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무엇이 노동자 계급을 혁명적 주체로 만드는가?(번역문)

파랑새호 2013. 1. 28. 13:51

출처 ; http://monthlyreview.org/2012/12/01/what-makes-the-working-class-a-revolutionary-subject
저자 ; Michael A. Lebowitz   

(Michael A. Lebowitz 캐나다 밴쿠버의 Simon Fraser University 명예교수이며,  [자본을 넘어], [지금 건설하자] [사회주의적 대안] 등의 저자이다. 글은 [자본을 넘어] 이란 출판을 기념하는 서문이다.)

 

무엇이 노동자계급을 혁명적 주체로 만드는가? 절대정신의 천박한 재현이나 아니면 보편적 계급을 주장하는 헤겔주의적 신비주의는 아니다.  산업의 바퀴를 멈출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에 있다는 물리적 위치가 혁명적 주체로 만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고상한 것이든 천박 것이든 이런 설명들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 않는다. 물론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인가에 대해 좋은 설명을 해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도 이제는 노동자계급의 시대가 왔다가 가버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들면 몇몇 사람들은 예전에 자본이 노동자를 집중시켰고,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함께 투쟁과 조직을 있었다고 말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은 노동자를 투쟁하지 못하게 옥죄면서 서로를 대립하도록 하고, 분열시킨다. 예전에는 노동자계급이 잃을 것이 사슬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자본주의에 완전히 흡수되어 소비를 위해 소유한 물건과 물건을 소비하는 소비주의라는 감옥에 갇혀버렸다.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이상 혁명적 주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맑스주의의 ABC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노동자계급은 투쟁을 통해서 스스로 혁명적 주체로 되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주장한 혁명적 실천 개념이며, 자기 자신의 변화와 환경을 동시에 변화시킨다는 의미였다. 노동자계급은 투쟁을 통해서 변한다. 새로운 세계 창조에 걸맞는 자신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노동자는투쟁하는가?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는 맑스가  노동자의 자기발전의 필요성으로 부른 때문이다. 우리는 맑스가 노동자들의 자발적 임금투쟁이 부적절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맑스는 또한 노동자들이 이런 투쟁을 하지 않는다면 무관심하고, 생각도 없고, 생산도구에 불과하게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맑스는 투쟁이 없다면 노동자들이 상처받고, 나약해지고, 지쳐버리고, 저항할 없는 대중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투쟁은 생산의 과정이다. 생산은 노동자가 수행하는 생산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생산은 바로 노동자들의 능력을 증가시키는 생산이다. 바로 자신의 발전 능력을 확신하게 하는 생산이고, 조직하고 단결하는 능력이 확장되는 그런  생산이다. 자신을 스스로 확신하는 모든 투쟁, 사회정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모든 투쟁,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을 구체화 시키는 모든 투쟁은 행위자들의 역량을 구축한다.

 

그리고 이런 투쟁은 자본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가? 자본은 우리와 우리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모든 문명의 혜택을 가로채며, 사회적 도구와 사회적 지식에 의한 모든 산출물의 소유자이고, 노동자들의 생산품과 우리의 생산물을 우리와 대립하게 만든다. 자본은 이런 모든 것을 유일한 목적인 이윤을 위해 존재하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필요성에 만족하려 한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발전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자본에 반대하여 투쟁할 밖에 없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노동대중은 스스로 혁명적 주체로서 태어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노동자계급을 혁명적 주체로 만드는가? 독자여러분은 대답을 [자본론]에서 얻을 없다. 맑스의 [자본론] 노동자계급에 대해 서술한 것이 아니다. 자본론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자본의 본질이며, 자본의 목적과 역동성이다. 자본론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유일한 점은 자본이 노동자계급에 적대하여 작동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본가계급이 어떻게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에 대한 맑스의 언급을 여기저기서 찾아봐야만 한다. (특히 아일랜드와 영국노동자의 분열) 그리고 맑스가 비록 분명하게 자본의 현재 권력은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욕망 창출에 의존한다고 언급했다 해도, 맑스가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시기 노동자계급의 본질에 대한 결정적인 문제의식은 권의 책을 통해 해답을 발견할 있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에대한 답변을 개발해야만 한다. 오늘날 자본이 아닌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생존하기 위해 자본에 애원해야 하는가? 확실히 자본에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본에 노동력을 판매할 없는 사람들 착취받고 있으면서도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광범위하게 존속하고 있는 산업예비군의 역할을 하는 실업자들도 포함하여야 하고, 자본의 순환 구조에서 작용은 하고 있으나, 스스로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예를들면 비공식부문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투하는 사람들도 이들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들은 남성노동자들로 상징되는 전형적인 노동자계급에 걸맞는 유형은 아니지만,  사실 그런 전형적인 노동자에 대한 판단은 오류가 있었다.

 

확실히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잡다한(heterogeneous)본질에 대해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맑스가 인식했던 바와 같이, 노동자계급의 차이는 자본이 지배를 지속할 있게 만든다. 그러나 역시 맑스가 제기한 바와 같이, 투쟁의 과정에서 우리는 단결을 구축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전의 필요성이라는 보편적 목적을 인식하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모든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은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에 의해, 단결을 구축할 수가 있다. 자본은 자본주의 외에 대안이 없다고 우리를 확신시키면서 사상투쟁에서 승리해왔다.  이러한 이념은 혁명적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을 분열시켰다. 우리는 자기 발전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에 의해 사상의 전투에서도 싸울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노동자에게 권리에 대한 투쟁은 노동자계급을 단결된 대중으로, 혁명적 주체로서 형성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 세상에서 살고 있다. –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매일 만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