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과 환경문제

르뽀 모자피난 - 잊혀져가는 원전사고피해자(번역문)

파랑새호 2016. 3. 9. 11:08

원문 ; http://lite-ra.com/2016/03/post-2044.html


올해 3월11일로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 만 5년이 흘렀다. 그러나 심각한 원전사고로 발생한 다양한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아직도 확대되고 있는 중이다.


끝나지 않는 후쿠시마 원전의 현상, 진척이 없는 방사능 오염 제거, 아직도 대피생활을 전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지속되고 있는 오염수 누출 사고.....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도 “해결방도가 보이지 않는다.”라는 대답이 70%를 넘어선 피해지역 복구. 그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문제가 아이들의 피폭이다. 올해 2월에는 사고 후에 갑상선 암으로 진단받은 후쿠시마 현 아동들이 167명을 넘는다는 놀라운 발표가 있었지만, 부모에게 있어 아이들의 피폭은 사고 직후부터 지금까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절실한 문제의 하나일 것이다. 사고 후에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각자 알아서” 피폭지로 부터 대피했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대피는 다만 현상적으로 생활터전이 변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관계, 경제, 교육, 나아가 가족 자체를 붕괴시킨 본질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장기적으로 취재한 <르뽀 모자피난 - 잊혀져가는 원전사고피해자>(요시다찌아吉田千亜/이와나미신서)에서는 피난지시를 받지 않고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피난했던 많은 가족의 “헤어짐”이나 “고민”을 그려내고 있다.


후쿠시마 현 이와키시에서 남편과 당시 3세였던 딸과 생활하고 있던 오가와아코(尾川亜子, 당시 29세, 가명)는 지진직후 쓰나미에서 도망치기 위해 코다이(高台)의 시댁으로 피난했지만, 그곳은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30여킬로 떨어진 지역에 불과했다. 한눈팔지 않고 정보수집에 열중했던 오가와였지만, 다른 가족과의 불가피한 헤어짐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친척집에서 더부살이 했던 가족이 당시 안고 있던 문제는 모두 함께 거주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한편에서 오가와는 ‘뭔가 이상하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멀리가고 싶다.’고 초초한 상태였으나, 남편과 딸을 데리고 시댁을 나올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12일 오후 3시36분. 원전1호기가 폭발했다.

“오가와는 몇 번이나 ‘도망가야 돼!’하고 소리치고 싶은 욕구를 억눌렀다. 그러나 TV의 폭발영상을 보고 있는 가족에게 위기감은 없었으며, 정부로부터 대피지시도 없었다.”

사고 직후부터 사람들의 위기감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언론보도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고령자였던 시부모와, 한편에서 인터넷에서조차 정보를 수집해서 엄마로서 위기감을 더해갔던 오가와. 게다가 며느리라는 입장에서 자신들만 도망갈 수 없다는 갈등이 있었다.

그 후 원전에서 20킬로 떨어져있던 친정으로 이전해야 했지만, 오가와의 모습을 보고 친정어머니가 시댁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손자를 보호하기 위해 간토(関東)의 친척집에 딸 부부를 피난시키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딸 가족은 셋이 함께 행동하면 좋겠습니다. 이제 아이를 대피시켜야 할 시기가 오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사이타마 현으로 대피하기로 결정한 오가와였지만, 사고 직후부터 사람들의 생각이나 방사선피해에 대한 의식, 정보이해에 대한 차이가 발생해서, 자발적 대피자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대피 명령이 없는 대피는 ‘자발적’이기 때문에 자기책임이다.”

이러한 분위기가 여론 만이 아니라 정부, 행정기관에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은 자발적 대피자의 생활에 치명적이었다. 자발적 대피자의 대피와 관련된 비용은 모두 본인부담으로 배상이 전혀 없었다. 또한 처음엔 무상 임대주택에서 조차 자발적 대피자를 거부했던 경우도 각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자발적대피자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은)대피명령 지역은 아니기 때문”이라며, 원전대피자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발적대피자들은 스스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피가 일시적이라면 조금은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장기간 이어지면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다.


