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미래를 생각하며 안드레군더 프랭크를 기억하기(번역문)

파랑새호 2017. 8. 4. 14:57

Remembering Andre Gunder Frank While Thinking About the Future

미래를 생각하며 안드레군더 프랭크를 기억하기



(저자 ; Immanuel Wallerstein/ 출처 ; [Monthly Review], 6월호, 2008년)




Andre Gunder Frank’s very long itinerary as a critical social scientist was marked by one unbudgeable constant. He was always committed to a left political agenda, and he was always analyzing the evolving current world situation as a left scholar-activist. I believe that the best tribute I can offer him is to do the same. Gunder’s father, Leonhard Frank, a distinguished novelist and man of letters, wrote toward the end of his life a novel based on his own life. Its title was Links, wo das Herz ist (“My Heart Is on the Left”). This would have been the most appropriate title for Gunder’s own never-written autobiography.1

비판적 사회 과학자로서 오랜기간 활동해 온 프랭크 (Andre Gunder Frank)는 항상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내용을 추구했다. 그는 항상 좌파 정치 문제를 고민했고, 또 좌파 학술 운동가로서 변화하는 현재의 세계 상황을 분석했다. 필자는 그에게 표현 할 수있는 최선의 존경심이 그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저명한 문학가이자 소설가 인 레온 하르트 프랭크 (Leonhard Frank)는 자신의 생이 막바지를 향해갈 때 자신의 삶에 기초한 소설을 썼다. 소설의 제목은 Links, wo das Herz ist ( "내 심장은 왼쪽에 있다")였다. 아마도 Gunder 자신의 결코 쓰지 않는 자서전을 위한 가장 적절한 제목이었을 것이다 .1)


Left agendas are actually complicated things to construct. For one thing, they are really constructed in three different time frames, which I shall call long term, medium term, and short term. Many of the arguments that pervade left discussions about left strategies confuse the three time frames, and therefore debate at cross purposes. I shall try to talk about all three time frames but keep them separate. When I speak however about the next twenty-five years, I am speaking about the middle term, which I think is the crucial period to clarify.

좌파의 정치적 과제는 사실 구축하기가 상당히 복잡하다. 한 가지, 그들은 실제로 세 종류의 다른 시간 프레임을 구축했으며, 필자는 이것을 각각 장기, 중기 및 단기라고 부른다. 좌파의 전략에 대한 논의를 보완하기 위한 많은 논쟁들은 세 가지 시간프레임을 혼합하였으며, 따라서 시간이 뒤죽박죽된 목적을 논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향후 25년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중기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셈이며, 이것이 결정적 시기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To make any sense of this discussion, we have to think first about the world-systemic context within which an agenda of any kind can be constructed. I have been arguing in many recent articles and books that the capitalist world-economy, our modern world-system, is in a systemic crisis, by which I mean something that is quite different from one of its repeated economic downturns or stagnations that are a built-in feature of the way it functions, or the kinds of processes that allow for the emergence of new hegemonic powers.2 What I am calling a systemic crisis occurs only once in the life of a historical system. It occurs when the mechanisms that exist to bring the system back to some kind of equilibrium no longer function adequately, and the system can be seen to be moving far from equilibrium, thereby becoming “chaotic.” Chaos is here a technical term that describes a situation in which a system fluctuates wildly, erratically, and severely. At that point, the system “bifurcates” and there ensues an acute struggle over which of two alternative paths to new systemic order it might take.3 The outcome of such a struggle is intrinsically unpredictable. Or to put it another way, it is equally possible that, in the end, the bifurcating system will take one path or the other. The struggle is thus not about whether or not to retain the current capitalist system, since it cannot survive, but about what kind of world-system (or world-systems) will replace it. I call this struggle, for reasons I shall elaborate, the struggle between the spirit of Davos and the spirit of Porto Alegre.

이런 논의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구축헤야 하는 과제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세계 체제의 상황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한다. 필자는 최근의 많은 저서와 논문에서 자본주의 세계 경제, 현대 세계 체제가 구조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위기는 체제의 자체 기능 속에서 반복되는 경기 침체나 불황, 혹은 새로운 헤게모니 강국의 출현을 허용하는 프로세스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2) 필자가 구조적인 위기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인 시스템의 삶에서 한 번만 발생한다. 시스템을 일종의 균형 상태로 되돌리는 메커니즘이 더 이상 적절하게 기능하지 않을 때 발생하며, 시스템은 균형에서 멀어져 "혼돈"(카오스)상태가 된다. 카오스라는 것은 시스템이 격렬하게, 불규칙하게, 심하게 변동하는 상황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이다. 이때 시스템은 "양 갈래로 갈라지고" 새로운 체제 질서로 가는 두 가지 대안 경로 중 어느 것을 채택할 것인지에 대한 격렬한 투쟁이 뒤따른다.3) 투쟁의 결과는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두 갈래 체제 중 어떤 경로를 채택할 것인지 가능성은 똑같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투쟁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말하자면 현 체제의 생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대체할 체제가 어떤 종류의 세계 체제(혹은 세계 체제들)인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이 투쟁을 앞으로 논의를 통해서 밝히겠지만, <다 보스 정신>과 <포르토 알레그레 정신> 사이의 투쟁으로 부른다.


I believe that we are already in this systemic crisis and that within twenty-five (or twenty-five to fifty) years, the issue of the choice of a replacement will be resolved. We shall find ourselves in some other kind of system, one that might be better but also one that might be worse than the present system. The long term is what will come out of that historic choice. It is therefore about that other world that is possible, to use the slogan of the World Social Forum (WSF). The long term is what has been delineated in multiple designs of utopias. Personally, I think it is possible to discuss the long term only in very general terms. I define a better world-system as one that is relatively democratic and relatively egalitarian. Historically, no world-system has been either democratic or egalitarian in any meaningful sense. one that would have these characteristics would be distinctively different from all previous historical world-systems.

