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

파랑새호 2019. 2. 23. 12:50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일본공산당의 후와테츠조(不破哲三)입니다. 저는 외국에서 학술강연을 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회과학원에서 다양한 분양의 이론연구에 힘쓰고있는 여러분들 앞에서 이런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정말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중국에서는 십년 전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시장경제라는 방침을 결정했지만, 그 이전부터 이런 문제에 실천적으로 참여해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라는 길을 탐구하시고 있습니다.

저희 일본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일본공산당은 장차 일정한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을 전망합니다. 이 길은 당연히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혹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혼합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세계사 속에서 새롭게 발전한 문제도 있고, 또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문제도 있습니다.

 

레닌은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문제에 도전한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

저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앞서 언급한 레닌과 자본론이라는 연구를 한 바 있으며, 잡지에 3년간에 걸쳐 40회 정도 연재를 했습니다. 이것은 레닌의 이론적인 활동 전체를 청년시대부터 사망할 때까지 평생에 걸친 추적연구였습니다.

그런 레닌이 1921년부터 질병으로 쓰러진 1923년까지 마지막 3년간에 참여했던 이론적인 문제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이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문제였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물론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자이고 대선배였지만, 사회주의 건설 문제에서 대두하는 현실적인 과제에 참여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론의 문제로서도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씨름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레닌은 이런 문제에 도전한 최초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이런 도전을 통해서 레닌은 다양한 고민을 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180도 뒤집는 대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앞서간 선배들의 이런 고통스러운 활동과정을 통해 현대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혁명 후 초기에 레닌은 시장경제 부정론자였다.

레닌의 활동을 돌아보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 10월혁명이 성공했을 때, 레닌의 머릿속에는 시장경제의 활용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주의가 시장경제와는 양립할 수 없고, 이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혁명후의 경제건설에도 이런 생각이었습니다. 특히 외국의 간섭과 반혁명에 반대하는 전쟁 중에 이런 경향은 상당이 강했습니다. 당시 레닌이 생각했던 공산주의 경제라는 것은 공업제품은 국영공장에서 만들고 곡물은 농민이 생산하지만, 농민이 먹어야 할 분량 이외의 잉여는 모두 국가가 수매해서, 국가의 주도하에 국민에게 배급한다. 이것이 공산주의 경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재는 전쟁으로 고생하지만, 그러나 이런 길을 추진한다면 결국에는 자국 공업도 발전하고, 농민에게도 국가 트렉터나 비료 등 필요한 물자를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시장경제라든가 판매의 자유등은 사회주의 건설의 적, 반혁명의 슬로건으로 간주했고, 시장경제에 익숙한 국민, 특히 농민들의 머리에서 시장경제가 괜찮다.”는 생각을 근절하는 것이 공산당의 최대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전시공산주의라고 명명했던 시기로서 1921년 초반까지 지속했습니다.

 

신경제정책” - 농민과의 관계 개선을 지향한 탐구와 결단

그러나 이런 방침은 현실 사회에서 상당히 큰 모순에 직면했습니다. 반혁명이나 외국 군대의 간섭으로 인한 전쟁때에는 농민도 일정하게 고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간섭과 반혁명을 일단 극복하고 평화가 찾아오자 농민의 불만은 급증하고, 일부 농민은 폭동도 일으켰습니다. 당시 수도였던 레닌그라드 가까이에 크론슈타트(Kronstadt)라는 해군기지가 있었으며, 이곳이 혁명의 거점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곳에서 혁명적인 해군병사들 까지 반란에 가담했고, 이러한 반란 과정에서 상업의 자유” “거래의 자유가 절박한 요구사항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 지도자 중에서 이런 위기사태의 심각성을 가장 절박하게 바라 본 사람이 레닌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사회주의 정권과 농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농민 동맹이 필수적이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시기의 레닌의 발언이나 논문에는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흔적이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레닌에게도 지금까지 시장경제라고하면 반혁명의 슬로건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까지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정책은 신경제정책(네프)”라고 부르면서 19213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지금 네프라고 한다면 시장경제를 인정한 것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합니다만, 이것은 부정확합니다. 레닌의 경우 처음에는 대전환을 내걸었지만, 그렇게 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시장경제를 빼고 개혁의 방향은 없는 것인가 생각하면서. “생산물 교환”, 즉 농촌의 생산물인 곡물과 도시의 생산물인 공업제품과의 물물교환 방법을 제기하였고, 결정을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의 모색을 반년 정도 지속하다가, 이 외의 다른 방법은 없는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 192110월이었습니다. 레닌이라해도 이만큼 고민한 상태에서 결국 결론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발표할 때에 당내에서 큰 소동이 있었습니다.

