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레닌과 "노동귀족"(에릭 홉스 봄)

파랑새호 2013. 1. 24. 14:29

출처 ; [Monthly Review]Vol.64 No.7(2012 December) 27 Page ~ 34Page

저자 ; Eric Hobsbawm

 

※ 역자 해설 ; 에릭 홉스 봄은 아래 글에서 레닌이 제기한 노동귀족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노동귀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수와 분리된 소수의 상층, 부르주아에게 팔리거나 다수 노동자 대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며, 실천과정에서는 자연발생적인 노동운동과 경제주의를지향하는 노동자 그룹을 의미합니다. 원래 노동귀족은 19세기 말 영국자본주의에서 나타났으며 일정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으나, 레닌은 제2차 인터내셔널의 붕괴와 제국주의 시대의 달라진 정치상황에 의거 대중들의 지지가능성을 배제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 노동귀족 논의를 경제주의, 수정주의에 초점을 맞추면서, '타락한 소수 상층노동자'로 초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즉 원래의 영국 자본주의에서 나타난 '노동귀족'의 경우에는 수정주의로 진화하면서도 일정한 지지기반을 갖춘 세력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 선진국 노동자들이 노동귀족을 지지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선 애매하게 처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민중과 선진국 노동자를 구분하면서, 선진국 노동자 대중이 식민지 민중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귀족이 될 가능성 등에 대해서도 아주 애매하게 처리해 버렸다는 주장도 하는 것 같습니다. 에릭홉스봄은 이런 레닌의 시대적 상황을 인식하고, 현재의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보다 확장된 노동귀족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19세기 영국의 노동귀족과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귀족이 다르듯이 레닌의 노동귀족 논의가 갖는 보편성을 흡수하면서도 현대의 노동귀족의 특수성 등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원문을 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여기 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주는 역자가 붙인 주입니다)

 

 

글은 레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레닌의 사상에 대해 토론하고자 글이다.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이 19세기 영국자본주의로부터 파생된 개념이기 때문에 영국의 맑스주의자들이 논의하기에는 적절한 주제라고 본다. 레닌이 노동귀족 언급할 때는 영국에서 배타적으로 나타난 노동자계급에서 형성된 일정한 (stratum) 의미했다.(비록 레닌의 제국주의의 노트에서는 대영제국의 백인노동자그룹에서 비슷한 현상이 보인다고 언급했어도) 자체는 1885년에 엥겔스가 쓰고 1892년에 개정판이 나온 [1844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 서문에서 사용한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엥겔스는 여기서 노동자계급 중에 귀족 형성되고 있는 영국의 거대 노동조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1]

 