필자는 우리가 이미 구조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며, 향후 25 년 (또는 25 년에서 50 년)이내에 대안 체제선택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믿는다. 대안을 위해 몇 가지 다른 종류의 체제를 모색할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 체제가 현재보다 더 나아질 수도 있고, 어떤 경우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점에 있다. 장기 지속은 역사적인 선택의 결과로서 가능한 것이다. 세계 사회 포럼 (WSF)의 슬로건을 사용하여 말한다면, 다른 세상이 가능한 것이다. 장기의 조건에서는 다양한 유토피아의 설계를 그려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장기간에 대한 내용은 아주 일반적인 조건에서만 토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런 의미에서 좀 더 나은 세계 체제를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거나 평등한 것으로 정의한다.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존속했던 어떠한 세계 체제도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적이거나 평등하지는 않았다. 이런 특징을 지닌다는 것은 이전의 모든 역사적인 세계 체제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I don’t think we can say much more than that. Specifically, I do not think that we can define in advance the institutional structures that would result in a more democratic, more egalitarian world. We can draft whatever utopian models we wish. I don’t think it matters, because I don’t think that drafting such models will have too much impact on what actually emerges. The most we can probably do is to push in certain directions that we think might be helpful.

그러나 필자는 우리가 이정도 수준 이상을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제도적으로 진보적이라고 해서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상으로 정의 할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가 무엇이건 초안만 작성할 수 있을 뿐이다. 설령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이 별 문제는 아니다. 모델의 초안 작성이 실제 출현하는 체제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특정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The short term is more interesting. We all live in the short term. Everyone is concerned, indeed very concerned, about the short term. We eat, dress, work, sleep, make love, and survive in the short term. We also are happy or sad, give offense or are hurt, entertain or are entertained in the short term. The short run is what most people think of as life. And for a large number of people, perhaps even for most people, the short term is not a political phenomenon. This is probably an error in perception on the part of those who think of themselves as apolitical since in fact the pluses and minuses of our lives are very much and continuously determined by changing political realities.

단기는 더 흥미롭다. 우리 모두는 단기 조건에 살고 있다. 모든 사람은 사실 단기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먹고, 옷을 입고, 일하고, 잠을 자고, 사랑을 나누며, 단기간에 생존한다. 우리는 또 대체로 단기간에 행복하거나 슬퍼하며, 모욕을 주거나, 상처를 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기간의 행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일 것 같은데, 단기간은 정치적 현상이 아니다. 실제로 단기에는 우리 삶의 플러스와 마이너스 요소들이 아주 많고, 또 지속적인 정치 현실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을 비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식상의 오류가 될 수도 있다.


Among those who debate political agendas, there exists a long list of decisions to be made about the short term, that is, this year and the next at most. Shall we vote or not, and if so for whom or for what party? Shall we sign a petition, or write a letter, or participate in a demonstration? Shall we strike, or support a strike? Shall we speak out to our neighbors or to other persons about our political views, or not? Shall we organize about this or that? And if we do organize, shall we do it locally or in a wider arena? Shall we acquire arms? The list goes on and on. It is a long list. Plus, the debates about what we should or should not do in our everyday lives are quite passionate. We tend not only to pursue our own views about appropriate decisions, but quite often we denounce those with whom we do not agree, especially if they too claim to be “on the left.”

정치 과제를 논의하는 사람들은, 단기에 즉 대부분 올해와 내년에 결정할 사항들에 대해선 아주 긴 목록이 있다. 투표를 할 것인가?하지 않을 것인가? 당을 위해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지원해야 할 것인가? 청원서에 서명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아니면 데모에 참여해야 하는가? 파업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지원해야 할 것인가? 이웃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정치적 견해를 말할 것인가? 이런 저런 내용을 조직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만일 조직한다면, 단위 지역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더 큰 지역을 포괄할 것인가? 무장투쟁의 가능성은? 계속해서 다른 항목들이 이어질 것이다. 아주 긴 목록이다. 덧붙여 매일의 일상생활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논쟁은 모든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기 마련이다. 이 때는 적절한 결정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견해를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지만, 특별히 동의하지 않는 좌파정책을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는 사람들에 대해선 심지어는 비난까지 서슴치 않는다.


Yet, we cannot avoid these daily decisions. Abstaining from any of these decisions is itself a decision. Willy-nilly, the political arena is pervasive, continuous, and quite often overbearing. Some of us are “activists”—the very word is instructive, active as opposed to what? I suppose as opposed to “passive.” But activists are normally only a minority of the world’s populations. The larger majority seem to allow themselves to be carried along by the tide. This may be deceptive. The persons in the passive majority are often angry and sullen, and under certain circumstances, may erupt and become very active indeed. In fact, full-time activists count on this possibility of popular eruption, even if our experience has shown that such popular eruptions tend to occur unexpectedly and not usually as a result of activist prodding.

그러나 일상적인 결정을 피할 수는 없다. 결정과정에서 기권하는 것도 그 자체로 결정이다. 싫든 좋든 정치적 영역은 이미 우리 속에 스며들어 있고, 지속적이면서 종종 억누르기도 한다. 우리 중 일부는 "활동가"이다. 어떤 것에 반대하여 행동하고, 유익한 바로 그 사람들이다. 필자는 활동가가 ‘수동적’인 것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활동가들은 일반적으로 세계 인구의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시류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생각은 속임수일수도 있다. 수동적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종종 화가 나거나 시무룩한 상태이며, 어떤 특정 상황에서는 폭발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직업 활동가들은 대중들의 폭발적 사태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발생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수고대 하는 경향이 있다.


Still, if at any point we who are activists reflect on the decisions we made a few years back, we are often dismayed at how foolish they were. The consequences are often quite at variance with what we expected. This adds grist to the mill of those who recommended other decisions at the time. Denunciations abound. Those who advocated what are called “reformist” or “statist” decisions are said to have sold out to establishment forces. And those who advocated what are called “radical” or “insurrectionary” decisions are said to be “infantile leftists.”

그러나 우리가 몇 년전에 활동가들의 주장대로 결정했다면 어땠을까 되돌아본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상황이 되었을 것인지 아찔한 경우가 있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상당히 다르다. 당시에 다른 입장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 상당한 이점을 초래한다. 결정 내용에 맹렬한 비난이 쏟아진다. ‘개혁적’ 또는 ‘제도적’결정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결정에 대해선 기득권 세력에게 팔린 것이라고 평가한다. 소위 '급진적' 또는 '혁명적'결정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좌익소아병'(혹은 좌파맹동주의)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In this repartee, sober analysis tends to recede into the background. We seldom do in-depth analysis of why particular short-term options did not pan out the way we had hoped. So, let me put forward two arguments that will no doubt be unpopular. The first is this. In the short run, not only should we support the lesser evil, but there is no other choice available, ever. Everyone, without exception, chooses the lesser evil. We just disagree about which choice is that of the lesser evil.

