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과 환경문제

소련후기생태학(번역문)

파랑새호 2016. 1. 8. 15:33

원문출처 :

http://monthlyreview.org/2015/06/01/late-soviet-ecology-and-the-planetary-crisis/

원문저자 : John Bellamy Foster


소련의 생태학은 우리들에게 일련의 평범하지 않은 역사적 아이러니를 나타낸다. 한쪽에서만 보면 1930년대와 40년대 소련에서는 급속한 산업팽창의 문제로 인해 환경이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환경 생태보호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추방하기도 했다. 최종 결과는 극단적으로 높은 수준의 공기와 물 오염뿐만이 아니라,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바이칼 호 파괴, 아랄 해의 고갈 등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환경학살”(ecocide)이라는 표현으로 언급되기도 한다.1) 반면 다른 측면도 존재하는 데,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변증법적인 공헌으로 생태학을 발전시켜왔으며, 기후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혁명적 성과를 달성했고, 선구적인 보전형태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명한 자포베드니키(zapovedniki) 혹은 과학적 연구를 위한 자연보호지역 이외에도, 숲을 확대하고 보전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왔다. 환경역사학자 스테판 브라인Stephen Brain은 “숲의 보전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따라올 수없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1960년대 초반 소련은 계속해서 환경개혁 조치를 시행했고, 1980년대에는 소위 “생태혁명”의 현장이었다. 이처럼 복잡한 실체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는 것은 최근 학계에서 소련의 환경역사를 “환경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내용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2)


1960년대부터 소련의 생태 사상은 환경운동과 함께 급속하게 성장했으며, 기본적으로 과학자들이 주도하였다.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큰 환경보전 조직이 소련에 나타났다. 이러한 발전은 사회를 실제로 변화하도록 만들었다. 예를들면 1980년과 1990년 사이에 고정오염발생원stationary sources에 의한 공기오염도는 23퍼센트 하락했다.3)


오늘날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1950년 후반부터 지구생태환경에 소련이 기여했던 역할이다. 소련의 기후학자들은 지구의 기후변화가 급속하게 악화되고 있다고 발견했으며, 경고했다. : 즉 ① 초기 주요한 기후변화 모델 개발. ② 극지방의 빙산이 녹아내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 작용 초래에 대한 입증. ③ 원시기후 분석의 개척, ④ 생물권 분석에 기초한 특정 분야로서 지구생태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의 구축. ⑤ 핵겨울 이론의 최초 고안. ⑥ 그리고 아마도 맨 처음으로 지구적 시스템의 변화에 근거하는 자연-사회의 변증법적 탐구.4)


소련의 생태학은 대략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 ① 1917년 혁명으로부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혁명적 생태이론과 환경보전 중심으로 특징짓는 초기 소련 생태학, ② 중기 혹은 1930년대 중반 이후 1950년대까지의 스탈린 시기로서 숙청, 급속한 산업화, 2차 세계대전, 냉전구도의 시작, 공격적인 재조림이 특징이다. ③ 1950년 후반부터 1991년에 이르는 기간의 후기 소련 생태학으로서, 변증법적 “지구 생태학”의 발전이 특징이며,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이후 극단적인 환경악화라는 특수성에 대한 대응으로서 강력한 소련 환경운동이 출현했다. 마지막 산물은 생태학적 영역에서 일종의 부정의 부정이었다. ; 그러나 이중 한가지는 소련의 멸망을 이끈 폭넓은 세력에 의해 대체되었다.


초기와 중기 소련의 생태학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후기 소련생태학에 대한 문헌은 적은 편이다. 서구의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은 소련의 생태학이나 철학의 급속한 발전과는 무관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소련의 후기 생태학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남아 있으며, 현재의 지구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일정한 도움이 될 수 있는 가치있는 유산이다.


레닌과 스탈린 통치하의 소련 생태학


초기 소련 생태학은 대단히 역동적이었다. 레닌은 부분적으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으로 생태학적 가치개념을 강력히 포용하였고, 환경보전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블라디미르 니콜라에비치 수카체프(Vladimir Nikolaevich Sukachev)의 [습지 ; 형성, 발전, 특성Swamps: Their Formation, Development and Properties]이라는 책을 읽었다. 더글라스 바이너(Douglas Weiner)는 이 책에 대해 “총합적 생태학적 관점으로 쓴 수가체프의 공동체 생태학의 선구적 저작”이라고 평가했다. 1917년 혁명이후 레닌은 아나톨리 바실리에비치 루나카라스키Anatolii Vasil’evich Lunacharskii가 지도하는 인민교육위원회의 창설을 지원했으며, 위원회는 환경보전의 책임도 부여했다. 1924년에 전러환경보전협회(VOOP : All-Russian Conservation Society)가 천명 정도의 회원으로 창설되었다. 레닌과 교육위원회는 자포베드니키(zapovedniki)로 알려진 상대적으로 원시림의 형태를 갖춘 뛰어난 생태보전지역을 과학적 연구 목적과는 별도로 조성했다. 1933년까지 모두 합하면 270만헥타가 넘는 33개의 자포베드니키(zapovedniki)가 있었다.5)


수가체프를 제외하고 1926년 기념비적인 저작[생물권 The Biosphere]를 저술한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Vladimir Vernadsky가 포함된 핵심적인 소련의 생태사상가는 다음과 같다. : 1920년대 초반 주로 생명의 기원이론을 발전시킨(영국의 홀데인J.B.S. Haldane과 동시에) 알렉산더 이바노비치 오파린Alexander Ivanovich Oparin, 에디오피아, 터키, 티벳, 멕시코, 페루 등의 전 세계를 포괄하는 지역의 초창기 인간의 경작지와 관계한 생식세포와 유전 저장소(바빌로프 영역으로 알려졌다)의 기본적인 요소를 발견한 뛰어난 식물유전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비로프Nikolai Ivanovich Vavilov.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위의 발견을 일반화했던 마크스주의 이론가자이면서 레닌과 가깝고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Bukharin)과 교제하였던 과학사학자 우라노프스키Y. M. Uranovsky. 베르나드스키를 뒤따라 부하린은 인간과 자연과의 변증법적 상호작용과 생물권과 관계하고 있는 인간을 강조하였다. 동물학자인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스탄친스키Vladimir Vladimirovich Stanchinskii는 생태공동체의 에너지 분석 개발의 선구자였고(영양 수준에 대한 내용이었다), 자포베드니키의 옹호와 이의 확산을 주도했다. 스탄친스키는 소련의 첫 번째 공식 생태학 저널의 편집장이기도 했다. 물리학자 보리스 헷센Boriss Hessen은 역사적유물론의 영역에서 과학의 사회학적 역사학적인 재해석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레닌의 사망과 스탈린의 등장이후 소련의 환경보전과 유전학관련 영역은 통제국가 안에서 관료화되거나 정치화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지도자급 과학자들과 지식인들, 특별히 193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후반기까지 30여 년간, 맨 처음에는 레닌 농학 아카데미 총연합the Lenin All-Union Academy of Agricultural Sciences과 그 후에는 소련과학아카데미 유전학연구소the Institute of Genetics of the USSR Academy of Sciences에서 이사직을 수행한 소련 생물학의 중요한 인물 트로핀 데니소비치 리센코Trofim Denisovich Lysenko에게 문제제기 했던 사람들은 제거 되었다. 또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고 농업에서 더 많은 생산성을 보장한다는 발육조절vernalization이나 교배와 같은 다양한 기술을 과장하는 리센코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저명한 과학자들이 숙청되었다. 그 결과 이 시기 소련은 스탈린의 경쟁자로서 알려진, 가장 창조적인 생태학 사상가 부하린과, 부하린, 바빌로프Vavilov와 가깝게 지냈던 헷센Hessen 두사람은 처형되었다. 리센코의 유전학에 반대했던 바빌로프는 감옥에 갇히고, 수년 후에 영양실조로 사망하고 표식없는 무덤에 내버려졌다.6)