[레닌 전집]에는 이 시기에 있었던 회의기록 레닌의 보고와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당연히 소란이 있었고,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동지는 우리는 감옥에서 상업을 하도록 배우지 않았다.”고 발언했습니다. 어떤 동지는 장사같은 불유쾌한 업무를 공산주의자가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주장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린 레닌은 불유쾌한 과제에 직면했다고 해도 과제를 회피하거나 낙담하는 것은 혁명가에게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설득하기 위한 비판을 지속했습니다.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노선의 확립

시장경제에 대한 문제 탐구는 이렇게 시작했던 것입니다. 즉 러시아 혁명 중에 시장경제론의 출발점이 된 것은 농민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레닌은 이런 길에 들어선 이후에는 지엽적인 문제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즉각 이 문제를 보다 더 철저하게 연구해서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 운명이 걸린 큰 방침, “시장경제를 통해 사회주의로라는 방침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당시 문서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완전한 반전이었습니다. 이런 방침을 정리해보면 대체로 방침의 골격에는 다음과 같은 점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시장경제를 무대로 자본주의와 경쟁해도 지지 않는 사회주의부문을 만들어 발전시키는 것을 지향하는 문제입니다. ‘부문이라는 것에 대해 레닌은 우클라드라는 러시아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에 딱 들어맞는 말이 일본어에도 놀랍게도 중국어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알기 쉽게 부문으로 표현했습니다.

 

둘째는 시장경제 속에서 민간 자본주의가 태어나 발전하는 것도, 이로 인하여 외국 자본주의가 협정을 체결하여 들어오는 것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인정하기 때문에, 이것도 대단히 중대한 전환입니다.

이전 시기에 시장경제는 적으로서 삼았던 근거중의 하나가 시장경제를 인정하면 당면 문제가 소생산자의 소규모 상품생산입니다. 그중에서 반드시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것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 러시아 혁명의 논리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경제 전체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사회주의 부문으로서 확실하게 확보해 놓는다는 것입니다. 핵심을 이루는 부문에 대해 레닌은 감제고지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군사용어로서 대포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높은 고지에서 전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을 점령하는 것이 승패의 관건이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2년 전에 일본공산당 대회를 개최했을 때, 외국 내빈 중에 스리랑카에서 IT장관이 왔습니다. 그 분과 이야기를 해보니 우리들은 경제의 감제고지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놀랬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리운 단어를 들었다.”고 웃었더니, 실은 청년시절에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했었다고 답변했습니다.

 

넷째로 사회주의 부문이 경제적인 힘을 강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로부터 배우는 것, 흡수가능한 선진적인 것은 철저하게 흡수하겠다는 문제입니다.

 

다섯째 농민과의 관계에서는 공업력의 발전과 함께, 장차 협동조합화를 지향했지만, 그때 위에서의 명령이나 강제력 행사는 절대 금지하였습니다. 협동조합은 농민의 자발적인 의사로서 만든다는 자발성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레닌의 노선은 추진되지 못하고, 사후 5년 정도 만에 중단.

레닌은 이런 방침을 확립하고 15개월 후, 19233월에 병으로 누웠으며 이후 정무에는 복귀하지 못한 채, 19241월에 사망했습니다. 레닌이후 시기에 소련의 당과 정부의 지도권을 장악했던 스탈린은 1929년부터 30년대 초반에 걸쳐 농민에게 곡물을 강제로 확보하기 위해 소위 농업집단화를 강행했습니다.

