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10월혁명과 자본주의의 생존(The October Revolution and the Survival of Capitalism)(번역문)

파랑새호 2017. 9. 5. 15:54

원문출처 ; https://monthlyreview.org/2017/07/01/the-october-revolution-and-the-survival-of-capitalism/


10월혁명과 자본주의의 생존(The October Revolution and the Survival of Capitalism)

저자 ; Prabhat Patnaik(프라브핫 파트나이크는 네루대학의 경제연구 계획센터 명예교수이며, 웃싸 파트나이크와 [제국주의 이론](콜럼비아 대학교 출판사, 2017년)의 공동저자이다.)


10월 혁명은 인류사에서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계획을 세워 진행한 최초의 혁명이었다. 2월 혁명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초기 부르주아 혁명처럼 무계획적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한 반면, 10월 혁명은 그렇지 않았다. 동시에 일부 사람이 제기하는 바와 같은 블랑키류의 폭동도 아니었다. “혁명은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만든다.”는 식의 낭만적 반란도 아닌 것이다. 10월 혁명은 정세에 대한 엄밀한 이론적 평가를 바탕으로 이론적 발전에 기초하여 발생한 것이다.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바로 “투쟁속에서 터져나오는 이론”인1) 것이다. 이러한 이론만이 상황을 일소하고, 막대한 에너지가 넘쳐나며, 세계의 심오한 변화를 초래하고,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협하는 혁명정세를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이론은 궁극적으로 사라져 가는 데, 왜냐하면 초기의 이론적 이해를 근거로 전망했던 정세 자체가 변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농민 동맹

정세에 대한 이론적 이해는 단계적으로 발전했다. 두 단계가 특히 중요하다. 첫 번째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 레닌이 알렉산더 마르티노프 (Alexander Martynov)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속해있던 다른 당원들이 후발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던 “뉴이스크라”(New Iskra)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제기한 것이다. 이의 핵심적인 내용을 보면, 후발자본주의 국가에서 새롭게 대두한 부르주아지는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수행했던 것과 같이 봉건제에 반대한 부르주아 혁명을 더 이상 완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2) 근거는 부르주아지들이 봉건 소유에 대해 공격할 경우, 그것이 뒤에 자신들의 소유에 대한 공격으로 반발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혁명을 계속 진행해가는 과정에서, 특히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농민을 봉건제로부터 해방시키는 임무가 부르주아 혁명을 추진하는 주요한 과제였으나, 과거의 봉건 체제와 타협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계급의 지도하에 노동자 - 농민 동맹을 필요로 한다. 노농동맹이 봉건 체제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혁명을 추진한다는 것은, 이제 막 촉발된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 속에 다만 착취받는 계급이 농노에서 노동자로 단순히 역할이 뒤바뀌는 상태로서 만은 멈출 수가 없다. 부르주아 혁명을 달성한 노동 계급은 분명히 연속적인 혁명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하며, 그 동안에 노농 동맹의 세부적인 구성 내용은 계속해서 변할 것이다. 레닌이 그의 저서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두가지 전술](1905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주주의 혁명 과정에서 농민대중과 함께 해야만 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누르고, 무력으로 봉건독재의 저항을 분쇄하여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인구 중의 준프롤레타리아적(semi-proletarian) 요소를 갖고 있는 대중들과 함께해야만 쁘티부르주아와 농민의 동요를 무력화시키고 무력으로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3)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급 구성이 변하면서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 주도의 노동자 - 농민 동맹 개념은 정세 이해에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를 근본적으로 여러 면에서 발전시켰던 것이다. 첫째, 농민에 대한 입장의 변화로서, 노동 계급이 주도하는 혁명 세력에 포함시켰다.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가 농민의 지지를 얻은 사례는 혁명 당시뿐만 아니라, 파리 코뮌(부르주아 재산에 대한 공격은 바로 쁘티부르주아의 재산에 대한 공격으로 연결된다면서 1789년 프랑스혁명의 수혜자인 프랑스 농민들에게 불안감을 불어넣은 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가 진압했다)의 패배도 좋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정세에서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진영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둘째, 농민에 대한 이러한 태도 변화는 마르크스주의가 유럽에 국한된 이론이라는 평가를 넘어, 자본주의 발전 수준의 차이와 상관없이 전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혁명이론으로 자리 잡게 했다. 그리고 셋째,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은 이제는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민중해방을 위해선 반드시 추진해야만 하는 과정이 되었다. 사회주의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다양한 생산양식이 존재하는 저발전국가들의 혁명적 목표로서 자리 잡았으며, 저발전 국가들의 혁명적 과제로도 새겨넣을 수 있었다. 다양한 생산양식을 갖고 있는 저발전 국가들은 역사적 필연성의 문제로 상호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마르크스주의를 “단계 이론”으로 환원시키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이런 단계적 논리에 따를 경우 진실로 사회주의를 향한 과정은 저발전 국가들의 경우 오랜기간 여러 단계를 거치는 역사적 이행이 될 수밖에 없는 반면,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직접 이행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모든 혁명투쟁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