이런 상황에서, 냉정한 분석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희망했던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은 특정한 단기적 선택에 대해 사실 깊이 있는 분석을 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필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비 대중적인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이것이다. 단기적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가급적 그나마 덜 나쁜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덜 나쁜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필자는 단기간에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다만 덜 나쁜 것만 있다는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We surely don’t want to choose the greater evil. Of course, what the lesser evil is in any particular situation depends on the situation. There is no formulaic answer. Often, it is to vote for a left-of-center party against a right-of-center party. Sometimes it is to support a “left of the left” party whose strong showing in an election might have an immediate impact. And sometimes it might be that abstention from voting is the least evil. Choosing the lesser evil always has the flavor of holding one’s nose, and being “realistic.” This choice of the lesser evil in the short run is not only about voting; it applies as well to strikes, demonstrations, and armed struggle. So, if someone denounces you for choosing the lesser evil, know that this person too is choosing a lesser evil, just making a different choice from yours.

우리는 확실히 절대악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절대악보다 나은 차악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달려 있다. 공식은 없다. 사람들은 대개 극우정당에 반대해서 중도좌파 정당에 투표한다. 때로는 극좌정당을 선택해서 선거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기권은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한다. 차악에 대한 선택은 현실을 감안하여 항상 어쩔수 없다는 판단을 토대로 한다. 단기적으로 덜 나쁜 악을 선택하는 것은 투표만 해당되지 않는다. 파업, 시위, 무장 투쟁에도 적용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이 덜 나쁜 것을 선택했다고 비난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사람도 역시 다른 종류의 덜 나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The second argument is this. No movement with a middle-run left agenda will have any chance of obtaining the popular support it needs if its advocates refuse to choose the lesser evil that meets the needs and expectations of the larger populace. People live in the short run, first of all. And most people are quite “realistic” about what they need here and now. No amount of promises about the middle run will wash with most people if their needs in the short run are ignored. Furthermore, we all have to be honest about the fact that we are choosing what we consider to be the lesser evil. We have in effect to say two things. It is the lesser evil for this or that reason. And choosing it, while necessary in the short run, will have no measurable effect on the middle run. We do not dance in the streets because our lesser evil choice prevails. We heave a sigh of relief, but that’s all.

두번째 제기는 이것이다. 중기적 관점의 좌파 운동은 만일 더 많은 대중들의 기대와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덜 나쁜 악을 거부한다면 그로인해 대중들의 지지를 더 얻을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단기적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현실적"이다. 만일 사람들의 단기적인 요구가 무시된다면, 중기적 관점에서 필요한 많은 과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확실한 건, 우리가 덜 나쁜 악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상 두 가지 경우를 말해야만 한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이대는 것은 바로 덜 나쁜 악 때문이다. 대책이라는 것은 단기간에 필요한 반면, 중기적 과제는 도중에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효과적인 평가수단이 없다. 덜 나쁜 악의 선택으로 인해 우리가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해도 거리에서 춤을 출수가 없다. 다만 절대악을 막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을 뿐이다. 그게 전부이다.


It is the middle run where the significant action concerning a left agenda is located. And strangely enough, it seems to me that the middle run is the arena that has been historically the most neglected in the discussions concerning left agendas. Action in the middle run is less exhilarating than debating the long run, and less seemingly active than action in the short run. The middle run involves a combination of continuous preparatory work (what is called political education) and constant pressures on the powerful (what is called the construction of movements) with a deep patience about seeing the fruition of all this work. Gramsci’s famous slogan, “pessimism of the intellect, optimism of the will” is exactly right. For the optimism pushes us to engage in what the pessimism tells us often seems to be and sometimes really is a Sisyphean task. As Eqbal Ahmad has commented:

좌파가 관심을 갖고 있는 대개의 중요한 문제는 중기적 관점의 것이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역사적으로 본다면 좌파진영에서 가장 무시된 문제가 중기적 주제들에 대한 것이라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중기적 관점의 실행 방침은 장기적인 것보다는 신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단기적인 것보다는 실행가능성이 많지 않다. 중기적 관점의 모든 계획들에 대해 결실을 보기 위해선 깊은 인내심과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압력(소위 운동의 구축)과 끈기있는 작업(소위 정치교육)을 결합해야 한다. Gramsci의 유명한 슬로건인 "지성적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는 정말 올바른 것이다. 낙관론은 비관론이 우리를 물들이고, 어떤 과제가 헛수고처럼 보일 때도 우리를 추동하는 힘이다. BavalAhmad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


“Pessimism of the intellect is a call to genuine realism in comprehending reality, and optimism is a call to commitment to the common good.”4

지성적 비관론은 실체를 이해하기 위한 진정한 사실주의 때문이며, 낙관론은 공익적 과제에 헌신하기 위해 필요하다.4)


The rules about the middle run are precisely the opposite of the rules about the short run. If in the short run, we are all into the business of compromises (many of them unsavory), in the middle run, we should make no unsavory compromises. We should push only for that which matters in terms of transforming the system, even if the rewards are not immediate. It is only by being truly militant that we can have any effect at all. Militancy requires realism too, but realism of a quite different kind than the choice of the short-run lesser evil.

중기적 과제들은 정확히 단기적 과제에 대한 규칙과 정반대이다. 단기적인 상태에서 우리는 모든 문제를 타협해야 하나(단기적 과제의 대부분의 일들이 타협 없이는 불가능하다), 중기적 과제들에 대해선 불만족스런 타협을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어떤 효과가 없더라도, 우리는 이런 경우에만 체제를 변화 시킬수 있다는 관점에서 추진할 수가 있다. 우리가 모든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효과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진정으로 투쟁적인 경우뿐일 것이다. 투쟁도 역시 구체적 사실주의를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단기적으로 덜 나쁜 악의 선택보다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사실주의를 요구한다.