1927년에 “순응화acclimatization” 연구(예를들면 자연의 변화를 위해 국내의 동물과 식물들을 그들이 서식하고 있던 본래의 지역에서 제거하고 새로운 거주지로 배치하는 실험)를 위해 자포베드니키를 이용하는 문제가 소련생물학계에서 제기되었다. 수카체프 Sukachev와 스탄친스키Stanchinskii는 불법 가능성이 있다고 제기하면서, 순응화 연구에 반대하고 자포베드니키를 강력하게 보호했다. 1933년 스탄친스키가 자포베드니키 수호와 순응화 연구에 반대하며 직접 리센코와(그리고 리센코의 동맹자 이삭 이즈라일로비치 프레젠트Issak Izrailovich Prezent와도) 대립했으며, 1934년 스탄친스키의 체포, 투옥, 고문 등이 이어졌다. 그는 1942년 7월 감옥에서(두번째 체포이후)사망했다.7)


특별히 농업과 연관된 분야에서 소련 생태학의 결말은 재앙수준이었다. VOOP의 회원은 1932년 1만5천명까지 증가했으나, 1940년이 되면서 2,50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자포베드니키는 원시 자연의 과학적 연구를 위한 보호구역에서, 자연-전환 센터로서 새로운 역할응 하는 곳으로 점점 더 변해갔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생태학과 기후학의 중요한 두 분야가 남아있어 소련생태학은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핵심적인 지적성과중의 하나는 1941년 수카체프가 처음도입하고, 1944년에 완전하게 발전한 생태환경지리통합권(biogeocoenosis, biogeocoenose라고도 한다)의 개념은, 전 세계와 소련 모두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아더 탠스레이Arthur Tansley의 생태계 범주에 대한 경쟁개념이 되었다.9)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수카체프는 러시아의 과학적 숲 생태학의 창시자이자, 1920년에 사망한 게오르기 페도로비치 모로조프Georgii Fedorovich Morozov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모로조프 Morozov는 1877년 독일인 동물학자 칼 뫼비우스Karl Möbius가 창안한 생태통합권biocoenosis(혹은 생물학적 공동체biological community)의 개념을 확장해서 사용하여, 러시아 생태학에서 구조적 사고를 도입하는데 기여하였다.


수카체프의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의 개념은 비생물적 환경과 결합하기 위한 의도에서 생태통합권의 확장된 발전이다. 이것은 생태계라는 개념보다 역동적이고 좀더 단일화된 범주로서 에너지의 변증법적 조건dialectical-energetic terms을 고려한 것이다.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이라는 개념은 베라나드스키의 생물권과 생태지리화학 순환의 개념에 내적 연관성이 있고, 그 개념에서 발전하였다. 수카체프에 따르면 1964년 그의 대표적작 <숲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의 기초>(N. Dylis와 공저)에서 “모든 자연현상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사상은 ..... 칼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창시하고 입증한 유물변증법의 기본적인 전제중의 하나이다.”10)라고 주장했다. <생태환경지리통합권>에 대해 수카체프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지구표면상 동일한 자연현상(기압, 광물층, 식물, 동물, 미생물의 생존, 토양과 물의 조건 등)이 나타나는 특정 지역에서의 결합으로서, 구성요소들의 특정한 상호작용 유형을 보유하고, 그들 상호간에 혹은 여타의 자연현상과의 에너지와 물질의 특정한 상호교환 유형이며, 내부 모순의 변증법적 통일을 나타내고, 항상적인 운동과 발전 속에 있다.11)


1960년의 논문에서 그의 주장은 더욱 나아간다.


자연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이나 상호영향이 존재한다는 사상은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생태적 통합]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태환경지리통합권biogeocoenosis”(“공동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코이노스와, “생명”에 해당하는 bio, "지구"에 해당하는 geo라는 접두어에서 온 단어로, 지구표면 상의 여러 요소들과 살아있는 것들의 전반적인 통일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한 개념)는 아주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조건을(모든 대안과 대조적으로)표현하는……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은 아마도 살아있는 생명체(식물, 동물, 유기물)와 죽어있는 비생명체(암석권lithosphere, 대기권, 수권hydrosphere)간의 분명한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지구 표면상의 특정 부분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이웃하는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이나 단일하게 남아있는 여타의 자연기관과 물질과 에너지를 상호교환, 획득, 전환하는 체제이다.

모든 구성요소들 자신들과 이들을 둘러싼 자연적 조건들과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은 개별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이 역동적 현상, 항상적인 운동, 변화, 발전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12)


그리하여 수카체프는 “개별 유기체와 개별 종은, 환경과 변증법적 통일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적 조건의 핵심적 영향은 “진화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 있는 다세포 유기체 -예를들면 환경과의 관계에서 갖는 적응메카니즘과 특성화 영역이 보다 넓은 것이 특징이다.-가 “상대적 자율성장”을 경험한다는 것에 있다.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은 환경속에서 서로 활동적으로 변화하는 유기체들이, 복잡한 과정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진화하는 - 특정한 연구를 요구하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은 가변적인 여러 구성요소들 전부의 상호작용을 통하고, 특정한 법칙에 일치하여 발전한다. 구성요소들 간에 항상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는 이 과정은, 늘 이미 수립된 기존 관계를 교란하고,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의 진화에 영향을 준다.”13) 일반적인 변증법적 구조처럼 수카체프의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은 내부의 역동성, 모순적 변화, 생태적 과정의 불안정성을 강조한다.(주요 경쟁개념이라 할 수 있는 ‘생태계’ecosystem보다 더 많이 강조한다)


소련 생태학의 변증법적, 통합적 접근은 모로조프Morozov와 수카체프같은 사람들의 공헌으로 촉진되었으며, 이는 특정조건에 대한 상세하고도 경험적인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어, 숲-생태학-체제의 건강성이 기후 통제와 수문학hydrology에 핵심이라는 내용을 인식하게 하였다. 이러한 광범위한 생태학적 사고는 1948년에 제기된 <위대한 스탈린의 자연개조 계획the Great Stalin Plan for the Transformation of Nature>에 일정하게 기여했으며, 이 계획은 획기적인 시도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숲이 사라진 지역에서의 인위적 국지적 기후변화를 회복하기 위한 획기적 촉진대책이자, 장대한 시도로서 판단되었다. 이미 1936년에 소련정부는 <숲의 보호와 조림관리부the Main Administration of Forest Protection and Afforestation>라는 행정조직을 창설하고, “물-보호림”광역벨트를 전국에 걸쳐 설치하였다. 소련의 여러 지역에서 산업화로 인하여 숲이 거침없이 사라져가는 반면, 소련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러시아의 숲은 최상의 성장정책을 통해 또 생태학적 우선 관심 속에, 결국 “프랑스 크기의 숲을 보전하고, 향후에는 멕시코 크기로 확대한다.”(대체로 인접한 미국의 3분의2크기)는 총체적 방향으로 보전되었다.14)


<위대한 스탈린의 자연개조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생태 회복을 위해 도입된 것으로, 모든 역사를 통틀어 조림을 위한 대단히 야심에 찬 계획이었다. 이것은 6백만 헥타(천오백만 에이커)의 초원지대나 숲과 초원이 공존한 지역을 숲으로 만들겠다는 시도로서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를 원상회복하겠다는 세계 첫 번째의 확실한 시도”였다. 중앙아시아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의 영향을 방지할 목적으로 집단농장주변과 강을 따라 방풍림이 조성되었고, 농경지와 강유역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계획은 스탈린의 사망으로 현실화 하지는 못했으나, 새로운 숲 백만헥타가 조성되었으며, 40% 정도가 보존되었다.15) 그러나 조림계획이 진행되었던 자포베드니키의 85%에 해당하는 일부 지역은 공식적으로 1951년에 청산되었다.(1950년대 후반 보존운동의 부활로 조성된 다른 지역의 숲과 수카체프의 지도하에 조성되었던 것)16)


<스탈린 계획>의 제한적 성공 이유는 숲과 조림관리에 리센코Lysenko가 등장하고, 그가 추진한 소련 조림 통제를 위한 투쟁 때문이었다. 1948년 리센코는 멘델 유전학은 부르주아 관념론의 한 형태라는 <농과학회 레닌주의 총동맹the Lenin All-Union Academy of Agricultural Sciences>의 선언으로 승리를 달성한다. <위대한 스탈린의 자연개조 계획>의 도입으로 리센코는 [숲 보호와 조림을 위한 관리부]를 직접 관장할 수 있었다. 그는 조림지역의 사전벌채작업에 필요한 노동투입 양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다른 종으로부터 자신을 집단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묘목나무를 조밀하게 심는 개념에 기초한 “보금자리 방식”의 조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카체프는 현장에서 여러번 리센코의 요구를 철회해야 한다면서 리센코가 시도한 모든 단계에 반대했다. 1951년 숲 관리부는 리센코의 보금자리 방식으로 진행하여 우랄지역에 심었던 묘목의 100%가 죽었다고 발표했다.17)