원래 농민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신경제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위에서 명령으로 시행하는 농업집단화신경제정책의 사실상의 종결선언이었습니다. 이후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의 방침은 소련에서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수십년 후 고르바초프 시대에 시장경제의 도입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60년간 소련 자체의 모습이 변해버렸습니다. 스탈린 시대와 이후 시대 속에서 체제의 큰 변화를 추진했고, 소련사회는 이미 사회주의도, 사회주의를 향한 방향도 존재하지 않는 체제로 변질되어버렸습니다.

 

누구도 아직 가보지 못했던 길

이런 의미에서 중국이나 베트남이 현재 도전하고 있는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라는 길은 세계사 과정에서 아직 어떤 국가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올해 7월에 일본공산당 창립 80주년 기념강연에서 21세기에 세계를 진보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세계를 추동하는 21세기의 큰 힘의 하나로서 여러분들의 도전을 언급했고, 다음과 같은 의미를 규정했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소련은 망했지만, 레닌의 이름이 걸린 사회주의 사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중국, 베트남, 쿠바 등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새로운 사업에 참여하는 국가들이 현재 존재하고 있다. 이들 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라는 방침은 예전에 레닌이 제기했으나, 스탈린이 폐기처분했다. 이 과정은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도전이기에 앞길에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러한 도전의 성과가 21세기 세계의 앞길에 반드시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이 길에 무엇이 필요한 가?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문제이기에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 과정의 전도에는 이론적으로나 연구해야할 다양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두가지 점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시장경제의 길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인 필요한가의 문제입니다. 레닌은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라는 길을 추진할 때, 해당 사회의 경제는 사회주의부문, 국가자본주의부문, 민간자본주의부문, 소상품생산부문 등이 나란히ㅣ 협력하거나 혹은 경쟁해 가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잘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자본주의로 역행하는 길이 안 되도록 많은 독창적인 제언을 했습니다. 제안의 내용은 현대에도 귀를 기울일만한 교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닌이 우선 강조한 것은 사회주의부문이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시장에서의 경쟁으로 자본주의에 질 수 없는 힘을 더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런 입장에서 안팎의 자본주의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레닌이 제기한 슬로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유럽식으로 판매할 수 있는 일류 상인이 됩시다.”

감옥에 있어서 장사를 배우지 못했다.”고 반발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엄중한 요구를 했습니다. 레닌은 다만 장사만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럽에 질수 없다면서 빈틈없는 유럽 상인에게 지지 않는 숙달되고 뛰어난 상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다른 슬로건에는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국영기업 등의 사회주의 부문을 자본주의 기업과 경쟁으로 점검하자.”

레닌이 말한 자본주의에 질 수없다.”라는 것은 생산성의 문제라든가, 경제의 효율과 같이 협소한 의미에서의 경제적 이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레닌은 예를 들면 직장에서의 노동자 안전문제에 대해 자본주의 가장 뛰어난 점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질 수 없다.”라는 것에는 지금의 상황으로 바꿔 말한다면 환경문제, 공해문제 등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사회주의가 우월성을 발휘해야 하지 않는 가 제기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경제전체의 핵심을 구성하는 앞에서 언급한 감제고지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사회주의부문으로 확실하게 장악하고, 경제발전의 방향으로 가는 힘을 발휘해야 하는 것입니다. 레닌이 감제고지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언급한 것은 당시 러시아의 현실에서는 공업과 수송 분야 생산수단의 압도적인 부분을 사회주의국가가 장악해야 한다는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러시아의 조건하에서 레닌이 생각한 것이며, 다른 국가에서 무엇이 감제고지의 역할을 달성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시대별로 특정국가의 조건에 따라 탐구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시장경제가 초래할 수 있는 여러 부정적인 현상에서 사회와 경제를 방어하는 것입니다. 시장경제는 원래 무정부성이나 약육강식과 같은 경쟁을 포함합니다. 때문에 고용불안, 실업,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모순을 억제하는 힘은 시장경제 자체에서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것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사회보장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규제가 필요합니다.

