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본민의련

전일본민의련의 의사대책-1

파랑새호 2018. 3. 2. 14:14

의사대책 활동은 민의련 운동의 역사 자체다.(1)


아자미 쇼죠(莇 昭三, 전일본민의련명예회장)1)  



전일본민의련은 올해 6월로 결성 65주년을 맞는다. 지난 65년을 돌아보면 발전의 원동력은 그때그때 활동했던 의사, 간호사, 사무직원 등이라고 할 수 있지만, 특히 청년의사의 참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요인은 당시 회원기관, 지역연합, 공동조직, 지역주민이 진정으로 의사와 함께 청년의사에게 민의련 운동의 의미를 알려주고, 참여를 요청해서 가능했다. 

이 글은 선배들의 민의련 결성 이후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추진했던 지난 의사대책을 구체적으로 재평가한다. 이 글을 읽고 이후 민의련 운동의 발전 - 특히 의학생 대책이나, 의국 담당자의 풍부한 지침이 된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다. 


들어가며

1945년 일본은 패전했고, 식량난, 주택부족, 실업, 질병(이질 등의 전염병, 결핵 등)으로 국민생활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전후 1947년 2월에 ‘신일본의사연맹’을 발족했다. 연맹은 전후의 무산자진료소 운동에 참여했던 의사나 활동가, 전전과 전후의 세틀먼트 운동에 참여했던 의사나 종전직후 학생운동에서 성장한 의사들이 결집한 조직이었다. 미군점령 하에서 시작된 의사 인턴제도는 1947년 3월부터 출발했으며, 1950년에는 인턴연합도 결성하여 결국에는 1954년의 의학연맹결성으로 이어졌다. 

민의련 회원기관의 선두라고 할 수 있는 도쿄지유병원(1946년 5월)이나 오사카의 니시요도병원(1947년 2월)등은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하였고, 이윽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간‘주민설립’병원, 진료소가 모여 1953년 6월7일에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가 탄생했다. 

“조직은 사람사업”이라고 하지만, 의료기관은 가장 전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의사가 없으면 조직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상술한 바와 같이 탄생한 ‘주민설립’병원, 진료소도 신설이나 확대를 위해서는 ‘의사확보’의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의사확보는 사업소를 확대하려는 경우에는 특히 어려웠으며, 이런 조건은 현재도 여전하다. 

여기서는 민의련이 매번 총회에서 채택했던 방침에 의거하여, 민의련 운동의 초창기부터 악전고투 했던 의사대책문제를 되돌아본다. 이런 내용 중에 후배 여러분들이 앞으로 민의련 의사대책 활동의 지침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의사대책 활동에 대한 필자의 생각


1952년 9월에, 미군 우찌나타(內灘)포 훈련장 반대운동(전후 최초의 미군기지 반대투쟁)을2) 시작했다. 이시가와(石川)민의련은 반대투쟁지원 의료반을 1953년 봄부터 파견했다. 1953년 6월에 개최한 전일본민의련 결성대회는 우찌나타 투쟁 지원을 결의하였고, 각 현의 민의련 사업소에 의료반 파견을 요청했다. 오사카, 효고, 니이가타 등의 민의련 사업소에서 의사, 간호사 지원을 실시했다. 포 훈련장 반대투쟁은 미국의 훈련장 강행으로 결국 중단했지만, 1953년 10월 우찌나타 진료소가 지역의 기지반대 실행위원회 참여자를 중심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렇게 민의련 운동에 참가하였지만, 10년 후부터는 전일본민의련 이사회의 업무에도 다음과 같이 관계하였다. 

1963년6월~1966년6월  전일본민의련 이사

1974년2월~1978년2월  전일본민의련 이사

1978년2월~1982년2월  전일본민의련 부회장

      1982년2월~1992년2월  전일본민의련 회장

말하자면 민의련의 초창기부터 1990년대 까지 약 40년간, 그때 그때 전일본민의련 이사회의 의학생 대책, 의사대책에 대해서는 여러번 담당자로서 관여하였다. 

아울러 현재도 현역 민의련 직원으로서 오늘의 의학생대책, 의사대책, 의사 수련문제에 대해서는 매일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으며,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이러한 필자의 경력, 입장에서 의학생 대책이나 의사대책에 대한 나름의 의견도 생각했지만, 현재의 의사양성에 대한 정부 방침, 이와 관련된 의학계의 동향, 정부의 의료행정과 깊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내용들은 민의련 현역 이사회나 담당부서가 논의하고 발언해야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여기서는 우선 필자의 과거 약60년에 걸친 의사대책의 경과를 되돌아보고, 교훈을 되새기는 역할에 중점을 두어,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의사대책 지침내용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는 민의련 결성대회부터 제42회 총회에 이르기까지 민의련 총회방침에 나타난 의학생 대책, 의사대책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내용으로 서술하였다. 서술 자체는 상당히 완만하더라도, 필사적으로 의학생 대책 활동에 참여했던 선배, 동료, 후배 등의 목소리를 그때그때 총회방침과 관계해서 서술하여, 향후 민의련 운동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길 바랄 뿐이다. 