1951년부터 스탈린의 사망 2년 전인 1955년까지 지속적으로 수카체프는 소련식물학의 학회장the dean of Soviet botany - 숲 연구 과학학술 연구소의 의장director of the Academy of Science’s Institute of Forests, 자포베드니키 최고 학술위원회 의장head of the Academy Presidium’s Commission on Zapovedniki, 식물학저널the Botanical Journal의 편집장-으로서 용감하게 리센코와의 지적투쟁을 전개했다. 식물학 저널과 <모스크바 자연주의 학회지the Bulletin of the Moscow Society of Naturalists>(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 있는 잡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수카체프는 베이너Weiner가 “리센코와의 기념비적인 투쟁”으로 불렀던 바와 같이, 리센코의 이론과 방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뒷날 1965년에 수카체프는 리센코를 사기행위로 맹비난한다. 청년생물학자들은 수카체프를 영웅으로 추앙하였으며, 그의 이론을 추종하고자 모여들었다. 1955년에 수카체프는 모스크바 자연사학회the Moscow Society of Naturalists(MOIP)에서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67년 그의 사망 때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이것은 리센코 권력의 추락이자 소련 생태학의 교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비록 리센코의 공식직위는 브레즈네프 기간인 1965년 유전연구소에서 퇴임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해도)수카체프는 이후 자포베드니키 재 설립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 점으로 인해서 소련의 보전운동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전러환경보전협회VOOP의 회원은 1951년에 13만6천명으로 증가했으며, 1959년 절정인 91만 명까지 확대되었다. 1960년대는 수카체프 지도하의 모스크바 자연사학회MOIP 영향으로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18)


반면 소련기후학은 빙산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페도로프E.K. Fedorov와 같은 사람의 저작을 통해 현저한 발전을 달성했다. 미하일 이바노비치 부디코(Mikhail Ivanovich Budyko)와 같이, 전 지구적 환경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교환에 초점을 맞춘 에너지 분야의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났다. 1958년에 출판된 부디코Budyko의 <지구표면의 열균형Heat Balance of the Earth Surface>이라는 개척자적인 연구는 일류의 학자에게 수여하는 레닌상을 받게 하였다. 그는 전체 지구체계의 열균형의 다양한 구성요소들을 계산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학문분야로서 물리적 기후학의 초석을 놓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4년에 레닌그라드의 중앙지질물리학 관측소장director of Leningrad’s Main Geophysical Observatory에 임명된 당시 34세였던 부디코는 “전지구적 생태계구조”의 다양한 영향을 상세하게 서술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98년에 푸른 지구상the Blue Planet Prize을 받고(같은 해 미국의 데이빗 브라우어와 함께) 지구 온난화에 대한 초기의 경고, 핵겨울이론의 개발, 지구생태학의 개척 등 물리기후학의 초석을 놓았다. 부디코는 베르나드스키의 생물권개념에 대한 경험적 이론적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수카체프의 생태환경지리통합권biogeocoenosis을 “유기체와 환경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현대적 사상을 발전시킨 핵심내용”으로 인정했다.(수카체프는 그의 저작에서 부디코의 에너지 흐름에 상당히 의존했다.)


후기 소련생태학


소련 생태학의 비극중의 하나는 [위대한 스탈린의 자연개조]의 중단과 천연자원에 대한 약탈적 채취와 함께,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10여년간 환경악화가 가속화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6일후에 숲관리부the Ministry of Forest Management는 페지되었고, 숲의 보전은 우선권을 상실했다.(그러나 소련멸망 이후 아직도 스탈린이 숲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와 보전의 가장 높은 수준을 시행했던 그룹 I의 존재를 블라디미르 푸틴이 승인하지는 않았다.)20)


소련은 보다 많은 노동과 천연자원을 투입하는 비용친화적인 개발 형태를 통해 높은 성장률을 달성했다. 1950년대 말까지, 자원의 제한을 평가하는 집중화 된 개발형태를 발전시킬 필요성으로 이러한 방식이 갖는 취약점은 이미 분명해졌다. 그러나 체제자체의 관성과 냉전의 격화로 보다 합리적인 경제개발과정의 구축은 어려워졌다.21)


최악의 손실은 말렌코프Malenkov와 후르시초프Khrushchev 시대에 발생했다. 부분적으로 이 시대는 과학자 집단이 주도하여 광대한 환경운동의 성장이 나타났다. 1954년에 시작한 후르시초프의 “처녀지Virgin Lands”정책은 농지 확대를 위해, 소위 “처녀지” 3천3백만헥타를 개간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 상당한 성과가 있었지만, 이것은 곧 다시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1950년대 말 소련 지도부는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깊고 가장 오랜된 상급수였던 바이칼호Lake Baikal에 대한 생태학적 개입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1960년대 초반 소련정부는 아랄해Aral Sea로 유입하는 두 개의 강, 아무 달랴Amu Darya와 시르 달랴Syr Darya에 대해, 소비에트 유라시아의 목화농업에 소요되는 용수제공을 위해 강줄기를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아랄해는 이후 본래규모의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22)


이와같은 개발은 과학자들과 환경보전론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1964년 수카체프는 MOIP의 의장으로서 소련지질학자들에게 바이칼호를 구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2년 후에 그는 바이칼호 살리기를 목적으로 과학자집단이 서명한 편지를 언론사에 보냈다. 바이칼 호는 생태파괴의 상징이 되었으며, 소련 환경운동의 비약적인 증가를 이끌어 냈다. 1981년까지 VOOP회원들은 3천2백만명, 계속해서 1985년에는 3천7백만명으로 증가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환경보호조직이 되었다. 브레즈네프에서 고르바초프 집권기간 동안 소련지도부는 점점 더 강화된 환경평가를 도입했다.23)


영향력 있는 기후학자중의 하나인 페도로프Fedorov는 소련 최고지도부의 일원이 되었으며, 자연환경통제와 소련 수문학 국가위원회 지질물리학연구소the Institute of Applied Geophysics of the State Committee of the USSR on Hydrometeorology and Control of the Natural Environment 의장이 되었다. 1960년대 초반 페도로프의 환경과 관련된 관점은 인간 예외론자로서 말할 수 있다.(1962년에 그가 그린랜드의 빙산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는 것에 대해 결정적 비판을 제기했다고 해도)그러나 10년 후에 그는 분명하게 생태학적 방향으로 변경했다. 1972년 그의 저서 <인간과 자연Man and Nature>에서 마르크스주의적 환경관점이 분명하게 서구의 베리커머너Barry Commoner가 주장한 내용과 연계되어 있었다. 다른 소련의 생태론자와 같이 페도로프는 1972년 경제성장에 대한 천연자원의 제한을 언급한 로마클럽보고서의 <성장의 제한Limits to Growth>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사회역사적 요인들에 대한 보다 완전한 평가를 주장했다. 더구나 그는 <성장의 제한>저자들이 기후변화와 같은 결정적 환경문제를 고려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했다. 페도로프의 논의는 직접적으로 마르크스의 사회생태학적 대사이론에 의존하고 있다. ; “사회발전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의 저자는 인간의 생활과 활동의 활력적인 요소로서 사람과 자연간의 상호 관계(대사)를 인정하고, 사회주의 사회형태가 그러한 상호작용에 가장 최적화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후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칼 프라스Karl Fraas의 저작과 연계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국지적 기초(그리고 사막화의 위험)에 근거한 초기 인위적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를 지적했다. 페도로프는 처음으로 1979년 제네바 세계기후협의회에 소련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그는 “미래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다. 만일 국제적 대책을 시급히 마련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장래에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고 주장하면서 행동의 절박성을 호소했다.24)