정세를 이해하는 두 번째 중요한 이론적 단계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발전한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나타났다. 칼 마르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필연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금융과 산업 영역의 자본 집중이 독점을 형성하고, 소수의 인력으로 막대한 “금융자본”을 통제하고, 두 영역 모두를 금융자본의 요구에 따라 변형시키거나 혹은 장악하는 금융과두제는 새로운 자본주의 정세의 핵심특징을 구성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 간 경쟁은 다양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속한 서로 다른 독점 기업들 간에 벌어지며, 각자의 비용으로 우선 전 세계를 대상으로 "경제적 영역"을 차지한다. 세계는 독점자본간에 분할되며, 경쟁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통한 재분할 시도형태로 나아간다.4) 이러한 재분할 시도를 위한 전쟁, 즉 제1차 세계 대전은 바로 이런 경향의 구체적 예증이며, 세계의 노동자들이 참호를 가로 질러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다. 독점 자본주의는 또한 금융 과두 독점자본의 잡다한 이해관계를 촉진하기 위한 총알받이로서 종속국, 반식민지, 식민지의 피억압 민중들을 끌어들인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는 다양한 국가들 간의 상대적 권력변동을 그때 그때 반영하고(이런 현상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불균등 발전"의 편재로 발생한다), 이미 분할 된 세계를 재분할하기 위해 명백히 주기적인 전쟁 상태에 도달한다.


자본주의 최후의 단계로서 제국주의를 이해하는 것에 이어 홉슨은(J. A. Hobson) 몇가지 의미를 추가하였다. 첫째 마르크스이론의 중요한 요소는 생산양식이 역사적으로 낙후되기 전 까지는 대체되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낙후성”에 대한 전형적인 규정은 오랜 기간 지속적인 위기에 빠져있는 조건, 말하자면 아주 협소한 경제적 조건에서만 부여된 것이다.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은 오랜 기간 지속하는 위기나 혹은 “붕괴”조짐이 나타나지 않는 다는 점을 근거로,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타도대신 체제내 개혁을 주장했다. 반면 로자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는 체제가 궁극적으로 붕괴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자본축적 이론으로 제시하면서 혁명적 전망을 확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주의의 논리는 이러한 논쟁의 토대를 완전히 바꾸었다.5) 레닌은 “소멸 직전”이라고 표현했지만,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낙후되었으며, 제국주의 단계에서 민중을 황폐화시키는 주기적인 전쟁으로 몰아넣는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노동자들의 유일한 선택은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사이에서(로자가 사용한 문구이다), 참호를 가로질러 노동자들끼리 서로 죽일 것이냐, 아니면 체제로 총구를 돌릴 것이냐에 있다.

둘째,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종속국가 노동자들 역시 제국주의 착취의 희생자였고, 제국주의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이용당했으며, 전쟁으로 인한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그들의 훈련(군사 훈련 포함)과 의식은 전쟁으로 인하여 반등하거나 도약했으며, 그들 역시 야만과 해방 사이에서 똑같은 선택에 직면했기 때문에 자본의 지배에 맞서 일어났던 것이다.