실제적인 용어의 채택은 엥겔스가 했다고 있지만, 개념은 특별히 1880년대 영국의 사회정치적 논의에서 익숙한 단어였다. 시기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이에 해당하는 일정한 층은(stratum) -소수이기는 하나 수적으로 하나의 단위- “장인들”(예를들면 숙련된 기술자들 남성노동자들) 지칭하거나, 특별히 노동조합이나 여타 노동자조직에서 조직된 사람들을 언급했던 것이다.  외국인 들이 용어를 사용했던 것은, 예를들면 레닌이 [제국주의론] 8장에서 칭송한 슐츠 가버니츠(Schulze-Gaevernitz)[2] 주로 이런 의미였다. 이런 전통적인 개념은 전체적으로 유효한 개념은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회적 실체로서 노동자계급의 상위층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맑스나 엥겔스, 레닌 모두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고안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영국의 후반에 나타났던 용어일 뿐인 것이다. 더군다나 용어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어떤 확실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사살상 노동귀족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 논의가 갖는 의미는 다른 점에 있다. 엥겔스는 노동귀족이 영국의 세계 독점산업으로 가능해졌으며, 그리하여 독점의 종말은 나머지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 가능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바로 엥겔스의 이점을 계승한 것으로서, 실제로 1914 이전에 여러 해에 걸쳐 영국노동운동이 급진화되었을 엥겔스의 후반기 저작이라 있는 자유노동자 정책에 대한 영국에서의 토론(1912)”, “영국노동운동”(1912), “ 영국에서 기회주의의 비참한 몰락”(1913) 등에서는 이런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노동귀족이 영국노동운동의 자유-노동자주의 기회주의의 기초라는 점에 대해선 의심할 없었으나, 레닌은 시기까지는 노동귀족 논의가 갖고 있는 국제적 의미에 대해선 강조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레닌은 분명하게 수정주의의 사회적 뿌리로 노동귀족을 언급하지 않았다.( 1908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1910 유럽노동운동의 여러 차이등의 저작을 참조) 오히려 레닌은 무정부적 조합주의같은 수정주의가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주변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대열로 부터 교대로 특정 중간계층 소상점, 국내산업노동자들 등등- 일상적으로 창출하고 있으며, 이런 결과로 쁘띠부르주아적 경향이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침투하게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단계에서 레닌이 노동귀족으로부터 이끌어낸 주요 논점은 약간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레닌의 정치활동의 후반부에 가서 노동귀족문제를 논의했다는 점이 인식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레닌은 영국에서의 개인적 경험과(1902년부터 1911 기간에 6번이나 영국을 방문했다) 영국노동운동의 상황을 빈번하게 언급했던 맑스 엥겔스의 저작에서 뿐만 아니라, 19세기 귀족적 노동조합주의에 대해 소개해 놓은 시드니와 베아트리체 웹의 [산업민주주의]라는 저작으로부터도 노동귀족 현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취득하였던 같다. 중요한 저작에 대해 레닌은 시베리아 유형 시에 번역을 놓는다. 책은 레닌에게 우연히 영국의 페비언주의와 베른슈타인[3] 간의 연계를 이해할 있게 해주었다. 레닌은 베른슈타인의 주장이나 사상의 핵심 토대는 웹의 최근 저작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1899 9월에 진술하였다. 레닌은 지속적으로 여러 해에 걸쳐 웹의 저작내용을 인용하였으며, 특별히 그의 저작 [무엇을 것인가?] 논의과정에서도 웹의 [산업민주주의] 언급하고 있다.[4]

 

레닌이 영국노동귀족의 경험으로부터 제기하는 거의 대개의 논점은 부분적으로 보면 가지 내용이다. 첫째 사회민주주의 역할의 의식적 내용 전혀 없는 노동운동의 자연발생성에 대한 맹목적 추종은 그것이 좋다 나쁘다의 문제라기 보다는 노동자들 내부에서 부르주아 이념의 영향력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순수한 노동조합주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조합이 주도하는 투쟁으로 귀결될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조합들간에 다양한 노동조건이 있기 때문에,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은 조합과 관계해서 투쟁이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것인가] 웹의 직접적 인용으로 제기한 두번째 논의)[5]

 

첫번째 논점은 자본주의 내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의식적인 요인들 의하여 신중하게 논박하기 전에는 헤게모니적 특징을 갖고 있다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이런 내용은 사실 노동귀족을 넘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논점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이상의 논의를 진행시키지는 않겠다. 두번째 논점이 노동귀족 논의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라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불균등발전의 법칙 필연적이라면 - 예를들어 같은 경제내에서 다양한 산업이나 지역에 따른 조건의 다양성 순수하게 경제주의노동운동은 나머지 노동자들의 희생을 근거로 자신들의 이해관계 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쁘띠 부르주아”)분파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과정에서 만일 필요하다면 일정하게 사용자와 동맹을 맺기도 한다. (레닌은 여러 1890년대 다양한 철강노동조합에서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조합과 경영진 블록과의 결합을 시도했던 버밍엄동맹 언급한다. 그는 이런 내용의 대부분을 앞의 웹의 저작에서 인용한다) 결론적으로 순수한 경제주의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의식이나 통일성을 깨뜨리고 혁명적 역할을 약화시키거나 반대세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논의는 대단히 보편적인 것이다. 우리는 노동귀족을 일반적인 모델의 특수한 경우로서 판단할 있다. 노동귀족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상황이 특정 영역을 관리하려 , 예를들면 특정영역이 갖고 있는 희소성, 기술, 전략적 위치, 조직의 강력함 등등을 이유로 나머지 대다수 보다는 특정영역의 조건을 좋게 만들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일정한 양보를 추구할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닌이 차례 언급하려 했던 바와 같이, 19세기 후반 영국의 상황은 대개 노동귀족과 효과적인 노동조합운동이 일치했다.