그러나 소련의 기후학과 지구생태학에서 과학혁명은 기원을 부디코Budyko에 두고 있다. 그는 지구 열균형 분야연구에 세계지도자급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또한 기후가 극지방 빙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세계적인 기초 분석을 했으며, 처음으로 지구 온난화 효과의 영향 메카니즘으로서 <빙산 알베도 효과ice-albedo effect>를 정확하게 서술해낸 사람이다. 부디코는 또한 그러한 작용의 결과 나타난 지구 평균기온의 위험한 증가를 처음으로 지적했다. 그는 베르나드스키Vernadsky와 수카체프Sukachev의 전통을 이어받아 변증법적 생물권 분석에 기초하여 “지구생태학”을 특정 분야의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지구역사중의 원시기후 변화에 대한 선구적 연구를 수행했다. 부디코는 지구역사의 “생태학적 위기”와 “세계적 파국”이 특징인 지구역사의 “결정적 시기”이론을 주창했으며, “인류의 생태적 위기”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는 것으로 이러한 분석을 확장했다.25)


1961년 페도로프Fedorov와 부디코Budyko는 레닌그라드의 인간이 초래하는 기후변화 문제 대책 총연합회의All-Union Conference on the Problem of Climate Modification by Man에서 연설을 통해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기후변화문제에 대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바 있다. 같은 해 부디코는 그의 논문 <지구표면의 열과 물 균형이론The Heat and Water Balance Theory of the Earth’s Surface>을 소련 지리학회Geographical Society of the USSR 3차 총회에서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인류의 기후변화는 이제 일상적인 업무활동의 결과 필연적이라는 유명한 결론에 도달하였으며, 인류의 에너지 사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62년에 그는 소련과학회의 연보에서 기념비적 논문인 “기후변화와 전환수단Climate Change and the Means of Its Transformation”을 발표하였다. 여기서의 결론은 다시 더 진전된 것으로서 빙산의 파괴는 “대기권 순환 과정에 현저한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내용 이었다. 1963년 까지 부디코는 세계의 열균형 구조에 대한 지도를 작성했다. “부디코의 에너지 균형모델”은 곧 모든 복합 기후모델의 기초가 되었다. 1966년에 출판된(동료들과 함께) 논문 “기후에 대한 경제활동의 영향The Impact of Economic Activity on the Climate”에서는 인류의 인위적 기후변화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 논문에서 부디코는 인류는 - 숲 파괴, 늪지 고갈, 도시건설과 같은 행위를 통해서-오랜기간 “미시적 기후 예를들면 특정지역 대기표면층의 기상학적 체제변화”에 영향을 줬다고 평가했다. 이전과 달리 새로운 것은 인류의 기후변화가 이제는 대규모 영역에서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변하게 했던 것은 <빙산알베도효과>의 발견과 전 세계 기온상승의 역동적 효과였다. 부디코는 1962년경에 이 문제에 대한 기초분석을 “극지방 빙산과 기후Polar Ice and Climate”라는 논문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그러나 당시는 북극의 기후만이 아니라 세계의 기후에 대한 영향이 아직 분명한 상태가 아니었다. 1969년 논문 “지구기후에 대한 태양방사선 효과”에서 그는 극지방 바다의 빙산알베도 효과 작용 메카니즘과 기후변화와의 관련성을 완전하고 구체적으로 평가 했다. 파국적인 세계기후 변화에 초점을 둔 기후 민감성에 대한 비슷한 결론은 같은 해 아리조나 대학의 윌리엄 셀러스William Sellers가 발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후변화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에서 절박한 전 세계적인 주제로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반면 부디코의 에어로졸 누적효과에 대한 추정은 자본주의 경제, 특히 에너지 사용이나 배출물, 성장을 제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신념을 고려해 볼 때, 그로 하여금 기후변화에 적용할 수 있는 지구공학적 대책으로서 성층권의 에어로졸(황산전이입자sulfur particles)을 처리하기 위해 비행기활용 도입가능성을 시도하게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게 된 결론은 1972년의 저서 <기후와 생활Climate and Life>에서 서술하고 있다. 인위적인 지구 온난화는 1938년 가이 스튜어트 칼렌다Guy Stewart Callendar가 처음으로 서술했었으나, 중요한 피드백효과의 발견과 그 보다 더 큰 기후민감성 문제는 이제 향후 다가올 미래에서 세계의 생태위기가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될 가능성으로 자리 잡았다.26)


페도로프Fedorov(세계평화위원회의 부의장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퍼그워시회의Pugwash conferences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다.)와 부디코Budyko같은 소련 기후학자들의 경우, 평화 문제는 환경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27) 소련 기후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부디코와 골리친G.S. Golitsyn의 저작에 기초하여, 전면적인 핵전쟁에 적용하는 핵겨울이론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핵겨울 이론은 핵폭발로 인해 대기 중의 입자들이(에어로졸) 증가하고, 이에 따라 모든 대륙의 기온이 일정하게 몇도 내려가거나, 경우에 따라선 몇십도 내려가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이것은 인류의 멸종과 생물권의 파괴를 초래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분석토대는 다른 국가들이 이론을 개발하기 십여년 전에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이들의 이론은 이후 냉전 상황에서 핵전쟁에 의한 인류 대학살이라는 찰나로 부터 궁극적인 회피와 반핵운동의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28)


부디코 생태학 이론의 포괄성과 내용의 확장성은 특별히 그의 후기저작에서 두드러졌다. 부디코는 학문 분야로서 “세계생태학”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지구 초기 시기의 “전세계적 파국”에 대한 역사를 검증하면서 원시기후 분석연구에 기본 토대 역할을 하였으며, 인위적인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을 얻기 위해 원시기후 분석과 기후 변화를 결합시켰다. 부디코는 당시 이전 세계 생태학 연구들이 거의 대개 국지적 조건이나 아니면 “국지적 변화의 누적”만을 강조한 특징이었다고 제시하였다. 이와 달리 세계생태학은 전체적으로 생물권의 작동양식과 관계있는 생태학의 영역이고, 해양과 대기 시스템을 변경시킨 인간의 인위적 행위가 갑자기 증가한 결과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강조해야만 하는 점은 유기체와 환경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대한 것이다. 부디코는 오파린Oparin의 결정적인 견해, 즉 대기와 관련한 인간의 역할을 고려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대기 속에서 유기체가 출현했다는(생명의 기원이론과 결합해서) 추론을 강조 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진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통해서, 부디코는 엥겔스의 저작 “유전자-문명 공진화”가 아닌,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전환할 때 노동의 역할>을 근거로 제시했다. 또한 부디코의 세계생태학은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문명의 사막화 경향>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이러한 모든 생태학적 분석을 통해, 부디코는 환경과 생명간의 물질적 교환과정으로서 대사 작용을 모델화할 수 있는 관점을 획득했던 것이다. 29)


부디코의 초기 열균형 연구에 대한 몇몇 저작은 당시 소련의 지리학자였던 그리고리에프A.A. Grigoriev와 이노켄티 게라시모프Innokenti P. Gerasimov와 함께 달성하였다. 목적은 과학 분야가 변증법적 통합을 좀 더 달성해서 생물권의 진화를 효과적으로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부디코와 게라시모프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다른 <호모Homo>속을 포함하여 초기 인류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던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의 역동적 조건을 창출한 것은 바로 원시기후의 변화였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부터 서술해온 지리학과 생태학의 논문을 모아보면 게라시모프는 수카체프Sukachev의 생태환경지리통합권biogeocoenosis과 함께 지리적인 지평개념의 뛰어난 이론적 결합을 제공했다.