 

레닌은 신경제정책”(네프)으로 전화한 이후에는 이런 문제에 특별한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대단히 흥미깊은 역사가 있습니다. 사회보장제도의 원칙이라는 것은 10월혁명 이후, 소련정부, 혁명정부가 선언했던 것이 세계에서 처음이었습니다. 사회보장의 원칙들은 이후 자본주의 세계에서 큰 영향을 주었고, 시장경제의 해악을 자본주의 나름대로 억제하는 사회적 규제를 시작했다는 점이 교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시장경제의 부정적인 면으로서는 돈이 전부라는 배금주의 사상이나 각종 부패현상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부패 경향이 사회주의 정신을 갖추어야 할 공공기관을 오염시킨다면 그것은 관료주의, 패권주의를 심화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레닌은 공공기관 자체의 자기규율과 함께, 인민의 감독과 점검이라는 활동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도 국민 전체의 문화수준을 높이고,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이것이 레닌이 생의 마지막 시기에 강조했던 점입니다.

위의 내용에서 약간의 현재적 문제를 첨부한다면 현재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있어서도 시장경제 만능주의인가 아니면 사회적 규제, 민주적 규제를 확립하는 시장경제인가라는 문제가 큰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아주 큰 차원에서 말한다면 전자의 경향은 미국, 부시정권하의 미국에서 대단히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고, 후자의 경향은 현재 유럽 국가들에게 상당히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문제, 사회적 불평등 문제, 각국 경제의 자주성의 문제 등, 세계적인 경제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장경제를 통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인가, 또 경제체제가 사회진보의 입장에서 이러한 분야에서도 우월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 향후 세계사적인 시야에서 탐구해야할 중요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향후 시장경제의 앞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연구해야만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보다 이론적이고, 향후 예상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만,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결합이라는 길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사회주의의 목표에 도달하는 경우, 시장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소멸할 것인가, 아니면 남는 것인가, 만일 남게 된다면 언제까지 어떤 범위에서 남아있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앞에서 시장경제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지금 이야기한 입장에서 시장경제를 연구해보면 그것이 다른 방식이나 구조로서는 잘 맞지 않는 중요한 경제적 효용 문제를 갖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요와 공급의 조정 작용입니다.

어떤 나라의 국민이 일 년간 어느 만큼의 양을 필요로 하는가, 이런 문제는 시장의 작용이 없어도 계산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형의, 어떤 색깔의 구두가 몇 켤레 있으면 국민들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까의 문제는 비록 컴퓨터가 발전하고 있지만, 계산상으로 절대 나올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이런 분야에서는 시장경제를 통한 조정 작용이 장기에 걸쳐 필요하다고 봅니다. 때문에 노동의 생산성, 혹은 기업활동의 실적 등 이런 점들을 가늠하거나 비교하거나 하는 문제에도 시장의 판단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르크스 스스로도 [자본론]중에서 숙련노동과 단순노동을 비교하고, 숙련노동이 어느 만큼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지를 문제 삼았을 때, 이런 점을 계산하는 것은 시장이라고 서술했습니다. 마르크스의 말에서는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사회적 과정으로 확정된다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시장경제의 이런 측면을 지적한 것입니다.

소련식의 계획경제는 이런 면에서 대실패한 것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 후르시초프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시행한 보고를 읽어보면 이런 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산성과를 무게로만 측정한다. 따라서 건물을 장식하는 샹들리에라고 해도 무거운 것을 만들수록 실적이 오른다. 도대체 무거운 샹들리에를 만들면 기업은 수익이 발생하는가, 이런 것을 누가 사용하는 가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자리에서는 왜 소비에트에서 만든 가구는 평판이 나쁜가. 그것은 공장이, 무거운 것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제의 경우 가볍고 사용하기 쉽다. 우리나라에서는 기계공장의 많은 제품들이 무게로 성적을 평가한다. 기계 대수에 필요한 철의 두 배나 사용한다. 결국 계획은 달성해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기계밖에 없다. 공장의 성적을 평가해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만 한다.”이것이 후르시초프의 보고였습니다.