 

그러나 만일 논의가 원칙적으로 보다 보편화된 내용이라면, 레닌이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사용할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점이 있었을 것이다.  레닌은 여러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표현하고 있다. : “ 노동귀족 내부에서 우세한 쁘띠부르주아 장인정신”(“국제사회주의국 회의”, 1908): “편협하고, 귀족적이고, 속물근성으로 이기적인 영국 노동조합” : “일반적인 원칙을 무시하고, 실용성이라는 명분에 대해서만 자부심을 갖고 있는 영국인들 ; 이것은 노동운동 내에서 장인정신의 표현이다”(“자유노동자 정책에 대한 영국의 논의”, 1912) ;  노동귀족은 ….. 프롤레타리아 노동대중과는 동떨어져 있으면서 장인조합, 이기심과 밀접하다”(“Harry Quelch”, 1913 ; 역자주 - Harry Quelch 영국의 좌파). 더군다나 나중에 가서는 신중하게 표현해야 강령 문서에서 조차도 사실상, 그의 국제 공산주의자 2 회의를 위한 농업문제에 대한 강령초안에서”(1920)- 노동귀족과 부르주아와의 연계는 분명해졌다고 언급하고 있었다.

 

산업 노동자들은 만일 협소한 장인정신이나, 협소한 노동조합의 이해관계, 그리고 때론 약간 개선된, 쁘띠뿌르주아적 조건, 자신들의 이해관계 만을 증진시키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다면 전쟁과 자본의 족쇄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다는 세계역사적 임무를 달성할 없다. 이것은 2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정당의 토대를 제공했던 노동귀족 대한 여러 선진국에서 발생한 경험과 일치한다.

 

위의 인용문은 노동귀족에 대한 레닌의 초기와 후기사상을 결합한 것으로서 우리를 자연스럽게 하나 이상의 논의로 이끌고 있다. 이와 같은 후기 저작의 내용은 모든 맑스주의자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것은 주로 1914-1917 기간 중에 작성된 것으로서, 전쟁 발발에 대한 일관된 맑스주의적 해석을 위해 의도한 것이고, 특별히 대부분의 유럽대륙의 정당과 2 인터내셔널의 붕괴로 인한 것이다. 이들 내용의 대부분은 [제국주의론] 8장과 뒤에 (1916 가을) 보완하여 작성한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 서술되어 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 내용은 알려져 있지만,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 뛰어난 내용은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다. 좀더 넓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영국자본주의의 특수한 조건에 의하여 – “광범위한 식민지소유와 세계경제의 독점적 위치”- 영국노동자계급은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소수의 혜택 받은 노동귀족과 광범위한 하부 대중 계층으로 분열되었다. 상층부(The upper stratum) 노동자들은 부르주아화 되고반면, 동시에 부르주아에 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이 주는 돈을 받고 있던 사람들을 뒤따르던   프롤레타리아트 영역(section)” 있었다. 제국주의 시대가 되면서 순수하게 영국적 현상의 하나였던 노동귀족이 이제는 모든 제국주의 국가에서 나타난다. . 그리하여 기회주의, 타락한 사회배타주의는(social chauvinism) 2 인터내셔널 주요 정당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기회주의는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국가의 노동자계급 운동에서도 승리를 달성할 없다.” 왜냐하면 세계독점은 이제 여러 국가들간의 경쟁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노동귀족의 현상을 일반화시키면서, 또한 소멸을 위한 조건도 제공하고 있다.