Realism in comprehending reality includes both reading history (in particular, past efforts at transforming the world) and reading the impact of past history on the social psychology of both popular forces in general and activist cadres. We have lived through at least two hundred years of attempts to transform the world—either via what are called “revolutions” or via attempts to use the ballot box to vote oneself into power in the states and thereby legislate transformation. one cannot say that overall either of these strategies has been very successful.

구체적 현실을 이해하는 사실주의는 역사를 읽어내야 하고(특별히 지난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과거의 노력들), 과거역사에서 활동가들과 일반 대중 모두에게 힘을 발휘했던 사회심리학적 영향력을 읽어내야만 한다. 우리는 적어도 지난 200년간 소위 "혁명"을 통하건, 혹은 투표권을 행사하여 개혁적 입법을 시도하는 방식이건, 어쨌든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권력을 바꾸기 위해 노력 해왔다. 전체적으로 이중 어느 하나의 노선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There have been (quasi-)insurrectionary revolutions, some by movements calling themselves communist, some by so-called national liberation movements. And there have been countless political victories by noninsurrectionary social-democratic movements. It is difficult to consider that either kind of attempt has succeeded in transforming the world. This is not to say that they haven’t accomplished some positive things. They have quite often been in the short run the lesser evil. But we no longer dance in the streets, retrospectively, because of either kind of victories. Or at least, most of us do not. And today, in the twenty-first century, the number of persons who put their faith in these essentially nineteenth-century strategies is rather small.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부르는 사람들이나 혹은 소위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 혁명적 반란이 있었다. 또한 반란으로 인정할 수 없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도 셀수 없는 정치적 승리가 있었다. 이런 시도 중에 어느 쪽도 세상을 변화 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운동의 결과 어떤 긍정적인 성과가 없어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단기적 관점에서 운동은 덜 나쁜 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사실 승리도 아니었기에 더 이상 거리에서 춤을 추지도 못하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 대부분은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21 세기에 당도한 오늘날에는 본질적으로 19 세기형 전략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The turning point in my view in perceptions of workable strategies was the world revolution of 1968. It seems to me that the revolutionaries—whether in the pan-European world, in the erstwhile socialist bloc, or in the South— were all expressing their deep skepticism about the success of these strategies and about their viability for future success. They were not rejecting the utopias of the long run. They were rather calling for a new look at strategies for the middle run. In the years since 1968, there has been much debate about such strategies. This debate has suffered from the failure to distinguish explicitly between the three time frames I have suggested as essential for clear thinking. It is only with the creation of the WSF in 2001 that there has come into existence a structure within which an alternative strategy for the middle run may possibly be developed.

실행 가능한 전략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은 1968년의 세계 혁명이었다. 이전 사회주의 블록을 포함한 전 유럽 세계에서, 또 남반부의 혁명가들은 미래 성공의 가능성에 대해 혹은 19세기형 전략의 성공에 대해 상당히 깊은 회의를 표명하고 있었다. 장기적 관점의 전략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롭게 중기적 관점의 전략을 요구했다. 1968년 이래로, 중기적 전략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논쟁은 분명한 판단을 위해 필자가 제시한 세 개의 프레임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다. 현재의 구조에서 많은 중기적 대안전략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2001년에 WSF를 창설한 것 때문이다.


The WSF is a very strange kind of organization, if it can be called an organization at all. It claims to be a “horizontal” structure. It says that its basic principle is that it is an “open space.” The term “horizontal” is used in opposition to the term “vertical.” The argument is that the major national and international organizations of the nineteenth and twentieth centuries were all “vertical” in that they were hierarchical structures, with bureaucracies and officers, with official statements of political position, and with members. The various organizations might have differed in the degree of discipline that prevailed within them and in the degree of internal collective debate they permitted, but they all were political organizations dedicated to some kind of action in the political arena.

WSF는 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주 낯선 조직이다. ‘수평적’구조를 주장한다. 기본 원칙을 ‘열린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수평적’이라는 용어는 ‘수직적’이라는 용어의 반대말이다. 그들은 19세기나 20세기 대다수 국가조직이나 국제조직은 구성원들 간에, 혹은 정치적 위상의 공식적 직위로 인해, 관료들 내에서 위계구조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내부 집단 토론의 수준에 차이가 있거나, 혹은 내부적으로 인정한 원칙 차원에서 다양한 입장을 갖고 있는 여러 조직들이었지만, 그들 모두는 정치 영역에서 일정한 실천을 하기 위한 정치조직이었다.

These vertical organizations had a second feature. They insisted on a loyalty that took precedence over anyother loyalty, and laid claim to primacy in the political arena. If there were other organizations with specific agendas (say, women’s or youth organizations, or peace movements), these organizations were considered legitimate by the general vertical organization only if they placed themselves within its fold as a subordinate and specialized group. The primacy of such general vertical organizations implied that their relations with any other organization in the same geographical arena, but not in their fold, could at most be one of temporary tactical alliance.

수직적 위계구조를 갖고 있는 조직에는 두 번째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것에 우선하는 충성심을 주장했고, 정치활동을 최우선 순위에 놓았다. 만일 구체적인 문제를(예: 여성 또는 청년 단체, 또는 평화 운동)우선하는 다른 조직들이 있다면, 이러한 조직은 하위 그룹이거나 전문 집단으로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 수직적 위계 상태에 있을 때만 정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일반적인 수직적 위계 조직의 최우선 순위는 같은 지정학적 범위 내에 있으나 범주가 다른 조직으로, 대부분 일시적인 전술적 동맹 관계를 의미했다.


As opposed to this mode of organization, the WSF as a horizontal structure is constructed as an open forum. That is, it is a structure without officers, without (or with only a skeleton) bureaucracy, with no public proclamation of political positions, and with open and constant debate. As a result, it claims to be inclusive of everyone. Well, not quite everyone. The WSF defined itself as a meeting ground of all those who rejected “neoliberal globalization and imperialism in all its forms.” It also excluded, at least in theory, political parties and armed movements. These specifications constituted to be sure a political position, but it was a very loose one, and by virtue of its horizontal nature the WSF has very little control over who actually attends its meetings.

