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과 환경문제

비키니환초핵실험-1(번역문)

파랑새호 2016. 3. 7. 12:11

태평양 핵실험으로부터 70년

비키니 주변에서 67회의 핵실험, 일본선박 992척이 피폭

 

 

1946년~1958년까지 미국은 태평양에서 핵실험을 시행했다. 1954년, 제5후쿠류마루(第五福竜丸)호를 비록해 일본의 많은 어선이 피폭하는 비키니 사건이 발생했다. 올해, 개관 40년을 맞은 제5 후쿠류마루 전시관의 이치다 마리(市田真理, 큐레이터)에게 핵실험의 피해, 비키니사건에 대한 내용을 들어본다. (총2회)

 

 

                        (비키니환초. 짙은 청색부분은 수폭 부라보가 

                                  산호초를 도려낸 확실한 증거이다.)

 

 

1946년 3월7일 목요일 아침.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난 후 불과 7개월 후인 이날, 미해군의 대형상륙함이 마샬군도 비키니 환초의 주민 167명을 태우고 비키니섬을 떠났다. 핵실험장으로 선정된 고향에서 강제로 이주시킨 것이다.

같은 해 7월1일, B29폭격기로부터 원폭‘에이블’(ABLE)이 비키니 환초의 내해(라군)에 떨어졌다. 계속해서 24일에는 원폭 ‘베이커’(BAKER)의 수중폭발실험을 시행했고, 비키니 환초 전역은 아주 높은 방사능 오염지역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모든 핵실험을 총칭한 <크로스로드 작전>(Operation Crossroads)에 참가한 많은 군인도 피폭했다. 1948년부터는 에인웨톡 환초(Eniwetok Atoll)도 실험장으로 선정해서 비키니 환초와 함께 1958년 8월까지 67회의 핵실험을 반복한 것이다.

 

 

3월1일 소위 죽음의 재(낙진)이 떨어지다.

다시 핵실험장인 비키니 환초에서 1954년 3월1일 <캐슬 작전>(Operation Castle)으로 최초의 수속폭탄 부라보(BRAVO)가 폭발. 160킬로미터 동쪽에서 조업중이던 어선 제5후쿠류마루호의 승무원들은 수평선에서 섬광을 목격했다. 날이 밝기 직전의 어둠이 붉은 빛으로 뒤덮이고, 빛이 나고 8분후 이번에는 발밑에서 땅이 솟구치는 듯한 굉음소리가 들렸다.

선장의 지시로 바닷속에 내려놓았던 주낙을 끌어 올리면서 배는 비키니 환초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구름덩어리가 쫒아 왔고, 하늘을 덮어버렸다. 이윽고 내리기 시작한 비에는 하얀 재같은 것이 섞여 있었으며, 눈으로도 귀에도 옷속으로도 지속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재는 갑판위에 발자국을 남길 만큼 쌓여버렸다. 이것이 뒷날 <죽음의 재>로 알려진 방사성강하물(nuclear fallout)이었던 것이다.

히로시마형 원폭의 1천배 이상의 폭발위력을 갖고있는 수소폭탄 부라보는 대량으로 <죽음의 재>를 발산했으며, 주변의 환초나 바다를 오염시켰다. 폭발에서 비산하게 된 죽음의 재는 바람에 실려 확산되었으며, 성층권에 도달하고, 결국에는 비에 섞여 전 세계로 떨어진다.

 

 

태평양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생선을 잡은 위치 분포(1954년 3월~8월말) ●은 방사능에 오염된 생선을 수확한 장소. 다만 일본의 어항에서 검사된 생선뿐인 것이며, 실제 오염된 생선의 분포는 더 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출처 ; [비키니 수폭피해 사건과 피폭어선 60년의 기록 제5후쿠류마루는 항해중] 공익법인 제5후쿠류마루평화협회편.)

 

 

23명의 승무원은

제5후쿠류마루호의 승무원들은 죽음의 재를 뒤집어 쓴 그날 이후부터 식욕부진이나 권태감을 나타냈고, 수일 후부터는 죽음의 재가 묻었던 부분의 피부가 β선 화상, 일주일 후에는 탈모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본인들은 정작 기분이 나쁘기만 했을 뿐 자신의 몸에 발생하고 있는 증상에 대해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3월14일에 시즈오카현 야이즈항(静岡県焼津港)으로 돌아왔다. 제5후쿠류마루의 피폭이 정작 ‘사건’이 된 것은 16일의 요미우리신문 조간에 보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문의 보도를 보고 전일본민의련이나 신일본의사협회 등이 현지조사를 시행했다. 오감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방사능오염은 선원만이 아니라, 어시장 관계자들, 유통업계, 음식점, 서민의 식탁을 불안에 빠뜨렸다.

이때 잡은 참치의 검사는 시오가마(塩釜), 쯔키지(築地), 미사키(三崎), 시미즈(清水), 야이즈(焼津) 등 정부가 지정한 5개항 외에 오사카(大阪), 고베(神戸), 다나베(田辺), 쿠시모토(串本), 가츠우라(勝浦), 도쿠시마(徳島), 고우치(高知), 무로토(室戸), 무로토자키(室戸岬), 나가사키(長崎), 가고시마(鹿児島), 마구라자키(枕崎)에서도 시행했다. 이 해 말까지 적어도 856척의 어선이 방사능 오염 생선을 잡았음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상선이나 화물선도 죽음의 재로 인한 영향을 받아, 피폭선은 992척에 달한다고 알려졌다.

 

 

구보야마 아이키치(久保山愛吉)의 사망

제5후쿠류마루의 승무원은 개인차는 있어도, 2000~3000미리시버트의 외부피폭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되며, 혈액이나 소변 등에서도 방사능을 검출했다. 백혈구, 골수세포감소 등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피폭으로부터 반년 후에 구보야마아이키치의 상태가 악화하면서 9월23일에 사망했다. 그는 “원수폭 피해자는 나를 마지막사람으로 해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54년 12월말, 생선에 대한 검사는 중단되었으며, 미일 정부간 협상으로 위로금 지불로 사건은 막을 내리고, 피해를 입은 어업관계자도 결국 침묵했다. 다음해 5월, 22명은 전원 퇴원했지만, 완쾌한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전국의 많은 어업종사자들의 고통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죽음의 재를 발생한 핵실험장도 존속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원문 ; 

http://www.min-iren.gr.jp/?p=26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