거의 똑같은 중요성이 부디코가 “세계적 생태위기”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고려했던 사회적 영향의 분석에 있다. 여기서 그는 자본축적 체제가 갖고 있는 어려움을 강조했다. 모든 경제적 팽창은 “전 세계 생태계구조의 불안정성이 크다.”는 사실로 집중할 수 있다. 베르나드스키Vernadsky의 <인간생활권noosphere>이나 혹은 이성이 지배하는 환경의 구체화를 목적으로 한 경제적 생태적 계획, 즉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딜레마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30)


스노우C.P. Snow의 “두개의 문명”으로 나타난 지적 경계선을 넘어서, 부디코는 특히 1968년부터 1977년까지 잡지 <철학의 제문제Problems of Philosophy>에서 편집장으로 역동적인 역할을 했던 이반 프롤로프Ivan T. Frolov와 같은 소련의 사회 환경 철학자들의 사상에 자신의 연구를 연결시켰다. 1970년대 프롤로프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소련의 사회철학은 1980년대에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인간적 가치와 생태적 가치를 의도적으로 재결합하는 과정으로 다시 살아났다. 새로운 분석 영역에 대한 영감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와 <그룬트리세Grundrisse>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최후의 생태학적 비판서인 <자본론>에서 나타난, 심화된 휴머니즘과 자연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대두한 소련의 생태적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주장을 채택하긴 했었지만, 유물론에 대해 학문적 의문을 갖고 있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당시 서구의 프랑크푸르트학파the Frankfurt School를 의도적으로 에둘러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롤로프와 다른 사람들도 유물론적-생태학적 기초위에 “긴밀한 변증법적 통일”의 발전을 주장했다. 결국 비판철학과 사회과학은 전체적으로 베르나드스키Vernadsky로부터 수카체프Sukachev나 부디코Budyko로 이어지는 전체적인 소련의 과학전통에 뿌리가 있었다.31)


프롤로프가 1982년에 펴낸 <인류의 미래와 세계의 제문제Global Problems and the Future of Mankind>는 세계적인 생태학적 휴머니즘의 새로운 윤리를 만들고자 처음으로 시도했던 중요한 저작이다. 또한 같은해 펴낸 두 번째 저작 <인간, 과학, 휴머니즘 : 새로운 종합Man, Science, Humanism: A New Synthesis>에서는 새로운 차원의 변증법적 휴머니즘과 자연주의를 발전시켜 갔다. 비록 프롤로프의 견해가 기술주의 추종(특히 식량생산을 다룰 때)을 보이지만, 전반적인 관점은 휴머니즘적 가치와 방법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인용하여, 지속가능한 생산의 법칙만이 아니라, “미의 법칙”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전통적인 헤게모니 관계를 거부하고 인간중심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것을 주장했다.32)


그러나 아마도 소련의 비판적 생태관의 소생 중에 가장 놀라운 점은 우르술A.D. Ursul이 1983년에 펴낸 <철학과 문명의 생태학적 제 문제Philosophy and the Ecological Problems of Civilisation>였다. 이 책에는 당시 영향력 있는 프롤로프와 같은 생태철학자들이나 페데로프Fedorov와 게라시모프Gerasimov와 같은 주요 자연과학자들의 연구가 함께 수록되었다. 또한 생태사상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 이것이 약간 단편적인 서술로 취급되었다는 한계가 있다지만, 심도 있게 서술하였다. 게라시모프가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연과 자신과의 물질적 상호 작용(대사작용)을 통제하고, 규정하고, 시작하는 과정으로서 노동의 특징을 서술하였다. 인간의 자연과의 상호작용은 대사활동의 과정에서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프롤로프도 비슷하게 역사적으로 특수한 자본주의 사회의 생태적 약탈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생태적 위기의 위험성은 인간과 자연과의 대사 작용이 어떤 장치나 기계적 구조를 이용하여 저절로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수립을 통해 사회경제적 정신적 실제적 기초위에 산업개발이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생태발전ecodevelopment”이나 혹은 “생태적으로 정당화된 개발”에 초점을 두는 사회를 위해선 “사회와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변증법적 객관성과 내부모순”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34)


프롤로프가 의미 있게 제기한 핵심적인 영역은 생태적으로 보다 합리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한 투쟁일지라도 유토피아주의의 위험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지구적 생태환경의 심각성에 대해 “합리적 구체성rational realism”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몽상가 취급해 버리는 사회-물질적 세력의 발전이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35)


<철학과 문명의 생태적 제 문제>에 수록된 다양한 논문은 진보와 기술과 생태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던 소련의 신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문명의 생태적 제 문제”는 특별히 보다 근원적이고 과학적인 사상가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상당한 깊이와 정교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페도로프의 경우 기후과학의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면서, 우리가 당면한 도전은 “사회활동의 규모”가 “지구상의 모든 요소의 양적요인을 평가할 필요성”과 “인위적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것을 부디코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문제로 언급하였다. “숲의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의 산물”로 전환하면서, 철학자 마메도프N. M. Mamedov 는 생태계의 통합을 다시수립하기 위한 생태학의 복원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르술Ursul은 베르나드스키가 인류는 지정학적 세력이 되고 있다는 점을 오래전에 가르쳤다고 지적하면서, “국지적 차원에서 전 세계적 차원으로 생태 문제의 규모가 확장되고, 단일한 우주조차” 사회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표현한 것이고, 효과적으로 새로운 지정학적 시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36)


소련의 후기 생태학적 연구는 서구의 생태 사회주의에 앞장 설수 있었다. 서구에서는 특별히 기후변화와 결합하여 지구의 새로운 역동성을 이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했으며, 특징 있는 지구생태학을 구축하고 있었다. 확실히 지구생태문제와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의 초점을 맞추면서, 소련의 사상가들은 소련 자체의 생태적 제 문제는 언급을 회피했다. 프롤로프는 리센코주의Lysenkoism라는 전체적으로 슬픈 역사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통해, 196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공개적으로 “과학의 당파성”이라는 사상을 주장했다. 게라시모프의 <지리학과 생태학Geography and Ecology>은 소련의 생태적 주요 문제와 직접적인 대립(1977년에 쓴 논문에서)으로 주목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분명하게 약간은 도식적으로 소련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부각시켰다. (1) 아랄 해Aral Sea의 파괴역사, (2) 논란이 많은 여러 강줄기의 변경, (3) 사막화의 원인, (4) 바이칼 호수Lake Baikal 보호의 절박성, (5) 침엽수림의 복구 필요성, (6) 목재채취의 파괴적 형태, (7)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광산채굴, (8) 도시의 공해 대책, (9) 도시 지역의 산업폐기물 제거, (10) 방사성과 유독폐기물의 새로운 형태에 대한 제한 조치. 그는 필요한 조치는 “현대과학의 생태적합성ecologization”이라고 주장하였다. 저명한 소련의 지리학자로서 게라시모프는 생태학(경제가 아니라)이 한 분야로서 지리학의 초점이 될 것이라고 논의하는 위대한 단계를 개척했다.37)


이 시기 소련의 경제학자들은 사회복지와 경제 성장의 적정 관계에 대한 극심한 논쟁에 빠져있었다. 올닥P.G. Oldak은 1970년대와 80년대를 통해 사회경제적 결정에 필요한 기본 자료로서 “총 사회복지”에 초점을 두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표준적인 경제성장을 대체하는 논의를 주도했다. 레닌은 올닥이 지적했던 사회주의의 목적은 질적 요인들을 평가해서, 가능한 한 가장 광범위하게 넓은 기초위에, 대중들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정당화를 통해서 올닥은 국가의 주요 계획에 누적된 물질적인 부(富)만이 아니라, 용역이나 지식의 분야, 천연자원의 상태와 대중들의 보건까지 직접 결합하는 새로운 평가를 제안했다. “자연구조의 자기-재생의 가능성에 대한 인위적인 변경의 남용”이 발생할 때, 비록 이러한 변경 조치가 합리적으로 판단되더라도, “새로운[그리고 보다 지속가능한]생산수준”으로의 이전을 위해 일정한 기간 생산을 축소하는 선택을 제안했다.38)


1986~1987년에 프롤로프는 공산당의 중심이론 조직인 코뮤니스트Kommunist의 편집장이 되었다. 1987~1989년부터(체르노빌 이후)그는 고르바초프의 핵심 브레인중의 한명이었다. 그리고 1989~1991년 그는 프라우다의 편집국장이 되었다. 프롤로프는 고르바초프가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환경개선조치의 가속화를 수행할 때 많은 생태전문가들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고르바초프가 도입한 글라스노트glasnost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로 인한 사회적 황폐화와 국가권력관계의 급격한 변화는 소련의 정치경제적 모순을 첨예화시켰으며, 동유럽 헤게모니의 급속한 붕괴, 소련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의 최고 간부들의 분열, 총체적 권력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져 - 1991년 소련 자체의 멸망으로 귀결되었다.