셋째, 체제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낙후되었을 뿐 만 아니라, 임박한 현상으로서 세계혁명의 도래가 역사적 의제로 대두되었다. 이리하여 제국주의와 그에 수반된 전쟁 때문에 인류에게 내맡겨진 실제적인 선택으로서 야만주의와 사회주의간의 선택을 바로 결정 해야만 했다.


이러한 정세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가 당시 모든 국가들이 민족 해방의 조건으로 사회주의를 향한 다양한 경로를 추진한 것이라면, 그 다음 이해를 위한 두 번째 단계는 각국의 경로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제국주의가 이들을 서로 연결했다는 것이며, "가장 약한 고리"에서의 단절이 전체적인 연결고리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연결되어 있는 고리의 단절은 당시 정세에서 절박했다. 이러한 상황인식의 결과, 지금껏 세계에서 한 번도 결성 된 적이 없는 국제조직, 공산주의 국제조직이 설립되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의 대표들은 중국, 인도, 멕시코, 이집트, 베트남에서 온 동지들과 함께 스크럼을 짤 수 있었다.



정세 이해


자본주의가 위기에 도달했다는 10월 혁명의 기본 견해는 반공산주의 진영의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당시의 많은 사상가들이 공유했던 내용으로, 궁극적으로 정세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에 기초할 경우, 상황이 과거와 같이 단순하게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1933년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작성하였다. "전쟁 후 우리가 발견한 자본주의는 개별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면서 국제적으로는 쇠퇴하고 있다. 지성적이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정의롭지도 않고, 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상품이 잘 유통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경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디에 무엇을 놓을지 몰라 방황하고 있고, 아주 당혹스럽다.“6) 케인즈 (Keynes)조차도 그 당시의 자본주의를 ”경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다 앞서 케인즈 (Keynes)는 자신의 저서 [평화의 경제적 귀결](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분열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했다. 당시 레닌은 1920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2차 총회에서 세계 혁명의시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한편으로는 대중의 경제적 위치가 견딜 수 없게 되었고, 반면에 케인스가 서술한 자본주의 분열이 시작되었으며,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승전국이 무시해도 좋을 만한 소수의 국가만이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세계혁명이 무르익은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7) 세계 혁명의 상태와 관련하여 레닌과 볼세비키의 인식은 10월 혁명이 우선 가장 중요한 결과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미를 공유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탈 식민지화가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까지 지속되었다. 여러 특징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제국주의 내부 경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무자비한 베르사유 조약 (Keynes의 비난은 레닌에 의해 강조됨), 대공황, 파시즘의 부상, 파시스트 국가들에 의한 거대한 영토합병론자들의 추동,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은 모두 급격한 제국주의 내부 경쟁의 상태를 다양하게 표현한 것이다.


소련의 생존조차도 레닌은 제국주의 내부 경쟁 탓으로 돌렸다. 그의 마지막 논문 중 하나인 “더 적게, 그러나 더 좋게”(Better Fewer, but Better)에서 내전 기간 중 러시아 반혁명을 지원했던 동서 제국주의국가들의 갈등으로 다양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합동 군사개입 실패가 “우리에게 두 번째 시간적 여유를 줄 수 있을 것인지” 궁굼해 했다. 동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과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 간의 갈등은 베르사유 조약을 더욱 악화시켰으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이 레닌과 볼세비키가 이론적으로 파악했던 정세, 즉 10월 혁명의 진행과 이후 계속해서 세계혁명 투쟁이 터져 나올 것이라는 역사적 정세(국면)의 끝을 나타냈다.8)


전쟁종식은 공산주의 질서의 거대한 진보로 보였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계급의 확고한 위치, 영국선거에서 윈스턴 처칠이 노동당과의 선거경쟁에서 패배, 프랑스, 이탈리아 공산당의 강력한 기반은 이를 명백하게 입증하는 것이었고, 식민지, 반식민지, 종속국가의 전례없는 독립이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는 전쟁으로 인해 취약해지거나 혼란에 빠졌으며, 아주 중요한 여러 양보를 강요받았다. 탈식민화, 높은 고용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수요관리, 이에 대해서는 사실 금융자본이 전쟁 전부터 국가개입을 방해하거나 반대해 왔으나 결국 어쩔수 없이 수용하였다. 그리고 일반 성인들이 참여하는 보통선거권은 민주적 정부 기관들을 자리 잡게 하였다. (보통선거권은 프랑스 조차 1945년에나 가능했다.)