시장경제를 폐지하고 나서 30년이 흘렀어도, 경제성과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 탐구는 이 정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또 하나의 경험이 있습니다.

미국의 베트남 침략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회복했을 때에 베트남의 경제사정을 시찰하고 조언을 하기 위해 연구대표단을 베트남에 파견했습니다. 농업을 시찰했습니다. 베트남은 아시는 바와 같이, 쌀농사를 짓고 있으며, 물을 댄 논이 많이 있습니다.

농업의 기계화를 위해서 소련에서 이앙기를 수입해왔습니다. 소련식의 계획경제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무거웠습니다. 논에 운반해가면, 푹푹푹하면서 가라앉아버렸습니다.(웃음) 베트남에서는 모처럼 수입한 것이었지만, 작동시키기 위해서 양쪽에 보트를 갖다 대야 했습니다. 모를 심는 것은 그 자리에서는 심을 수 있었지만, 기계를 움직이면 양쪽 보트가 심어놓은 모를 까뒤집어 버렸습니다.(웃음) 그래서 결국 중단했습니다. 이것은 노동의 생산성이나 경제활동의 성적을 달성해가는 과정에서 시장경제를 대체할 대용물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드러낸 사례입니다.

마르크스는 확실히 이런 점까지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자본론]에서는 마르크스의 표현으로 공산주의사회에서도 가치규정은 남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근거로 시장경제의 존속을 마르크스가 생각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가치규정이 남아있다면, 시장경제를 극복했는데 어떻게 남는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가치규정이 남아있기 위해서는 생산자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는 사회적 과정”, 즉 시장경제를 대체하고 노동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어떤 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영역에 아직 이론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큰 연구과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으로 실제적인 경험을 축적해가면서 시간이 걸려 해결해 갈 수있는 성질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론, 공산주의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전면적이고 과학적인 비판에 기초해서 이 사회가 보다 고도의 사회형태로 변화하는 것이 역사적인 필연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지만, 새로운 사회 자체에 대해서는 사회진보의 대략적인 발전 방향을 해명하는 것에 머물러, 보다 상세한 청사진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론, 공산주의론이 갖는 특성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런 문제에 대해선 향후 그 사업을 추진하는 세대가 현실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아올려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대국적으로 전망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런 생각에 레닌도 상당히 공감하면서 마르크스는 미래 혁명가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대사업에서는 이런 마음가짐,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우리 자신들의 세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참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길에는 넓은 의미에서 세계적인 보편성이 있다.

마지막입니다만, 대체로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라는 것은 마르크스도 예상할 수 없었지만, 현실의 요구에서 나타난 길입니다. 저는 앞에서 세계사에서 새로운 도전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이론적으로도 새로운 도전입니다.

더불어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세계사적인 보편성이 있는 길입니다. 일본과 같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국가에서도 장차 동일한 성질의 문제에 직면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국가들에게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권이 탄생하고, 사회가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갈 때에는 시장경제 속에서 차차 사회주의부문의 비중과 역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아마도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이런 진행 방향이나 형태가 해당 국가의 독자성, 특수성을 갖는 것은 물론이지만,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이라는 큰 틀은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공통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중국의 현실에 기초한 활동과 경험에 대해, 아마도 높은 산도 있고, 깊은 계곡도 많아서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겠지만, 이런 모든 과정을 주의 깊게 일본사회의 미래전망과 겹쳐보면서 향후에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면서 강연을 끝맺을까 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수)

 

출처 ; https://www.jcp.or.jp/akahata/aik/2002-08-28/02_0101.html

후와테츠조 의장의 중국사회과학원 학술강연(2002827)

원제 ; 레닌과 시장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