21세기 소련의 생태학


앞에서 언급한 복잡한 역사적 실체에 대한 논의의 초점은, 1930년대부터 극단적 생태황폐화, 때론 생태학살로 나타난 이야기로서, 1930년대 이후 지속된 소련환경역사의 헤게모니적 서술로서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소련은 최악의 역사적 생태적 파국이 보편화되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선 사회주의 지적 토대와 유물론적, 변증법적 기초위에 가장 심오한 생태학적 사상과 실천도 나타난 사회이다. 독재적인 관료통제의 증가와 새로운 계급관계의 출현으로 특징짓는 1930년대 소련은 결합된 생산자들이 지배한 사회방향으로 진행하는 차원에서 의미있는 사회주의 국가를 추구했으나, 대신에 후기 혁명사회의 일정한 유형으로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특징을 나타냈다.39) 그러나 경제계획의 존재와 광범위한 영역의 사회적 소유권, 이에 더해 유물론적, 변증법적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지적 유산이 모두 심도있게 관철된 사회였다. 그러나 소련의 발전은 독창적 사회주의의 객관성이라는 면에서 왜곡되어 버렸으며, 사회주의의 대안적 형태를 촉진했다. 아울러 많은 생태 사상가들의 배출과 스탈린 시기 다양한 환경 약탈, 그리고 중기 이후 일종의 부정의 부정으로서 세계 생태학의 발전에서 광범위한 성과 달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생물권과 생태환경지리통합권이라는 이론에 기초하여 기후변화의 분석을 더욱 촉진한 국가도 소련이었으며, 처음으로 핵겨울 이론이 제시되었고, 지구온난화에 대한 첫 번째 경고가 나타난 곳도 워싱턴과 뉴욕이 아닌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였다.


소련 환경주의가 재출현하는 계기가 된 터닝포인트는 1950년대 초반에 리센코와 수카체프의 투쟁, 모스크바 자연과학자 학회의 역할 증대, 환경보존 조직의 학생 증가와 세계에서 가장 큰 환경보호 조직 VOOP가 출현한 시기에 발생했다. 1960년대에는 브레즈네프 정권의 출범과 함께 중요한 환경입법이 통과되었지만, 정책이행은 일반적으로 시설관리자와의 갈등, 계급-경제적 장벽, 정보 확산의 실패, 환경운동 발전의 초기단계로 인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조안 데발르데레벤Joan DeBardeleben의 “소련의 새정치The New Politics in the USSR”에 대한 놀랄 만큼 균형된 평가는 아주 중요한 환경 주도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유사 발전세력이 브레즈네프 시기의 준 환경세력보다 현저하게 강했다. 아직 환경적 진보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83년까지 자포베드니키 수는 스탈린 정권 때 거대한 규모가 청산되기 전 규모였던 1951년의 128개를 넘어 143개로 점차 확장되었다.(레닌 시절 설립된 33개 조직을 훨씬 넘어선)40)


1985년도에 시작한 고르바초프 시기는 모든 것이 변했다. <소련과 소련 이후 리뷰The Soviet and Post-Soviet Review>의 라우렌트 코우멜Laurent Coumel과 마크 엘리에Marc Elie가 규정한 특징은 “생태혁명의 비극”이었다. - 사실상 소련의 운명을 단명으로 만들고, 자본주의 질서가 지배하면서, 소련후기 시기의 생태적 문제들에 대한 국가의 대응과 환경운동 모두가 극적인 감소를 초래하여 거의 비극으로 변해버렸다.41)


1986년 체르노빌 사건 이후에 소련의 환경운동은 더 강력해졌다. VOOP에 더하여 약 300개의 환경조직들은 소련 전국에서 활동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소련 전역을 통해서 각종 시설들이 문을 닫고, 예정된 조치들이 변경되거나 혹은 공해배출이 감소한 생산으로 재조정 되고, 일부는 취소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친 환경 조치 사례는 바이칼스크Baikalsk의 펄프와 제지공장을 가구생산시설로 변경하는 계획과, 생화학공장의 폐쇄, 볼가-초그라이Volga-Chograi운하의 취소, 강유역 변경 계획의 추진 중단 등을 포함하였다.” 환경운동의 압력은 이 기간 중에 천개 이상의 대기업 공장의 문을 닫게 하였다.42)


극적인 결과는 이산화탄소 배출물과 관련된 내용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1960년대에 이미 소련은 주요 에너지 원을 석탄에서 천연개스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1988년 탄소배출물은 최고점을 기록했다. 이후 2년간 석탄을 천연개스로 적극적인 교체를 시행한 결과, 배출물은 급격히 감소하였다.43)


소련 생태학이 비판적 학문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폴 조셉슨Paul Josephson은 2010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나 로마클럽의 <성장제한론Limits to Growth>에 필적하는 소련의 성과는 없었다.”고 주장했다.44) 그러나 후기소련 생태학은 수카체프의 <숲 생태지리환경학의 기초Fundamentals of Forest Biogeocoenology>, 페데로프Federov의 <인간과 자연Man and Nature>, 부디코의 <기후와 생활Climate and Life>, <세계 생태학Global Ecology>, <생물권의 진화The Evolution of the Biosphere>와 프롤로프의 <인간, 과학, 인도주의Man, Science, Humanism >등의 저작에서 유사한 작업이 보편화되었다.(카슨의 모든 후기 저서는 베르나드스키의 <생물권과 오파린의 생명기원론>에 영향을 받았다.)이러한 저작은 생태학과 사상을 폭넓게 발전시켰으며, 전세계를 통한 인간사회의 그속한 생태적 재구축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21세기에 소련 생태학의 긍정적 성과에 대한 재인식은 만일 우리가 현재 환경론자들의 세계관에서 요구하고 있는 <위대한 전환Great Transition>을 창출하려 한다면 명백히 결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더구나 소련후기생태학은 경제계획의 유산을 남겼다.(그리고, 결국엔 생태적 계획의 출현신호이지만) 즉 경제계획이 갖고 있는 취약점과 허위결과 등 모든 점들에 대해, 만일 우리가 현재의 세계 생태위기를 극복하고, 자연과 인간의 대사작용을 규제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가 오늘 배울 필요가 있는 광대한 인간의 성과를 여러 방법으로 대변하고 있다. 만일 이런 점을 우리가 온전하게 수행하여 생태적 전환과정을 시작 했더라면, 아마도 헤아릴 수 없는 긍정적 결과들을 남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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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Murray Feshbach and Alfred Friendly Jr.,Ecocide in the USSR(New York: Basic Books, 1992); D.J. Peterson,Troubled Lands: The Legacy of Soviet Environmental Destruction(Boulder: Westview Press, 1993); Stephen Brain,Song of the Forest: Russian Forestry and Stalinist Environmentalism, 1905–1953(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11), 2–3; Joan DeBardeleben,The Environment and Marxism-Leninism(Boulder: Westview Press, 1985); John Bellamy Foster, The Vulnerable Planet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94), 96–101. The use of the term “ecocide” to describe Soviet conditions was heavily colored by the previous widespread international use of the term, beginning in the early 1970s, to criticize the U.S. employment of defoliants such as agent orange in its war on Vietnam.

2) Brain,Song of the Forest, 116; Laurent Coumel and Marc Elie, “A Belated and Tragic Ecological Revolution: Nature, Disasters, and Green Activists in the Soviet Union and Post-Soviet States, 1960s–2010s,”The Soviet and Post-Soviet Review40 (2013): 157–65.

3) Douglas R. Weiner, “Changing Face of Soviet Conservation,” in Donald Worster, ed.,The Ends of the Earth(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258; Peterson,Troubled Lands, 42–44. See also Philip R. Pryde, “The ‘Decade of the Environment’ in the USSR,”Science220 (April 15, 1983): 274–79.

4) M.I. Budyko, G.S. Golitsyn, and V.A. Izrael,Global Climatic Catastrophes(New York: Springer-Verlag, 1988), v–vi, 39–46; Vladimir I. Vernadsky,The Biosphere(New York: Springer-Verlang, 1998).

5) Douglas R. Weiner,Models of Nature(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8), 23; “The Changing Face of Soviet Conservation,” 252–56.