이러한 조직유형과는 달리, 수평적 구조로서의 WSF는 개방형 포럼을 구축했다. 즉, 관료나 조직일꾼이 없는 구조를 두면서, 정치적 입장에 대한 공개적 선언 없이, 공개적이고 일관성 있는 토론을 펼치는 조직이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은 아니었다. WSF는 스스로 "모든 형태의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규정했다. WSF는 최소한 이론적인 학술운동, 정치정당, 무장투쟁 운동을 배제했지만 상당히 느슨했으며, 수평적 본질이라는 가치로 인하여 누가 실제로 회의에 참가하는지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갖지 못 했다.


What was the point of such a curious animal? The argument went as follows. The WSF was permitting all organizations that wanted basic change in the world-system to assemble together, to exchange views with each other, to learn from each other, and perhaps above all to learn to tolerate each other. The organizations might be international, continental, regional, national, or local. The discussions would take place within a multitude of large and small sessions which, by the third WSF meeting, were all organized from the base up. That is, any organization, alone or in conjunction with others, could organize a session on any theme it thought important, choose the speakers or panelists, and invite all and sundry to attend.

이런 식으로 강한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동물(조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WSF는 다른 사람과 생각을 교환하면서, 서로에게서 배우는, 무엇보다 서로 인정하기를 배우기 위해 함께 모이면서, 세계 체제를 바꾸기 원하는 모든 조직의 참여를 허용했다. 조직은 국제적일 수도 있고, 대륙, 지역, 국가 또는 지역일 수도 있다. 3차 WSF대회의 경우, 토론은 크고 작은 다양한 세션에서 행해졌으며, 모든 것은 아래로부터 조직되었다. 즉, 어떤 조직이라도 단독으로 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로 세션을 구성하고, 발표자나 패널리스트를 선택하고 모든 사람을 초대 할 수 있었다.


What has been the outcome of this kind of structure? The first outcome has been its replication at other levels. There now have been convened countless continental, regional, national, and local social forums, as well as socalled thematic forums. These other forums have all been self-organized and have not needed the permission of the worldwide WSF to do what they wished to do. It was assumed that they would all be horizontal open spaces. And most, if not all, have replicated the organizational model.

이런 유형의 조직구조는 어떤 결과를 산출했는가? 첫 번째 결과는 여러 다양한 차원의 복제였다. 소위 주제별 포럼만이 아니라, 수많은 대륙, 지역, 국가 및 지역 사회에서 포럼을 통한 모임이 발생했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 조직했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전 세계 WSF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수평적인 열린 공간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이런 유형의 조직 모델을 모방했다.


The second outcome has been the geographical widening of participation in the worldwide WSF itself, as well as an increase in the numbers of persons who actually attend. The first WSF was largely Latin American and West European in composition, and some ten thousand persons came. Successive ones have come to involve participants from North America, South Asia, East Asia, and Africa, and the numbers have gone as high as two hundred thousand. There are still nonetheless geographic gaps—inadequate participation from East-Central Europe, Russia, and China. But the circle has been steadily widening.

두번째 결과는 전 세계 WSF자체에 참여하는 지역의 확대만이 아니라, 실제로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다. 처음에 WSF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와 서부 유럽 연합이었고, 약 1만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다음에는 놀랍게도 북 아메리카, 남아시아, 동 아시아, 아프리카의 참가자들이 대거 참여하였으며, 그 숫자는 무려 200만 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중부 유럽, 러시아, 중국으로부터의 지리적 격차 - 부적절한 참여는 여전하다. 그러나 참여 폭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The third outcome has been a continual improvement in the way the worldwide WSF has been organized—the organization of panels from the base up (as I mentioned), the increased transparency of how the inevitable organizational decisions are being made, and the creation of explicit spaces for “networks” of organizations to meet and to organize joint activities.

세 번째 결과는 전 세계 WSF의 조직 방식의 지속적인 개선이다. - (위에서 언급 한 대로)밑으로부터의 패널의 조직, 필수적인 조직의 의사 결정 방식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며, 조직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공동 작업을 조직하기 위한 명확한 공간의 창출이 있었다.


The WSF is a tumultuous arena—less because of political differences than because of arguments about strategy. There have been, from the beginning, those who chafed at the horizontality of the structure. At the least, some feel, it has been exaggeratedly horizontal. They have said that the WSF must do more than “talk” it must act. And for many persons, action means moving in the direction of verticality—explicit political stances and explicit organization of political actions. Those who have resisted this demand have said that inevitably this means that, like all the previous “internationals,” the WSF would then move toward exclusions, and would thus fall into the strategy that, in their view, has so manifestly failed historically.

WSF는 정치적 견해차이 보다는 전략에 대한 논쟁 때문에 언제나 소란스럽다. 떠들썩하다. 처음엔 수평적 조직구조에 대해 짜증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적어도 일부 사람들은 너무 지나치게 수평적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WSF가 말보다는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행동이란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갖고 확실한 정치행위를 하는 조직으로 노선 수정을 의미했다. 조직 노선의 변경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전의 모든 "국제"조직들처럼 역사적으로 명백히 실패했던 경험, 즉 WSF가 운동과정에서 일부를 배제할 수밖에 없고 결국 전략적 실패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느꼈다.


The debate has been continuous and strong, if not yet acrimonious. And there seems to be emerging a compromise solution—keeping the WSF itself an open forum, while permitting specific networks to function within it, networks that would in fact take positions and organize political activity. I am not sure what will be the outcome of this debate, and whether or not the WSF will continue to be the central locus of world left activity or become what one person has suggested has been merely a “moment” in the history of world left activity. I think that, rather than trying to predict or prescribe a future for the WSF , it would be more to the point to discuss what kinds of political activity would in fact be meaningful in the middle run.