 

[제국주의론] 갖고 있는 상대적으로 엉성한 내용은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에서 보다 완전한 논리로 확장된다. 노동귀족의 출현은 독점의 초과이윤으로 설명될 있으며, 독점의 초과이윤은 자본가들에게 특정국가의 자본가와 노동자간에 다른 국가에 대한 대결을 위해 노동자들 일부에게(하나의 작은 단위가 아니다) 뇌물을 제공하고, 일정한 동맹을 형성할 있게 하였다.” 뇌물 트러스트, 금융과두제, 높은 독점가격 등등(예를들면 특정 자본주의와 노동자가의 독점적 결합으로 가능하다) 통해 조성된다. 뇌물의 양은 적지 않으며 레닌은 수십억프랑중 수백만프랑정도로 계산하는데- 이로인해 어떤 특정상황에서 혜택 받는 노동자 층이 나타난다. 그러나 뇌물이 노동고위관료들,  노동자대표기구’….전시산업위원회의 노동자 위원, 노동담당 공무원, 협소한 장인조합에서 조직된 노동자들, 공무원 등등간에 어떻게 배분될 것인가는 부차적 문제였다.”  나머지 논의는 아래에서 제시한 몇가지 예외적인 내용과 함께 강화된 것이지만, 그러나 [제국주의론] 논점을 실제적으로 변경한 것은 아니었다.

 

레닌의 분석이 특수한 역사적 상황 2 인터내셔널의 붕괴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과, 그로부터 파생된 특수한 정치적 해결을 지지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핵심이다. 레닌은 우선 첫째 기회주의와 사회 배타주의가 프롤레타리아의 소수를 대변할 뿐이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반드시 아래로, 깊이현실의 대중들에게 다가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둘째 부르주아 노동자 이제 돌이킬 없을 정도로 부르주아에게 팔려 버렸다. 그들이 비록 맑스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맑스를 확실히 알고 있다 주장하겠지만, 혁명적 프롤레타이아트로 되돌아 수도 없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혁명가들은 반드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적 속물근성 경향과의 통일을 거부해야만 한다. 요컨대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을 공산주의 노동운동으로 대체하기 위해 국제사회주의 운동은 분열될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적용된 것이지만, 이를 설명하는 레닌의 분석은 대단히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다. 노동귀족 논의는 보편적 분석이면서도, 특수한 정치적 쟁점의 부분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노동귀족에 대한 레닌의 애매모호한 내용이 아주 세밀하게 분석되지는 않았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레닌은 부차적이라는 표현으로 특정 내용은 무시해 버렸다.  부차적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논의는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불문명하거나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이런 어려운 점들의 대부분은 노동자계급의 부패한 영역과 그것은 소수, 혹은 때론 레닌이 쟁점을 제기하는 표현처럼 보이는 미약한 소수가 맑스주의자들이 활동대상으로 하는 사람들, 부르주아적 지위 물들지 않은 대중들과 대립하고 있다는 레닌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맑스주의 전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지적할 점은, 우선 부패한 소수는 레닌의 전제에도 불구하고 수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영역이었고, 조직된 노동운동의 보다 단위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19세기 후반 영국이나 1914년의 독일(레닌이 제시한 사례)처럼 대략 프롤레타리아트의 20% 잡아도 정치적으로 쉽게 무시할 만한 비중은 아니거니와, 레닌도 역시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무시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레닌의 공식에는 주저함이 나타난다. 레닌의 주저함은 바로 노동귀족에 대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에게 경제적으로 팔려버린 대해 드러난다.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 층이 어떤 층인지가 분명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런 유형의 노동자에 대해 피상적으로 언급된 내용은 기능적이거나 정치적이었는 , 예를들면 수정주의적 노동운동이 그것이다. 이들은 실제로 부패한 소수-미약한 소수-이고 때로는 솔직하게 부르주아지에게 팔린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들에게 추종자들이 있었는지는 논의하지 않았다.