6) See John Bellamy Foster, Marx’s Ecology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0), 121, 240–44; Roy Medvedev,Let History Judge: The Origins and Consequences of Stalin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9), 441; Peter Pringle,The Murder of Nikolai Vavilov (New York: Simon and Schuster, 2008), 310; Léon Rosenfeld,Physics, Philosophy, and Politics in the Twentieth Century (Hackensack, NJ: World Scientific Publishing, 2012), 143; Frank Benjamin Golley,A History of the Ecosystem Concep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3), 171–73; Kunai Chattopadhyay, “The Rise and Fall of Environmentalism in the Early Soviet Union,”Climate and Capitalism, November 3, 2014, http://climateandcapitalism.com. Many of the concepts promoted by Lysenko (and by Lysenkoist thinkers in general) were perfectly rational, and even anticipated in some cases future scientific developments. Consequently, Lysenko originally had the support of Vavilov, who helped him gain a position in the scientific establishment. However, Lysenko’s research methods were shoddy, if not duplicitous, and his claims regarding his research results were exaggerated. The influence of the Lysenkoism derived from the Soviet Union’s pressing need to develop solutions for agriculture, given its climatic difficulties, which led to a tendency to give more credence to such ideas than their results deserved. Worse still, Lysenko and his associates took advantage of their backing from Stalin to level political accusations and promote purges in the scientific community, in violation of all scientific ethics. on the science see Richard Levins and Richard Lewontin,The Dialectical Biologist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5), 163–96. It should be noted that recent scientific discoveries in the field of epigenetics have shown that inheritance of a number of acquired characteristics is possible, as a result of changes in the coatings on genes. This further suggests that some of the “Lysenkoist” research in the Soviet Union was rational—even if the methods and ethics were not.

7) Weiner,Models of Nature, 179, 213–23; Golley,A History of the Ecosystem Concept, 172. According to Weiner, “Sukachev had unmistakably declared to the Third All-Union Congress of Botanists that under no circumstances should the introduction of exotic plants or animals intozapovednikibe allowed.” Weiner,Models of Nature?, 281; Loren R. Graham,What Have We Learned About Science and Technology from the Soviet Experienc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152. See also Douglas R. Weiner,A Little Corner of Freedom: Russian Nature Protection from Stalin to Gorbachev(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44–52; Kunal Chattopadhyay, “The Rise and Fall of Environmentalism in the Early Soviet Union,”Climate and Capitalism, November 3, 2014, http://climateandcapitalism.com.

8) Weiner, “The Changing Face of Soviet Conservation,” 255–56.

9) Sukachev first used the term geocoenosis in 1941 and then changed it to biogeocoenosis in 1944. Today biogeocoenosis is also often spelled as biogeocenosis. V.N. Sukachev, “Forest Types and their Significance for Forestry,” in Institute of Forests, The Academy of Sciences of the USSR, ed.,Questions of Forest Sciences (Moscow: Academy of Sciences of the USSR, 1954), 44–54; V. Sukachev and N. Dylis,Fundamentals of Forest Biogeocoenology (London: Oliver and Boyd, 1964), 9. Sukavev and Dylis in recounting the history of the concept of biogeocoenosis refer briefly to the role of Stanchinskii, thereby departing from the common practice in Soviet intellectual circles of remaining silent with regard to the contributions of those who had fallen prey to the purges of the 1930s and ’40s.

10) Sukachev and Dylis,Fundamentals of Forest Biogeocoenology, 6.

11) Sukachev and Dylis,Fundamentals of Forest Biogeocoenology, 26; I.P. Gerasimov,Geography and Ecology(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3), 64–65; Golley,A History of the Ecosystem Concept, 173–74. Golley contends that despite the brilliance of the Vernadsky tradition and Sukachev’s biogeocoenosis analysis, Soviet ecologists were so weakened by the purges and the effects of Lysenkoism that they ended up “tending local gardens” and had little effect. It is all the more ironic, then, that the Soviets with their “local gardens” revolutionized climatology and pioneered in the development of global ecology. In fact, it was the “local gardens,” and not global thinking, which ecologists in the USSR were compelled to pursue with caution. Compare Golley’s view of the signiificance of Sukachev’s work with that of the molecular geneticist Valery N. Soyfer inLysenko and the Tragedy of Soviet Science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1994), who contends that Sukachev “was the first to formulate the goals and tasks of the new discipline dealing with the interrelated and interacting complex of living and inanmiate nature—the discipline that has since come to be known as ecosystem ecology” (228).

12) V.I. Sukachev, “Relationship of Biogeocoenosis, Ecosystem, and Facies,”Soviet Soil Scientist 6 (1960): 580–81.

13) Sukachev, “Relationship of Biogeocoenois, Ecosystem, and Facies,” 582–83.

14) Brain,Song of the Forest, 139, “The Great Stalin Plan for the Transformation of Nature,”Environmental History 15 (October 2010): 670–700.

15) Brain,Song of the Forest, 1–2, 116–17, 139–40, 164–67; David Moon,The Plough that Broke the Steppes(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292.

16) Weiner, “Changing Face of Soviet Conservation,” 257.

17) Brain,Song of the Forest, 157–59; David Moon,The Plough that Broke the Steppes(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292–93.

18) Weiner,A Little Corner of Freedom, 205–7, 211–17, 250–52; Weiner, “Changing the Face of Soviet Conservation,” 255–56, 260–61; Loren R. Graham,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Soviet Union (New York: Alfred A. Knopf, 1993), 239–40, 244; Laurent Coumel, “A Failed Environmental Turn?: Khruschev’s Thaw and Nature Protection in Soviet Russia,”The Soviet and Post–Soviet Review40 (2013): 167–68, 170–71; Alexander Vucinich,Empire of Reason: The Academy of Science of the USSR, 1914–1970(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253–54, 260–62, 337–38, 359, 398; Zhores Medvedev,Soviet Science(New York: W.W. Norton, 1978), 89. Sukachev’s criticisms of Lysenko and his associates displayed a strong grasp of both Marxian and Darwinian theory. See V.N. Sukachev and N.D. Ivanov, “Toward Problems of the Mutual Relationships of Organisms and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The Current Digest of the Russian Press 7, no. 1 (February 16, 1955): 6–11.

19) M.I. Budyko, S. Lemeshko, and V.G. Yanuta,The Evolution of the Biosphere(Boston: D. Reidel Publishing Co., 1986), x; “Budyko, Michael I,”Encyclopedia of Global Warming and Climate Change, vol. 1 (Thousand Oaks, CA: Sage Publishing, 2008), 143–44; Spencer Weart, “Interview with M.I. Budkyko: Oral History Transcript,” March 25, 1990, http://aip.org; “Blue Planet Prize, The Laureates: Mikhail I. Budyko (1998),” http://af-info.or.jp/en; Sukachev and Dylis,Fundamentals of Forest Biogeocoenology, 615–16.

20) Brain,Song of the Forest, 170–71.

21) Harry Magdoff and Paul M. Sweezy, “Perestroika and the Future of Socialism—Part one,”Monthly Review41, no. 11 (March 1990): 1–13; Harry Magdoff and Paul M. Sweezy, “Perestroika and the Future of Socialism—Part Two,”Monthly Review41, no. 12 (April 1990): 1–17.

22) Douglas Weiner, “The Changing Face of Soviet Conservation,” 257, 264–68,A Little Corner of Freedom, 368–70; Philip Micklin, “The Aral Sea Disaster,”Annual Review of Earth Planet 35 (2007): 47–72.

23) Paul Josephson, “War on Nature as Part of the Cold War: The Strategic and Ideological Roots of Environmental Degradation in the Soviet Union,” in John Robert McNeil and Corinna R. . Unger, eds.,Environmental Histories of the Cold War(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43; Joan DeBardeleben, “The New Politics in the USSR: The Case of the Environment,” in John Massey Stewart, ed.,The Soviet Environment(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64–68; Weiner, “The Changing Face of Soviet Conservation,” 258, 267; Coumel and Elie, “A Belated and Tragic Ecological Revolution.”

24) E.K. Federov,Man and Nature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2), 6, 15–19, 57–58, 74–75, 145–47, 173, “Climate Change and Human Strategy,”Environment 21, no. 4 (1979): 25–31, “We Have only Begun to Mine Our Riches,”Saturday Review, February 17, 1962, 17–19; Budyko, et al.,The Evolution of the Biosphere, 371; M.I. Budyko and Yu. A. Izrael,Anthropogenic Climate Change(Tucson: University of Arizona Press, 1987), xi–xii; Moon,The Plough that Broke the Steppes, 293; E.K. Fedorov and I.B. Novick,Society and Environment: A Soviet View(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7), 43–44; DeBardeleben,The Environment and Marxism-Leninism, 201; Barry Commoner,The Closing Circle(New York: Bantam, 1971).