논쟁은 강력하게 지속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WSF 자체를 공개 포럼으로 유지하고, 특정 네트워크가 그 안에서 기능 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실제로 정치적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타협적 해결책이 제기되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로서는 논쟁의 결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WSF가 세계 좌파 활동의 중심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한 사람이 제안한 세계 좌파의 역사에서 단지 "순간"에 불과할 것인지의 여부를 확신하지 못한다. 오히려 WSF의 미래를 예언하거나 처방하려는 것 보다는, 사실상 중기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의 정치 활동이 실제로 의미가 있는지 토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When I speak of the two opposing camps in the struggle to determine the outcome of the bifurcation as that of the spirit of Davos and that of the spirit of Porto Alegre, I mean something quite specific. Davos, or the World Economic Forum, has been meeting since 1971, which is just after the world revolution of 1968. It seeks to bring together the elite of the world-system—capitalists, political leaders, major media figures, politically-conscious celebrities, and establishment intellectuals. It too is an open forum of sorts and, especially recently, the debates within it have been at least as strong as those within the WSF . The spirit of Davos is to preserve a world that is hierarchical and inegalitarian. And to the degree that capitalism as a system can no longer guarantee those principles, the more sophisticated of its members are clearly ready to envisage alternative systems. Neither private enterprise nor economic growth constitutes the bottom line, only political, economic, and cultural guarantees for the upper strata of the world-system. The spirit of Porto Alegre is precisely the opposite. The spirit of Porto Alegre incarnates today what we can possibly mean by the world left.

다 보스와 포르토 알레그레 정신이라는 두 갈래 과정에서 투쟁하고 있는 두개의 반대진영에 대해 언급할 때, 필자는 1968 년 세계 혁명 직후인 1971년에 설립한 다 보스 혹은 세계 경제 포럼 (World Economic Forum)은 대단히 제한적인 것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다 보스의 이념은 세계 체제의 자본가, 정치 지도자, 주요 언론계 인사, 정치의식이 뛰어나고 잘 알려진 지식인 등의 엘리트들이 주장한다. 다보스 또한 일종의 공개포럼이며, 특별히 최근에는 WSF만큼 강력한 내부 토론도 있었다. 다 보스의 이념은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세계를 보존하는 것이다. 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더 이상 그런 구조를 보장 할 수없는 정도까지 와 있는 상황에서, 향후 어떤 대안 체제를 준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회원들이 더 정교한 토론을 진행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 기업이나 경제 성장이 토대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체제의 상층 계급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보장이 더 이상 어렵다는 것이다. 포르토 알레그레의 정신은 정반대이다. 포르투 알레그레 (Porto Alegre)의 정신은 세계좌파가 주장해 왔던 것을 세계 속에 구현하고자 한다.


If we want a world that is relatively democratic and relatively egalitarian, then we must build it, or the likelihood of achieving it, by pushing for more democratization and more egalitarianism. Let’s look at each of these concepts. Democracy means in terms of its etymological origins “rule by the populace.” The populace is not a specific group within it; it is supposed to mean everyone. And whatever goes on today, it is hard to say that the political decisions that are made are made as a reflection of the will of everyone, or even of a majority of the people. We have representative parliamentary systems at best, in which the voters (who are usually defined in some way as less than the whole adult populace) choose, every x-number of years, a small group of people who make decisions as they think preferable, bearing in mind most often the likelihood that they can be re-elected—for which, as we know, they need among other things much money.

만일 보다 민주적이며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면, 그것을 건설하거나 혹은 좀 더 민주적이고 좀 더 평등한 정책들을 제시하여 최소한 가능성이라도 확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민주나 평등에 대한 각각의 개념을 검토해보자. 민주주의는 “대중의 지배”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대중은 특정 그룹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오늘날 시행된 정치적 결정에 대해선 누가 뭐라 하건 간에, 모든 사람의 의지를 반영했거나, 혹은 절대 다수를 포함한다고는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기껏해야 대의제 의회 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유권자 (일반적으로 성인 인구 전체보다 적다)는 매번 자신이 선호한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선택하고 있으나,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재선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여러 영역들에서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Now what would push in another direction? It is quite obvious that organizing those that have been historically left out of the equation is an essential element of doing this. And of course, particularly in the last forty years or so, there has been a lot of this—organizing women, ethno-racial and religious understrata, sexual and agebased understrata, and indigenous peoples. But there has not been nearly enough of such building of social movements. To the extent that such groups speak loudly and make their voice felt, it weakens the existing undemocratic political structures within which we live. And this in turn strengthens the social psychological resolve of these groups. This is generally what is subsumed in the word empowerment.

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갈수도 있는가? 역사적으로 남겨진 핵심적인 과제들의 해결을 위해 우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지난 40년간 여성, 인종, 종교, 성별, 연령, 그리고 원주민들의 영역에서 많은 차별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영역에서 충분한 사회운동을 건설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들 집단의 주장이 더 강해져서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때에만 현존하는 비민주적 정치 구조가 약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결국 이러한 집단들의 사회 심리적 결정을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 집단에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Now there is an obvious danger here. one is that these groups will count their achievements in terms of admission of their particular group to high political posts rather than in greater voice for the demos as a whole. And the second is that there will be a competition of the oppressed with each other, each demanding its partial voice at the expense of or prior to the achievement of partial voice by other understrata. It is only by solid alliances at the local level of these various groups that one can effectively wear away at existing monopolization of social and political power by dominant groups.

여기엔 명백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첫째는 이들 그룹이 전체적으로 일반 대중들의 염원을 더 반영하기 보다는 특정 그룹의 정치적 지위 상승 조치를 운동의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각 그룹이 다른 기층 민중들의 영역보다 자신들의 문제를 우선시 한다거나 혹은 다른 그룹의 희생을 요구하는 형태로 피억압 그룹들 상호간에 경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지배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 정치적 독점화를 잠식하기 위해선 기층 민중 그룹들이 지역적 수준에서 강고한 동맹이 있을 때에 만 가능할 것이다.


The “majority” has to be expanded and become more inclusive across the board. Strangely enough, it is by defending the rights to socio-cultural autonomy (which may also be socio-political autonomy) of the various understrata that the majority can really be expanded. And this can only really be done to the degree that the members of any particular understratum question the often obscure and hidden decision making of their own leadership.

"다수"라는 의미는 참여하는 세력이 더 포괄적이어야 하고, 또 확장되어야만 충족할 수 있다. 얼핏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수라는 영역이 실제로 확장되기 위해선 다양한 기층 민중의 사회문화적 자주권을 옹호하는 것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 그룹의 민중 계급 구성원들이 종종 자신들의 지도부가 내린 애매모호하고 어떤 은폐된 결정 내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Of course, none of this is easy and the shoals are many. That is why any kind of overall vertical structure is inherently self-defeating. What is needed is thousands of constant local actions by multiple different groups. It is in this way and this way only that undermining the pseudo-legitimation of the existing structure can be achieved. This has been the principal virtue up to now of the WSF . But of course the world of the WSF has been manifestly insufficient.

