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피케티와 마르크스

파랑새호 2014. 10. 11. 13:33


피케티의 주장은 어찌보면 단순한 것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수치로 입증하기 위해 WTID라는 것을 이용해서 각 시대별 자본소득과 근로소득을 이용하여 보여준다. 예를들어 프랑스는 1910년~1945년 기간에는 자본소득이 떨어지고 불평등이 상당히 축소되었으며, 미국같은 경우는 1980년 이후 불평등이 폭발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임금소득에서도 소위 최고 경영자들의 임금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데, 이것은 세금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피케티는 민간자산중에서 절반이상이 상속되는 통계를 제시하면서, 상속세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피케티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글로벌자본세를 주장한다. 피케티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연간 4~5%퍼센트 정도인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높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과거에 축적된 부가 경제성장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다시 자본으로 축적된다는 뜻이다. 이와같은 자본축적을 통제하기 위해 글로벌자본세가 필요한 것이다. 피케티는 금융자본의 단기거래에 대한 통제가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내용은 굳이 맑스주의 경제학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약간의 진보적인 성향의 논문이나 책에서는 대개 나온 내용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단기금융거래에 대한 과세는 일찍이 198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였던 제임스토빈이 단기외환거래에 대한 통제를 주장한 ‘토빈세’를 비롯해 주류경제학내부에서도 심심치 않게 거론되어 왔다. 피케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된 점은 아마도 “모든 국가에서 불평등의 역사는 정치적이며 또한 혼란스럽다.”는 주장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주류경제학 내부에서는 상당히 하기 힘든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피케티가 “불평등의 역사는 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원시사회이후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피케티의 책에 대한 해설을 쓴 이정우라는 교수는 피케티가 쓴 글의 주장이나 내용보다 피케티가 글을 쓰기 위한 통계작업이 아주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그의 통계산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주류경제학 내부에서 신자유주의 폐해를 경험하면서 더 이상 자본의 횡포를 놔둘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피케티의 가장 큰 공로라고 본다. 피케티의 책은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피곤해 있는 지금이 아니고서는 관심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피케티가 주장한 글로벌자본세 혹은 누진세는 대단히 정치적인 투쟁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런 피케티의 주장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머 어떤가 이런 주장이라도 한두번 계속해서 나오고 또 지지하다보면 세계가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피케티는 그의 책에서 마르크스를 거명한다. 피케티가 마르크스를 거명하는 것은 두 번이다. 첫 번째는 “마르크스는 지속적인 기술진보와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무시했다. 기술진보와 생산성향상은 민간자본의 축적과 집중화과정에서 어느정도 균형을 잡아주는 힘이다. 중략 민간자본이 완전히 폐지된 경우 어떻게 그 사회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가)별로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두 번째는 이윤율의 하락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이윤율 하락의 재검토’라는 제목의 글에서 마르크스의 핵심적인 메커니즘은 “부르주아는 제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것이고,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증가하는 자본을 축적하는데, 이는 결국 참담한 이윤율, 즉 자본수익률의 하락으로 이어져 마침내 그들 스스로 몰락한다는 것이다.”고 이것이 마르크스의 핵심내용이라고 설정한다. 최소한 피케티가 이렇게 주장할 때는 최소한의 근거라도 제시해야 힘이 실릴 것이다. 피케티는 전형적인 “원전은 간데없고, 해석만이 난무”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내용은 마르크스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기술진보와 생산성향상을 무시했는지 알길이 없다. 그냥 피케티가 자기주장만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자본론에서 이윤율의 하락이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피케티 스스로가 제시하지는 않았어도 워낙 잘 알려진 내용이라 백보 양보하면 최소한 이윤율 하락이라는 표현은 마르크스가 썼다고 인정해 줄 수 있다. 피케티처럼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것은 대개가 마르크스를 피상적으로 읽었을 때, 혹은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을 읽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기서 한가지 스위지가 그의 저서 [자본주의 발전이론]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저절로 멸망할 것이라는 주장은 마르크스가 한 것이라기 보다는 베른슈타인이 먼저 한 것이다. 스위지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다름아니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저절로 멸망한다는 것”을 비판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도대체 마르크스가 그런 주장을 어디서 했는지 찾을 수 없었다라고 서술한다. 즉 유럽의 수정주의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자본주의의 자동적인 멸망’으로 이해하는 사상적 흐름이 있다. 