이러한 양보는 예전 자본주의가 새로운 "복지 자본주의"로 변해가는 과정으로서, 자본주의가 “변했다”는 인상을 조성했다. 이런 발상은 자본주의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높은 고용 수준 달성이 광범위한 군사비 지출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며, 또 대개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공식적인 탈식민화 (그 자체로는 종종 불완전했음)가 달성되었으나 신생 독립국가에게 제3세계 자원에 대한 통제를 양보하는 것은 모든 국가가 꺼려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9) 그러나 어쨌든 주요 제국주의 국가 노동자들과 제3세계의 민중들이 얻게 된 실제적인 이익으로 인하여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인식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함께 전후의 정세는 레닌주의가 가시화 했던 것을 넘어선 무엇인가를 드러냈다. 즉 세계적으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일국의 단일지배가(일부에서는 '초제국주의'라고도 함) 제국주의 내부 경쟁을 대체해버렸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단계에 대한 공산주의 운동이 전후 정세에서 유효하다고 판단한 근본적인 인식은 세계 혁명이 임박했다는 주장에 근거한 것인 바, 이것은 바로 제국주의 내부의 경쟁과 전쟁이라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쿠바 혁명과 베트남 혁명은 이런 상황에서 초래된 것이었지만, 전후의 특정 조건에 의한 산물이라기보다는 초기 정세(국면)에서 뒤늦게 촉발된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후 정세 그 자체는 단지 간헐적인 현상임이 드러났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경향으로서 자본 집중 경향은 다국적 기업의 설립만이 아니라 광대한 재정 블록을 탄생시켰다. 재정 블록은 여러 요인이 결합된 것이다.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협정 이후 미국의 지속적인 경상수지 적자를 통해, 미국의 달러화가 “금만큼 좋은 것”으로 여겨졌을 때 금 1온스당 35 달러로 교환 할 수 있었다. OPEC 가격 인상 이후 거대한 오일달러가 미국은행으로 유입되었다. 장기간의 전후 호황기 동안 저축을 통해 금융 시스템에 유입된 예금으로 인하여 수요 관리에 대한 국가 개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자본은 전 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하였으며, 국가간 경계를 무너뜨리려 했다. 이러한 금융자본의 노력은 성공하여, 이전 정부들과는 대조적으로 재정 흐름을 포함한 재화, 서비스 및 자본의 보다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국경을 넘어서는 "세계화" 정부를 설립했다.



세계화의 성립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은 세계화가 성립 된 전후 정치정세 상황에서 일국이 여타 제국주의를 압도하는 강력함을 갖추었을 뿐만이 아니라, 금융자본 자체가 세계화되었고, 이제는 특정 국가의 영향력으로 세계를 분할해서 전 지구적 차원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하는 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한 요인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제국주의 간 경쟁이 소멸되었다는 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경쟁이 지속될 것임을 강조한 레닌에 반대하면서, “초제국주의”의 가능성을 언급했던 칼 카우츠키(Karl Kautsky)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레닌과 카우츠키 두 사람 모두 국가적 금융자본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중심부 국가의 금융자본은 국가를 기반으로 하거나 국가 지원을 기반으로 활동 한다. 오늘날의 경우는 금융 자본 자체가 국제적이며, 레닌과 카우츠키가 이야기했을 때의 금융 자본과는 완전히 다른 실체이다. 세계화 시대 제국주의 경쟁의 소멸은 카우츠키가 주장했던 “국제적으로 연합한 금융자본이 협력해서 세계를 착취하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금융자본이 출현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다극화"에 대한 토론의 상당한 내용 중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다극화"가 출현하고 있다는 평가는, 제국주의 국가 간 경쟁의 부활을 강조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평가는 정치적 요인에 대한 오류를 초래할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제 현상에 대한 오류와 연결될 수 있다. 최근 경제 현상의 핵심 요소는 국제 금융 자본의 헤게모니 (hegemony)이다.


