면 생산비는 절감되지 않더라도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더 행복해 질 것이다.(188)

 

슈뢰딩거는 자본주의 경제가 초래한 노동자의 궁핍화, 노동자의 예속화를 봤지만, 기계가 해야 할 하찮은 노동을 인간이 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착각한다. 슈뢰딩거는 생산관계, 사회계급의 영역으로 까지 사고가 확장되지는 못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강조는 비록 그의 철학적 견해가 조야하지만, 진보적인 방향임을 암시한다. 그는 정치적 사회적 발전과 역사적 사건들을 이미 예정되어 있거나 불변하는 운명으로 보는 보수적 견해를 반대하고 있다.

 

여하튼 슈뢰딩거와 신이치는 생명에 대해 거의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질서와 무질서, 변화와 균형이라는 상호 대립되는 개념의 통일, 엥겔스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한마디로 작용과 반작용의 통일이 생명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원자의 운동을 통해서, 신이치는 췌장의 효소세포를 통해서 주장하지만 결론은 같은 것이다. 이 같은 생명관은 이미 엥겔스라는 사람에 의해서 19세기에 주장된 것이라는 점도 같다. 슈뢰딩거와 신이치는 자신들의 생명관이  오랜 기간 연구를 통해서 결론내렸겠지만, 결국 엥겔스의 결론으로부터 한발짝도 진전하지 못했다. 이들의 연구과정에서 엥겔스의 [자연의 변증법]이 참조되지 않았을 뿐이다. (혹은 참조했을지 모르겠으나 의도적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거론되지 않았다.)

 

자연과학의 올바른 연구는 결국 변증법적 사고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이 다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