피케티는 아마도 이러한 흐름을 별 고민없이 수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가정하에 이윤율의 하락을 언급한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이윤율 하락이 생각보다 완만했는데, 마르크스는 이에따라 [자본론]에서 이윤율의 하락을 방해하는 6가지 요인을(착취율, 불변자본비용의 저하, 가치이하로 억눌리는 임금, 산업예비군 증가, 외국무역, 주식자본의 증가) 제시한다. 아울러 마르크스는 [경제학비판요강]이라는 책에서는 기존자본 일부분의 항상적 감가, 비생산적 낭비(군사적 지출), 독점화, 노동집약적 산업의 창출 등등으로 이윤율 하락이 지연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는 영향에 대해 이미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빗 하비라는 경제학자는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주장에 대해선 대단히 비판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이윤율 저하에 대한 장기적 경향은 관철될 것이다”는 인상을 남겼다고 주장한다. 즉 이윤율 하락은 장기적으로 보면 불가피하다고 마르크스가 주장했다는 것이다. 스위지는 이윤율하락에 작용하는 힘은 잉여가치율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 두가지라고 전제하면서,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율이 불변일 때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한다는 가정을 토대로 이윤율의 하락경향을 도출했다고 주장한다. 스위지는 잉여가치율이 불변이라는 것은 생산성의 증가분만큼 생겨난 이득을 노동자와 자본가가 동등하게 나눠가져야 한다면서 이런일이 가능하겠냐고 제기하고, 마르크스의 전제 자체를 문제제기 했다. 스위지의 이런 판단은 정확한 것이다. 한때 스위지를 정통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사람도(우리나라에서 80년대 번역된 스위지의 저서 [독점자본] 역자후기가 대표적이다.)있었지만, 적어도 이윤율 하락경향에 대해 지적하는 스위지의 내용은 맞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론 2,3권은 마르크스 자신이 쓴 것이라기 보다는 엥겔스가 편집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고, 이런 편집과정에서 마르크스 본래의 내용이 불분명해진 점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윤율의 하락 경향에 대해서는 역시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오류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은 이윤율 하락 경향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마르크스라고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기술했겠는가? 어쨌든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윤율 하락 이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는 비판적인데, 마르크스주의 외부에서는 이것을 빌미로 마르크스 이론이 틀렸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경향이론을 마르크스의 대표적인 논리로 세우는 것은 그만큼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몰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건성건성 읽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려 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주장이다. 피케티는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소위 ‘거명효과’를 볼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피케티가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시 계급투쟁이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피케티 스스로 그점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물론 계급투쟁이라는 표현대신 “사회정치적 결과”라는 아주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대체했지만, 도대체가 사회정치적 결과의 핵심내용이 무엇인가? 피케티의 말마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고, 이것은 오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이 달성되는 것이다. 소위 ‘99%의 투쟁’은 전 시민의 투쟁이지 계급투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백보 양보할 자세가 되어 있다. 그래 ‘99%의 투쟁’이 중요하다. 99%의 핵심은 누구겠는가?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월급받고 사는 사람들이다. 소련이 멸망한 이후에 뭔가 그럴싸한 주장이 되려면 일단 마르크스를 거명하고 비판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버려 이제는 마르크스는 자신이 주장한 내용으로 보다는 남들이 얘기하는 마르크스가 진짜가 되버린 느낌이다.

 

또 한가지 피케티는 현대 사회 운동이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소위 비영리 협동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구구절절이 경제의 영역을 국가, 민간, 비영리협동이라는 3개의 영역으로 나누면서 시작된 협동조합운동을 다 얘기할 수 없다. 핵심은 관련된 여러 사람이 다함께 민간기관을 조직하여 비영리적 목적을 위해 사업을 한다는 점에 있다. 마르크스는 이미 파리꼬뮨에 대한 저술에서 이런 점을 선구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피케티의 제안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민간경제가 비영리협동으로 조직되어야 만 가능하고, 비영리 협동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경제적 활동만이 아니라 정치적 투쟁도 필요하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 사업수익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원칙에 따라 배분될 때 비로소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이미 꽤 자리를 잡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확장될 것임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시간은 걸리겠으나, 불가능하지 않다. 피케티가 마르크스가 민간자본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과도기 문제나 파리꼬뮨에 대한 내용 등을 읽지 못한 무지의 소치다. 통계작업하느라고 고생은 많았으나, 오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