 

두번째로 노동자 대중의 위치는 상당히 애매하게 처리되었다. 레닌이 기회주의 기초로서 언급한 시장독점의 착취구조에서 나타난 여러 기능들은 노동자계급의 특정 층에게만 혜택을 제한할 없었다. “다른 국가에 대항하여 특정 국가의 노동자들과 자본가 간의” “동맹과 같은 ” (그리고 레닌은 웹의 버밍엄 동맹 사례도 제시했다) 그런 동맹이 비록 노동자 중에서 전략적 강점을 갖고 있던 노동귀족과 조직된 노동자에게 보다 많은 혜택이 돌아갈 있었다고 해도, 모든 노동자에게 일정한 혜택이 배분되었다는 점을 추정할 있는 여러 근거들이 있다. 실제로 19세기 영국자본주의의 세계 독점적 위치는 노동귀족에게는 실제적인 혜택을 제공한 반면 하부의 다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눈에 띄는 혜택은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영국자본주의가 경쟁, 자유, “자유방임자본주의 단계와 인플레이션의 조건 속에 있었기 때문이며 (소수의 프롤레타리아 그룹이 단체교섭을 주도) 이때는 영국노동자들에게 세계독점의 혜택을 배분하는 방법이 시장 외에는 다른 구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 단계가 되면 이런 내용은 이상 적용할 없다. 트러스트, 가격담합, 동맹 등등으로 보다 일반적인 노동자에게 혜택이 있는 타협적 배분수단이 제공되었다. 더군다나 레닌이 인식하고 있던 바와 같이 국가의 역할이 변하고 있었다. “로이드 조지 정책(Lloyd Georgeism)”(“제국주의와 노동운동의 분열에서 언급하고 있다) 사회개혁의 형태(보험 등등) 복종하는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실제적 뇌물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개혁이 귀족적노동자 들이 이미 확보한 것과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비귀족적노동자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갔던 것은 확실하다.

 

마침내,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은 부자들과 특권 국가의 도구로서 인류전체에 기생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고 논의하고 있다. 예를들면 세계를 착취하는국가와 프롤레타리아국가로 나눌 있다면서 집단착취계급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집단착취는 제국주의 국가 프롤레타리아에게 특권층에 해당하는 혜택을 부여할 있을 것인가? 레닌은 원래 로마제국 프롤레타리아트가 집단적 기생계급이었다는 점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1907 슈트트가르트 회의에서 작성한 글에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을 하지 않는 소유계급은 착취자를 타도할 없다.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만이, 사회전체를 유지할 있고, 성공적인 사회혁명을 달성할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극단적인 식민지정책의 결과 유럽프롤레타리아트는 부분적으로 사회전체를 유지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노예화되어 있는 식민지 민중이 사회전체를 유지하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특정 국가에서 이러한 상황은 하나이상의 식민지 배타주의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변질시키는 물질적 경제적 기초를 창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원인을 이해하여야 하며, 죄악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맑스는 종종 마치 현대 사회가 프롤레타리아의 희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반면, 고대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사회의 비용으로 살았다는 시스몽디의 주장을 아주 중요하게 언급하곤 했다.”(1907) 9 후에 후반기 토론 속에서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분열 로마제국의 프롤레타리아가 사회의 비용으로 살았다 점을 다시한번 거론하고 있다.