1933년 논문에서 "금융은 모두 국가적 이어야만 한다"는 Keynes의 처방과는 대조적으로 국민-국가 내에 세계적 국제 금융 자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현대 세계화의 중요한 특징을 드러낸다. 이것은 국민 국가가 싫든 좋든 금융자본의 요구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서 금융은 위기를 인식하는 순간,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일제히 이동할 것이다. 사실 국민들이 선택한 정부의 색깔이 무엇이든 간에 똑같은 경제 정책, 즉 금융자본의 철수를 막기 위해, 국제 금융 자본이 선호하는 정책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훼손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화된 금융자본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면 여러 가지 중요한 경제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첫째, 국가의 본질적 변화를 수반한다. 국가는 원래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모든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사회 전체적인 정책을 고려한다고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세계 금융 자본의 이익과 국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서 노골적으로 이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촉진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예컨대 무디스의 신용등급 향상은 국가 자부심의 문제가 된다.) 특히 제3세계에서 이러한 사실로부터 파급되는 영향은 농업을 포함해서, 중소 생산 부문에 대한 국가지원과 보호의 폐지, 그리고 다국적 기업을 포함한 대자본이 광범위한 중소기업들을 침해하는 것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일어난 반식민지 투쟁은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정부가 대자본의 침탈이나 세계시장의 가격변동으로부터 농민 농업을 보호 하겠다는 약속을 제시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가는 다양한 수준에서 농민 농업과 소생산자를 육성하며, 보호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보호정책의 수혜자들 중 일부가 성장하였다. 해당 부문 전체적으로는 자생적 자본주의 발전을 향한 경향으로 나아갔으며, 외부 대자본의 침입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았다. 신자유주의 국가는 이와같은 지원과 보호를 폐지하여, 광대한 부문을 위기에 빠뜨렸다. 많은 수의 중소기업들과 고용되어있던 노동자들은 심각한 불행에 직면하였으며, 있지도 않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로 이주하거나, 아니면(인도의 경우처럼)많은 사람이 자살했다.


둘째, GDP 성장률이 높더라도 노동 수요의 증가가 노동력의 자연증가 분을 흡수할 만큼 충분히 크지 않기 때문에 실업자의 상대적 크기는 증가한다. 따라서 노동 생산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또 조직 노동자라 할지라도 실질 임금은 거의 증가하지 않는다. 이는 제 3 세계에서 잉여의 비중을 높이고, 많은 실업자를 양산하며, 소득 불평등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반드시 제3세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선진국과 저발전 국가를 자유롭게 이동하기 때문에, 선진국 노동자라 할지라도 제3세계의 저임금 노동자와 경쟁할 수밖에 없고, 제3세계의 실업률이 선진국 노동자의 임금을 낮은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 이로 인해 선진국의 노동 생산성이 증가해도 노동자의 실질 임금은 증가하지 않는다.(선진국 노동자의 임금이 제3세계 노동자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선진국에서도 잉여가 증가하고, 소득 불평등도 증가한다. (미국의 경우,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에 따르면 평균 남성 근로자의 실질 임금은 1968년~2011년 사이에 증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약간 감소했다.)10) 단기적으로는 세계의 매출 중에 잉여의 비중이 증가한다.


셋째, 임금소득의 한계소비성향은 경제잉여 소득(일반적으로 부유층에서 발생하는 소득)보다 높기 때문에, 잉여의 비중이 증가하면 세계경제의 과잉생산 경향이 발생한다. 이것은 바란(Baran)과 스위지(Sweezy)가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경제를 평가할 때 제기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11)