25) M.I. Budyko,Global Ecology(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0), 7–14, 249; Budyko, et al.,Evolution of the Biosphere, ix–x, 163–84, 262–85, 321–30. Dismissingly, Douglas Weiner depicted Budyko as someone who had given up on conservation/ecology for “the theoretical universe of mathematical models.” He thus failed to see the broad character and importance of Budyko’s work. Weiner,A Little Corner of Freedom, 388.

26) Spencer Weart, “Interview with M.I. Budkyko”; Jonathan D. Oldfield, “Climate Modification and Climate Change Debates Among Soviet Physical Geographers, 1940s–1960s,”Advanced Physical Review4 (November/December 2013): 513–21; Peter E. Lydoph, “Soviet Work and Writing in Climatology,”Soviet Geography12, no. 10 (1971): 637–66; M.I. Budyko, O.A. Drozozdov, and M.I. Yudin, “The Impact of Economic Activity on Climate,”Soviet Geography 212 (1971): 666–79; I.P. Gerasimov,Geography and Ecology(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5), 64–76; Spencer R. Weart, “The Discovery of Global Warming (Bibliography),” http://aip.org, accessed April 12, 2015,The Discovery of Global Warming(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3), 85–88; M.I. Budyko, “The Effect of Solar Radiation on the Climate of the Earth,” 21, no. 5 (October 1969): 611-14,Climate and Life(New York: Academic Press, 1974), 493,Climatic Changes(Washington, DC: American Geophysical Union, 1977), 219–47,Global Ecology, 295–304, “Polar Ice and Climate,” in J.O. Fltecher, B. Keller, and S.M. Olenicoff,Soviet Data on the Arctic Heat Budget and Its Climatic Influence(Santa Monica, CA: Rand Corporation, 1966), 9–23; “Budyko, Michael I,”Encyclopedia of Global Warming and Climate Change, vol. 1, 143–44; Thayer Watkins Department of Economics, San Jose State University, “Mikhail I. Budyko’s Ice-Albedo Feedback Model,” http://sjsu.edu, accessed April 20, 2015; James Lawrence Powell,Four Revolutions in the Earth Sciences(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5), 258–64.

27) See Ye. K. Fyodorov (E.K. Fedorov) and R.A. Novikov,Disarmament and Environment(Moscow: Nauka, 1981).

28) Budyko, Golitsyn, and Izrael,Global Climatic Catastrophes, v–vi, 39–46; Budyko,Climatic Changes, 241; R.P. Turco and G.S. Golitsyn, “Global Effects of Nuclear War,”Environment30, no. 5 (June 1988): 8–16.

29) Budyko,Global Ecology, 5–15, 185, 230, 248, 258, 310,Climatic Catastrophes, 26, 39, 220; Budyko, et al.,The Evolution of the Biosphere, 303–7, 323–96. See also A.I. Oparin,Life: Its Nature, Origin, and Development(New York: Academic Press, 1962); M.I. Budyko, A.B. Ronov, and A.L. Yanshin,History of the Earth’s Atmosphere(New York: Springer-Verlag, 1987), 121–30;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Collected Works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75), vol. 25, 452–64, vol. 42, 558–59. on Engels see Stephen Jay Gould,An Urchin in the Storm (New York: W.W. Norton, 1987), 111–12.

30) Budyko,Global Ecology, 14–15, 258, 303; Budyko, et al.,Evolution of the Biosphere, xiii, 294, 329–30; Gerasimov,Geography and Ecology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3), 53–76; Oldfield, “Climate Modification and Climate Change Debates,” 517–18.

31) C.P. Snow,The Two Cultur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9); Ivan Frolov,Man, Science, Humanism: A New Synthesis(Buffalo, NY: Prometheus Books, 1990), 9, 38.

32) I. Frolov,Global Problems and the Future of Mankind(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2),Man, Science, Humanism, 19–21, 38, 103, 114–15; “I.T. Frolov,” in Stuart Brown, Diane Collinson, and Robert Wilkson, eds.,Biographical Dictionary of Twentieth-Century Philosophers(London: Routledge, 2002), 257–58; Graham,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Soviet Union, 254; Karl Marx,Early Writings(London: Penguin, 1974), 329. Weiner deprecatingly treats Frolov and other environmental philosophers and social scientists of this period, despite their “constructive engagements,” as opportunists engaged in a “double scoop: professional advancement and maintaining the appearance (not least for themselves) of engagement in ‘clean’ work.” Much the same, though, could be said for many Western thinkers. To attack these Soviet analysts in this way is to deride what were important and theoretically engaged analyses, rooted in the traditions of Marx and Vernadsky. Frolov’s role in promoting environmentalism under Gorbachev and his 1982Man, Science, Humanism: A New Synthesisare not easily dismissed. See Weiner,A Little Corner of Freedom, 399–401.

33) A.D. Ursul, ed.,Philosophy and the Ecological Problems of Civilisation(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3). Arran Gare referred to this book, but mentions only Ursul (hardly the most important thinker) saying that “some Soviet ideologists such Ursul attempted to use environmental destruction in the West as instrument of ideological struggle,” dismissing the real ecological concerns. Oddly the passage from a footnote that Gare cites from Ursul is not to be found in the book itself. Arran Gare, “Soviet Environmentalism: The Path Not Taken,” in Ted Benton, ed.,The Greening of Marxism(New York: Guilford, 1996), 111–12.

34) Ursul, ed.,Philosophy and the Ecological Problems of Civilisation, 37–42, 212, 221, 387–88.

35) Ursul, ed.,Philosophy and the Ecological Problems of Civilisation, 41.

36) Ursul, ed.,Philosophy and the Ecological Problems of Civilisation, 79–97, 265–68, 369.

37) Gerasimov,Geography and Ecology, 26–36; Graham,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Soviet Union, 253–56; DeBardeleben,The Environment and Marxism and Leninism, 115–16, 127–30, 135; Vucinich,Empire of Reason, 362.

38) DeBardeleben,The Environment and Marxism and Leninism, 108, 190, 214–15, 234; P.G. Oldak, “Balanced Natural Resource Utiliztion and Economic Growth,”Problems of Economic Transition28, no. 3 (1985): 4. It is worth noting that Gerasimov’s piece from the late 1970s referred to here, in which he pointed to various ecological crises and problems in the USSR, was preceded (in the same essay) by a blank statement that the state and party in the Soviet Union, especially when contrasted with capitalist societies, protected its citizens from environmental hazards. From this it is apparent that he felt that he was walking a fine line.

39) Paul M. Sweezy,Post-Revolutionary Society(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80).

40) Douglas R. Weiner, “A Little Reserve Raises Big Questions,”The Open Countryno. 4 (Summer 2002): 9,A Little Corner of Freedom, 395; DeBardeleben, “The New Politics in the USSR,” 67.

41) Coumel and Elie, “A Belated and Tragic Ecological Revolution.”

42) DeBardeleben, “The New Politics in the USSR,” 67, 73, 78, 80–81, 85; Peterson,Troubled Lands, 197.

43) “CO2 Emissions from the USSR,” Carbon Dioxide Emissions Analysis Center, http://cdiac.ornl.gov, accessed April 15, 2015; U.S. Congress, 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Change by Degree: Steps in Reducing Greenhouse Gases(Washington, DC: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91), 295; Peterson,Troubled Lands, 49–50; UNCSTADstat, “Real GDP Growth Rates, Total and Per Capita, Annual, 1970–2013, USSR,” http://unctadstat.unctad.org. The fact that economic growth continued in these years (see the data cited above) leads us to the conclude that the drop in carbon emissions was primarily a result of the shift to natural gas.

44) Josephson, “War on Nature as Part of the Cold War,” 43.

45) See Rachel Carson,Lost Woods, 230–31; John Bellamy Foster, The Ecological Revolution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9), 78–79.

46) Paul M. Sweezy, “Socialism and Ecology,”Monthly Review41, no. 4 (September 1989):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