물론,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쉬운 것이 없고, 함정은 많다. 이점이 바로 전체적으로 수직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조직이 본질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그룹들이 일상적으로 수천 번 실천하는 것이다. 기존 조직들이 갖고 있는 거짓 정통성을 폭로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 WSF의 주요 장점은 바로 이점 이었다. 하지만 물론 세계적으로 WSF는 아직 불충분하다.


What these groups are fighting for is a realistic definition of rights—all those rights enshrined in the multiple liberal constitutions that today almost every country has enacted, and which are constantly ignored, abraded, or violated outright—by the legislatures, executive powers, and the very judiciary that is supposed to defend and enforce them. What is called for is pressure, more pressure, uncompromising pressure for all those rights that theoretically have already been acquired. And then pressure, more pressure, uncompromising pressure for whatever rights are not yet enshrined in these documents.

이들 세력이 싸우고 있는 것은 실제적인 권리 때문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가 다양한 자유주의 헌법 제정을 통해 명시한 바로 그 권리에 대해 각국의 입법부, 행정부를 비롯해서 심지어 권리를 적용하거나 수호해야 할 사법부조차도 끊임없이 무시하거나 훼손, 침해하고 있다. 소위 압박, 더 많은 압박, 이론적으론 이미 수립된 모든 권리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압박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각국의 헌법에 규정되지 못한 권리에 대해 다시 압박, 또 더 많은 압박, 타협하지 않는 압박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Of course, this involves loading and overloading the demands for distribution. This is where the egalitarian thrust comes in. The basic egalitarian demands over the past two centuries have been for (1) education, seen as the route to rewarding and rewarded work; (2) health services, seen as the prevention, care, and cure of biological malfunctioning; and (3) lifetime income guarantees, seen as the maintenance of a lifelong level of decent income, from infancy to very old age. What the left wants is more of each, and more of each now, at the social expense of other expenditures.

물론, 이것은 분배에 대한 요구를 제기하고, 또 제기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것이 바로 평등 운동의 추진력이다. 지난 2세기 동안 평등 운동의 기본적인 요구는 1)교육 ; 소득을 보장받거나 보장하는 수단, 2) 보건의료 ; 예방과 돌봄, 생물학적 질병에 대한 치료, 3) 평생 소득 보장 ; 유아기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평생 동안 적절한 소득의 유지에 있었다. 이제 좌파가 원하는 것은 개별 영역에 더 많은 지출을, 다른 지출의 사회적 비용으로서 좀더 많은 개별 사안에 대한 지출이다.


To come anywhere even near this requires not merely redistribution of existing wealth but change in the perceived social priorities of expenditure. It is here that the demands must be raised concerning geopolitics, peace, ecology—all of which have movements that push these concerns. But if these movements do not integrate their demands with the basic underlying egalitarian thrusts that are located in the popular movements, and even more in the popular subconsciousness, then these movements are not helpful.

이러한 요구가 우리 근처에라도 올 수 있으려면 부의 재분배보다는 지출의 사회적 우선순위를 변경해야 한다. 우리의 요구는 국제정치, 평화, 환경문제 해결을 바로 우리 각자가 있는 곳에서 강화시켜야 하며, 이러한 문제를 추진하는 운동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운동이 대중운동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평등 요구와 결합하지 못한다면, 혹은 대중들의 잠재의식 속에 좀 더 파고들지 못한다면, 운동 자체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And here we come to a crucial variable—the ideology of growth as opposed to the ideology of plausible and sufficient distribution. Unbridled growth is not a solution to our dilemmas but probably the primary cause of them. And questioning the ideology of growth is a central element in realistic middle-run organizing.

그리고 이제 우리는 여기서 결정적인 변수에 도달한다. 충분하고 타당한 분배의 이데올로기와 대립하고 있는 성장의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멈출 줄 모르는 성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처해있는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라기보다는 핵심 원인이다. 성장 이데올로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현실적인 중기적 관점에서 문제를 조직하는 데 핵심 요소이다.


Are there other things we can do? No doubt. In a previous discussion of a left political agenda, I suggested such tactics as making the liberal center fulfill its own theoretical premises, making anti-racism a defining feature of democracy, and moving to the degree that we can towards the decommodification of activities now commodified as well as preventing the commodification of things we have traditionally considered non-commodifiable (such as access to water, or human reproduction).6 What is important about each of these is the strong organized push in these directions. Even if this doesn’t accomplish immediately their realization, it affects the overall political ambiance and therefore the balance of power. It makes more possible tipping the bifurcation in the direction we want.

우리가 할 수있는 다른 일들이 있겠는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전 좌파의 정치 과제 논의에서 필자는 전통적으로 상품화 배제 영역(식수 문제나 사람의 재생산과 관계된 문제)으로 인정해 왔던 영역이 상품화가 되는 것을 방지해야할 뿐만 아니라, 현재 상품화된 영역의 탈 상품화를 향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운동할 것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보다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이며, 개혁적 진보(리버럴)의 핵심영역을 지탱하는 이론적인 전제를 만들기 위한 전술운동을 제안한 바 있다.6) 각각의 문제들에 대해 이런 방향으로 밀고나갈 강력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조직을 즉각적으로 결성하지 못하더라도, 전체적인 정치적 분위기와 권력의 균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런 노력이 현재 두 갈래로 나눠진 길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더 쉽게 조정 할 수 있게 만든다.


Personally, I learn each day of other things that various groups are suggesting or trying out or getting ready to try out. The organizational imagination of the multiple understrata of the world-system is quite considerable, provided that we don’t act ourselves to suppress it. It is hard for activists to allow themselves to be advised by the demos whom they tend to consider to be too passivist and inadequately politically informed. But if we awaken the sleeping giant, it might turn out to be a very constructive sleeping giant.