넷째, 과잉생산 경향에 대한 국가의 개입 능력은(바란과 스위지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50년대와 60년대 군사비 증가를 통해 이루어짐)세계화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과잉생산 경향을 상쇄하기위한 국가 개입의 경우, 재정 적자를 무릅쓰고 예산을 조달하거나 또는 저축이 대개 하락한 상태에서는 주로 세금을 통해 재원조달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상대적으로 수익을 높게 유지하려는 자본에 대한 세금증가를(즉 이윤이나 자본설비를 불문하고) 의미한다. 그러나 세계화된 금융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는 경제상황에서 그 어떤 국민 국가도 자본 이탈을 두려워하여 자본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고 있으며, 재정 적자도 계속해서 유지(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으로 제정한 GDP의 3 %를 초과하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과잉생산에 대한 경향은 경우에 따라서는 자산가격 "거품파열"로 억제되는 것이 최선이며, "거품"이 붕괴 될 때 구조적 위기가 나타난다.12) 세계화 체제는 불평등 증가, 임금 정체, 중소기업의 파탄으로 제3세계 노동 인구의 절대적 빈곤화를 초래하며, 간헐적인 “거품파열”을 통해서만 저지할 수 있는 구조적 위기 경향이 나타나고, 실업 증가를 통해서 세계 노동인구의 조건을 더욱 악화시킨다. 재정 보수주의 정책들은 이런 위기를 가속화(소위 "경기 순환 효과"가 있기 때문에)할 뿐만 아니라 복지비용과 "사회 임금"의 삭감을 초래한다.


자본이 강요한 것이지만 일정한 양보와 함께 제국주의 경쟁을 소멸 시켰던 통제정책으로 “자본주의가 변했다”는 인상마저 드러냈던 전후정세와는 대조적으로, 세계화 체제는 제국주의 간 경쟁이 소멸되었다고는 해도, 선진국이나 저발전 국가 모두에서 소위 “인간적 자본주의”를 실현했던 복지국가 정책을 “거꾸로 되돌려”버리고 말았다. 국제금융자본의 지배력은 제국주의간 경쟁을 소멸시켰을지 몰라도,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약탈적 본성을 드러냈으며, 케인즈가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공정하지 못하고”, “도덕적이지도 못하며” “상품을 판매하지 못하는” 상태로 되었으며, 결국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고 있을 뿐이다.



정세 극복


현재의 정세에서 노동자들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선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는 다시 생각하면, 국가가 노동자의 불행에 민감해야 할뿐만 아니라, 국제 금융자본의 속박이나 변덕에 대해서도 일정한 자율성을 확보해야 가능한 것이다. 자율성은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만 확보된다. 하나는 주요 국민국가들이 함께(말하자면 각국을 대표하는 세계정부 창설) 국제금융자본에 반대하여 노동자에게 유리한 개선정책을 채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일이든 그룹이든 여러 국가들이 세계화된 금융자본의 소용돌이로부터 빠져나와, 한편에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자율성을 추구하면서 한편에선 자본통제를 시행하는 것이다.


좀 더 논의를 진행시켜 보자. 총 수요의 증가는 세계 경제의 실업을 줄이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한 증가가 없다면, 트럼프가 지금 시행하는 바와 같이, 단순한 보호주의를 통해 고용을 창출하려는 시도처럼 실업을 수출하는 “근린궁핍화정책(beggar-thy-neighbor)”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국가의 보복을 초래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를 더욱 손상시키면서, 전체적으로 실업과 위기를 악화시킨다.


그러나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통화 정책이 수요를 증가시킬 수없는 것으로 판명 된 상황에서, 세계 총 수요의 증가는 재정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으로, 다만 두 가지 가능성만이 남아있다.13) 하나는 국제 금융자본을 무시하면서 주요 국가들이 상호 협력 하에 재정투자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이것은 우연히 1930년대 독일 노동조합과 케인즈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이들 국가의 노동자들이 협력하여 투쟁한 결과로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며, 현재로서는 이와 관련된 어떠한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14)


총수요를 증가시키는 두 번째 방법은(근린궁핍화정책을 제외하고) 개별 국가들이 스스로 자본 통제를 시행하거나, 자본가에 대한 세금 부과나 재정적자를 통해 정부재정투자를 늘리고 세계화된 자본이동의 소용돌이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런 정책이 지속되기 위한 전제인 노동자 - 농민 동맹의 구축 가능성은 여러 국가 보다는 특정 일국에서 훨씬 더 클수 있고, 이런 국가에서만이 현존하는 세계화 체제로부터의 이탈을 통해 정세를 극복할 수가 있다.(이탈의 정확한 범위는 상황에 따라 결정됨).