 

수정주의의 사회적 뿌리에 대한 레닌의 분석은 노동귀족의 형성과 관련해서만 언급되곤 했다. 물론 레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다른 논의를 대부분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점보다 이점에 중점을 두고 분석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분석에서 그가 동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여러 정치적 논의를 하지 않고, 분석을 확장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레닌의 저작을 꼼꼼하게 읽는 다면 문제의 다른 측면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배타적으로 측면에 대해서만 노동귀족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다. 오늘날 레닌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의 요구나 제한된 정보를 반영한 내용을 지속적 타당성을 갖는 내용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해 졌으며, 이에 따라 우리는 역사적 관점에서 그의 저작을 봐야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노동귀족 대한 레닌의 저작을 판단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는 레닌의 1914-1916년의 기간중의 저작은 [무엇을 것인가]에서부터 [1920 농업문제에 대한 강령초안] 이르는 심오한 사상 노선보다 약간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점을 결론적으로 인식할 있다. 사실상 노동귀족 대한 분석의 상당한 비중이 제국주의 시기에 적용되었다고 해도, 레닌이 주제에 대해 생각한 계기가 것은 19세기(영국)고전적인 모델이었다. 19세기 영국의 노동귀족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정점에 도달했던 일정한 세력을 차지한 노동자계급 내의 층으로서 1914년까지 영국노동운동을 수정주의로 이끌었다 

 

반면에 노동운동 내부의 자연발생적 성격 이기적경제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보다 일반적화 논의는 19세기 후반 영국노동귀족의 역사적 사례에서 추출된 것이긴 해도, 일정한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레닌이 맑스주의에 대해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지속될 있는 공헌 사례중의 하나일 것이다.

 

 



[1] [맑스 엥겔스 선집 6](박종철 출판사 발행)에서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 레닌은 그의 저서 [제국주의론]8장에서는 주로 독점자본주의의 기생성을 언급하면서 슐츠 가버니츠의 저서 [Britischer Imperialismus] 를 많이 인용한다.(특히 슐츠 가버니츠는 제국주의적 지배의 경제적 토대로서 이자와 주식배당금, 유가증권 발행, 수수료, 투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지적하고 있다.) 제국주의론에서 구체적으로 이를 언급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국노동계급에 대하여 말할 때 노동자 상층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하층을 체계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이 상층은 협동조합, 노동조합, 스포츠클럽 및 수많은 종교단체에 대부분이 구성원을 공급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조응하여 선거제도도 확립되는 데, 영국에서 이 선거제도는 아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하층을 배제하기에 충분할 만큼 제한되어 있다”!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미화하기 위하여 대개 프롤레타리아트의 극소수에 불과한 이 상층만이 언급된다.”

이상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발행, 1986, 140쪽을 참조)

[3]베른슈타인은 그의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강신준 옮김, 한길사, 1999)에서 첫째 신용체제, 발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기업가 조직에 의한 활동으로 자본주의생산의 무정부성을 완화할 수 있고, 결국 자본주의는 지속될 수 있다는 관점, 둘째 자본주의 경제가 지속됨에 따라 중산층의 규모가 확대된다는 관점. 셋째 노동조합 투쟁과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투쟁으로 자본소유자의 권리는 제한되고 점점 더 단순한 행정가의 역할로 전락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제도변화로도 충분히 사회주의적 변혁을 가져온다는 점 등이다. 즉 베른슈타인은 맑스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과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을 거부했다.

[4]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제3 1절에서 웹을 언급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철저한 학자(그리고 철저한기회주의자)부부인 웹 부부의 글을 훑어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영국의 노동조합들이 이미 오래 전에 경제투쟁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하는임무를 인식하고 실현하고 있으며, 이미 오래 전부터 파업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협동 조합 및 노동 조합 운동을 가로막는 온갖 법적 제약을 철폐하기 위해, 여성과 아동 보호법을 제정하기 위해, 위생법 및 공장법을 통해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이상,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호정 옮김, 박종철출판사, 1999, 80) 다만 옮긴이 최호정은 여기서 레닌이 이야기하는 웹 부부의 글은 그들의 저서 [영국노동조합운동사]를 지칭한다고 적고 있다.

[5] 위의 책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투쟁은 필연적으로 노동조합 투쟁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직종에 따라 노동조건은 천차만별이며, 따라서 그러한 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은 직종별로 행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레닌, 위의 책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