개인적으로, 필자는 여러 그룹이 제안하거나, 시도하거나 시도 할 준비가 되어있는 다양한 내용들을 매일 배운다. 세계 체제의 다양한 기층 민중들의 조직적 상상력은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나치게 비관적이면서, 정치적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활동가들이 대중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잠자는 거인을 깨우면 매우 건설적인 잠자는 거인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The middle run is an arena of political struggle, in reality of class struggle—provided we have a relevant understanding of who and what are the classes in struggle. Class is more than a matter of occupation or wealth or mode of remuneration for work. Race, gender, and ethnicity are not separate elements from class, nor are they substitute analytic entities. Race, gender, and ethnicity all constitute part of the complex social composition of the classes. But once class is thus redefined, we are indeed in a class struggle. And this is why it makes no political sense at all, for example, for a structure like the WSF to enter into discussions, debates, and social compromises with the components of the World Economic Forum at Davos. We are not searching for the lesser evil here. We are in a struggle over the transition to a different world-system.

중기적 실천은 투쟁하는 계급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 지에 대해 적절하게 이해하는 계급투쟁의 실체 속에 놓여있는 정치투쟁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계급은 직업이나 부의 문제 혹은 보수로 나타나는 유형 이상의 것이다. 인종, 성별 및 민족은 계급과 별개의 요소가 아니며 계급을 대신할 수 있는 분석 주체도 아니다. 인종, 성별, 민족은 모두 계급의 복잡한 사회 구성의 일부를 구성한다. 일단 이런 식으로 계급을 새롭게 정의 하면, 우리는 실제로 계급투쟁 속에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예컨대 WSF와 같은 조직이 다 보스에서 열리는 세계 경제 포럼 (World Economic Forum)의 핵심 구성원들과 사회적 타협이나, 논쟁, 토론에 참여할 경우 어떤 정치적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중기적 실천에서 우리는 덜 나쁜 악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 체제를 다르게 변화하기 위한 투쟁 속에 있는 것이다.


So let me try to resume my imagery of what it is we have to do to achieve a left political agenda. We have to define the long-time objectives in meaningful but still very general terms. We do not have, and cannot have, a precise idea of appropriate structures for the better world-system we want to construct. And we shouldn’t pretend that we have. That was one of the great historic virtues of Marx. He never claimed he could design what the “communist” world would actually look like in institutional terms.

이리하여 좌파의 정치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필자의 생각을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는 의미있는 장기간의 목표들을 여전히 매우 일반적인 용어로 정의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고자하는 보다 나은 세계체제를 위한 적절한 구조에 대해 사실 정확한 설계도를 갖고 있거나 가능성이 없다. 아울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맑스의 위대한 역사적 덕목 중 하나였다. 그는 ‘공산주의’세계가 실제로 어떤 제도적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설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As for the short run, we have to keep in the forefront of our minds that there is never anything but the lesser evil. And we have to be ready to participate at all moments in pursuing the lesser evil, as it is defined by the oppressed populations of the world. If we do not, we shall have the greater evil, and there always is a greater evil. Work in the short run is primarily defensive. It is to keep things from getting worse. It is to preserve gains already achieved.

단기적 실천의 경우는, 덜 나쁜 악을 늘 염두에 두어야 만 한다. 세계의 피억압 대중들이 규정했던 바와 같이, 보다 덜 나쁜 악을 추구하는 모든 순간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큰 악을 지니게 될 것이고, 항상 더 큰 악이 존재할 것이다. 단기적 실천은 기본적으로 방어적 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일이 점점 악화되는 것을 막고, 이미 달성 된 이익을 보전할 뿐이다.


But, most important of all, we must remember that in the middle run, the next twenty-five years, we are living in a time of transition. In this transition, the issue is no longer whether or not we want to sustain a capitalist system, but what will replace it. And we have to work very hard, and very uncompromisingly, to push in the direction of a more democratic and more egalitarian world-system. We cannot construct such a system in this middle run. What we can do is to make possible the multiple political activities that will end up tilting the balance against a richer, better organized, and far less virtuous group—those who wish to maintain or even reinforce another variant of the hierarchical, polarizing systems we have had heretofore. Their system will not be capitalism; it would probably be worse.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향후 25 년 동안 우리가 이행기에 살고 있다는 점을 중기적 관점에서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행기의 문제는 더 이상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더 열심히, 더 비타협적으로,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평등한 세계 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 중기적 실천에서는 그런 체제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다양한 정치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존속해 왔던 양극화 체제나 위계적 체제의 또 다른 변종들을 통해 기득권을 강화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지금보다 더 줄어들게 하고, 조직을 더 강화해서 결국에는 부자들에 맞선 균형을 이루어 내야 한다. 이런 체제는 자본주의가 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We have to remember finally that the outcome of the struggle during the present chaotic transition is not in any fashion inevitable. It will be fashioned by the totality of the actions of everyone on all sides. We have only a fiftyfifty chance of prevailing. one can define fifty-fifty as unfortunately low. I define it as a great opportunity, which we should not fail to try to seize.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현 단계 혼란스러운 이행기 과정에서 투쟁의 결과물이 어떤 예측 가능한 유형의 것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모든 측면에서 모든 사람들의 실천으로 달성하는 총체성이 그나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형일 것이다. 다만 가능성은 50대50이다. 50대50이라는 것은 한쪽에서 보면 대단히 낮은 확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에게 가능성이 절반이나 되는 위대한 기회로 정의하고자 한다.


Notes

1. I say “never written” although there exists on the Web a short item called “personal is political autobiography” and in his “online essays and other archives,” there is a section called “autobiographical essays” which contains ten items. But there is no full-fledged autobiography.

2. See “The Global Possibilities, 1990–2025,” in Terence K. Hopkins and Immanuel Wallerstein, coords., The Age of Transition: Trajectory of the World-System, 1945–2002 (London: Zed, 1997), 226–43; “The Modern World-System in Crisis: Bifurcation, Chaos, and Choices,” chapter 5 of Immanuel Wallerstein, World-Systems Analysis: An Introduction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04), 76–90.

3. I use these terms in the sense that was given to them by Ilya Prigogine. See his The End of Certainty: Time, Chaos, and the New Laws of Nature (New York: Free Press, 1996).

4. Eqbal Ahmad, Confronting Empire: Interviews with David Barsamian (Cambridge, MA: South End Press, 2002), 152.

5. I have argued this in detail in my Utopistics: Or, Historical Choices for the Twenty-First Century (New York: New Press, 1998), especially chapter 1.

6. Immanuel Wallerstein, “A Left Politics in a Time of Transition,” Monthly Review (January 2002): 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