물론 특정 일국에서(일반적으로 소규모 생산을 위주로 하는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노동자 - 농민 동맹을 구축하여 현재의 국면을 극복하는 것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노동자 - 농민 동맹으로 민주주의 혁명을 추진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향한 과정의 일부분으로 서술한 레닌의 분석처럼, 노동자-농민동맹의 기초위에 수립한 국가가 세계화로부터 빠져나오는 경우도 여러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 과정에 있는 것이며, 언제든지 노동자와 소생산자들에게 사악한 결과로 뒤집어 질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즉, 현 정세를 극복하는 것은 현 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노동자 - 농민 동맹을 구축하는 혁명 세력이 이러한 필연성을 깨닫고 있지만, 이러한 시도조차도(명백히 온건한 정책임에도) 국제 금융자본의 반대로 인해, 현 정세 극복은 체제를 뛰어넘어야 할 필요성을 계속해서 자각하게 만드는 (마르크스의 말처럼)"지속적인 변증법적 과정"(drum dialectics)이 될 것이다.


현 정세는 짧게 말해 초기와는 동일하지 않다 해도, 10월 혁명을 추진했던 레닌주의적 내용과의 연관성을 되살린다. 봉건족쇄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농노들의(이들만이 아니라 제3세계의 여타 소생산자들을 포함) 열망은 이제 세계화를 통해 국제금융자본이 강제로 부과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자유를 열망하고 있다. 민주주의 혁명은 국민국가가 국제금융자본에 맞서 진정한 자율성을 얻기 위해 세계화체제로 부터 이탈하여 반드시 포위해야 하며, 이러한 상황은 효과적인 노동자-농민동맹의 토대를 조건으로 정치적으로 개입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세계화는 노동자 - 농민 동맹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창출했으며, 이제 전 세계는 동맹의 구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또는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파시즘에 점점 더 의존하고 있는 금융 자본이 우세한 곳에서 위기에 빠진 상태로 남아있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자본주의는 다시한번 "경멸"받아야 마땅한 상태이지만, 제국주의 경쟁의 소멸은 레닌의 시대와는 달리, 국제 금융 자본의 헤게모니를 회피하기 위한 노력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현 정세의 극복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 분리가 없어 더 어렵다. 또는 달리 말해서, 제국주의 국가 간 경쟁의 소멸은 탈출구가 없는 상황을 조성하고, 현 정세의 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실천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느려지더라도 강력한 노동자-농민 동맹의 유지가 현 정세의 극복을 위해서는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이 수립한 소련이 쇠퇴한 주요 원인은 노동자-농민 동맹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강제 집단화를 통한 파열은 새로운 체제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이 약점은 피해야만 한다. 현재의 세계화 체제로부터 이탈해야 할 필요성은 때론 좌파 내부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15) 좌파의 상당 부분이 자신도 모르게,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헤게모니를 박살내는 것은 현 정세를 극복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이다.



Notes

1. Georg Lukás, (London: New Left, 1970).

2. V. I. Lenin, , in , vol. 1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7).

3. Lenin, , 494.

4. V. I. Lenin, , in , vol. 1.

5. on this, see Paul M. Sweezy,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6).

6. J. M. Keynes, “National Self-Sufficiency,” 22, no. 4 (1933): 755–9.

7. V. I. Lenin, , vol. 3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75), 397.

8. Lenin, , vol. 3, 724.

9. See Harry Magdoff, “Militarism and Imperialism,” 21, no. 9 (February 1970): 1–14.

10. Joseph Stiglitz, “Inequality Is Holding Back the Recovery,” , January 13, 2013.

11. Paul A. Baran and Paul M. Sweezy,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6).

12. This argument has been set out in greater detail in Prabhat Patnaik, “Capitalism and Its Current Crisis,” 67, no. 8 (January 2016): 1–3.

13. MichałKalecki had noted the inadequacy of monetary policy for stimulating activity in a classic article, “Political Aspects of Full Employment,” reprinted in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1).

14. C. P. Kindleberger,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

15. A view, widely prevalent on the left, that contributes to this weakness is that any petty production for the market is a progenitor of capitalism. This is neither theoretically nor historically true. See Prabhat Patnaik, “Defining the Concept of Commodity Production,”Studies in People’s History 2, no. 1 (2015): 11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