원전사고로 소중했던 일자리도 버리고, 신축했던 집도 나와야 했다. 그 후 운 좋게 대피할 곳에 정착해도 저금해 놓은 돈을 쓸 수밖에 없는 생활. 아이들의 유치원이나 학교, 진학문제도 있어서 안정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자택주변의 방사선량은 통상 기준보다 10배였고, 장소에 따라선 130배 이상이 나타나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그런 생활을 강요받으면서 남편만이 일을 위해 후쿠시마로 혼자 돌아가고 가족만 남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이중생활을 하게 되면서 부부관계조차 파탄 나는 경우도 속출했다. 그런 사람 중의 한사람이 이와키 시에서 남편과 두 아이와 생활하고 있었던 가와이카오코(河井加緒子당시 29세)였다.


남편은 일을 다시하기 위해 대피소에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카와이는 두 아이들을 데리고 사이타마 현의 공영주택에서 대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으로부터는 대피생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생활이 힘들었지만, 카와이 자신, 스스로가 생활기반을 만들면 남편과 같이 대피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멀어져만 갔다.


“어느 날, 남편이 카와이가 없는 자리에서 ‘애 엄마가 제멋대로 피난했다.’고 이야기해서 남편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대피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카와이였지만, 남편은 다르게 생각했던 것이다.”

카와이는 풀타임 직장을 얻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 양육으로 점점 피폐해져가면서 사고 후 10개월정도 될 때 이혼을 결심했다. 또한 단지 내의 선배여성에게서 “좋겠어. 도쿄전력으로부터 돈도 받았다면서.”하는 사실무근의 중상도 들었다.


그 외에도 모자만의 대피생활로 남편이 자택에서 다른 여성을 끌어들이거나,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모자 모두 건강관리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아, 모자만의 자발적대피자들은 궁지에 몰리기 일쑤였다.

“ ‘아이들을 피폭에서 지키기 위해 이런 정도의 고생은 감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남편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점차 ‘대피할 만큼의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생각으로 변하면서, 부인과 아이들을 지원할 마음이 점점 희박해지는 경우도 있다. 최종적으로는 부인과 아이들의 대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마음이 점점 멀어지면서 결국 이혼으로 귀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전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에 초래한 가족의 붕괴이며, 결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쿄전력이나 일본정부는 부부와 아이들 둘이 있는 가족의 경우, 단지 160만엔 정도를 지원했을 뿐이다. 이것은 직업이나 집을 떠나 대피생활을 하기 위한 필요경비로는 너무 부족한 금액이다.

게다가 일본정부와 후쿠시마 현은 자발적 대피자에 대한 임대주택 지원을 2017년 3월까지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향후 자발적 대피자의 생활에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고, 인간으로서 존엄조차 박탈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탄식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주택지원은 자발적대피자에 대한 유일한 지원이다. (중략) 이대로는 많은 사람이 길거리로 쫓겨날 판이다. 나 자신도 집을 나와 노숙자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앞에서 서술한 카와이가 시민단체에 호소한 말)

“본인 스스로 좋아서 대피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다. 현재 필요한 것은 자립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대피자들을 향한 지원이다. 생활의 어려움이 목전에 닥치고 있다. 이혼한 사람도 있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임대주택 지원을 끊어버린다면 살지 말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반대집회에 참가한 여성의 주장)


그러나 <원전사고난민>으로 변해버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일본정부나 도쿄전력은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머릿속에는 한 곳이라도 더 많이, 한 시라도 더 빨리 원전을 재가동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원전은 한번 큰 사고가 발생하면 있을 수 있는 모든 형태로 사람을 습격한다. 그때 정부나 전력회사는 결코 책임을 지거나, 올바르게 배상도 하지 않는다. 울고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국민들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5년이라는 시기에 이런 참상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


번역 ; 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