2. 민의련 운동의 출발


① 결성대회 시 의사 수는 300명

전일본 민의련 결성대회 당시의 상근의는 약300인 전후였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수치인 가에 대해선 확실하지 않다. 

결성대회에서 “우리는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업무를 임무로 한다.”“의료전선통일의 핵심이 된다.” “평화와 독립의 국민정부를 수립한다.”등등의 8개 항목으로 구성된 제1차 강령을 채택하였으며,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를 결성하여 발족시켰다. 당시 총회의 주목적은 각각의 사업소가 서로 연대하여 일본의 의료혁신을 위해 민주적인 <의료조직(민의련)>을 결성하고, 조직 활동방침의 기본인 강령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당면 활동내용을 논의하고, “조직이 없는 지역에 민주진료소 건설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의사대책 논의는 없었다.(제1회 대회 방침, 1953년6월)

대회 후에 도쿄대학의 셋틀먼트 운동의3) 의사 쯔가와 다케이치(津川武一, 나중에 아오모리에서 중의원에 선출됨), 토호쿠대학 사의련 의사 다카하시 미노루(高橋實, 제2대 민의련회장), 의사 와타나베 마사히코(渡辺正彦)등이 민의련에 참가하였다. 또한 사이타마에서는 생활협동조합 운동으로 진료소가 탄생하였다. 

총회에서는 “군사기지반대”를 내걸고, 당시 시작되고 있었던 “우찌나타미 군포사격장 반대운동”으로 조직된 의료반에 대한 지원 활동을 특별 결의하였다. 결의에 따라 대회 후에 신속하게 오사카 카미교병원의 우에니 병원(上二病院)의 의사 쿠와바라(桑原)등과 효고의 의사 우라이(浦井)등이 우찌나타 포사격장 반대투쟁 의료반 지원에 참여하였다.(의료반의 책임자는 의사면허를 이제 막 취득한 필자도 있었다. 필자는 당시 가나자와대학 의학부 공중위생학 교실의 의국원이었지만, <의료반>책임을 맏는 적임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활동이 중단될 수 없어서 책임자가 되었다.)


② 제3회 대회에서 “의사는 의사답게”라는 최초의 강령개정

제3회 대회(1955년 6월)는 결핵환자 요양소에 대한 입퇴원 기준 개악,  생활보호법에 의한 의료내용의 규제강화, 보험진료에 대한 “파쇼적”감사 강화(오사카 우에니 병원 등에 대해)에 대한 감사반대운동 등의 경험을 생생하게 보고했다. 그러나 한편에서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진료소 건설, 토기와(常磐)탄광, 나라 토쯔가와(十津川) 등에 대한 의료반활동, 각 지역에서의 산손(山村)공작4) 등을 보고하였고, “의사가 아닌 의사” “간호사가 아닌 간호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쓰다(須田)회장 사임하라!”는 분노의 구호가 터져 나오는 등 혼란스런 장면도 있었던 대회였다. 

동시에 “의료기술이 부족하다. 내부의 통일 없이 공산당이 활개치고 있다”는 등 당시 민의련에서 활동하는 의사의 고민도 구체적으로 보고했으며, 동시에 “우리들의 진료반 활동, 공백지역 건설, 진료활동에서 심각한 문제가 노정되고 있는 것은 의사부족 문제 때문이다.”고 서술하였다. 

3차 대회의 의미는 결의문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결성대회와 제2회 대회의 잘못된 정치주의로 인한 “의사가 아닌 의사, 간호사가 아닌 간호사 등이 평가받는 결과”임을 반성하고, 처음 5개 항목의 강령을 개정하여 두개 항목으로 변경한 점에 있다.5)

 

3. 민의련은 어떤 조직인가를 둘러싸고


제3회 대회는 결성대회, 제2회대회의 방침으로 정치주의적 편향노선의 폐해가 컸던 홋카이도 민의련이나, 생활보호 진료 감사 문제가 있었던 이시가와 시로가네 진료소가 화제가 되어, 회원기관 내의 민주주의 중시, 직원의 대우개선 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비판과 동전의 양면으로서 민의련 회원기관은 “개업의의 샘플이다”는 새로운 의견도 있었다. 말하자면 개업의 중에도 국민과 함께 의료를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고, 민의련의 회원기관은 그와 같은 양심적인 진료소의 “샘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제3회 대회에서 개정한 2개 항목 강령의 논의 중에 민의련 회원기관은 지역사람들이 요구하는 의료의 전형을 지향해야 한다면서, 제4회 대회는 개업의 중에도 국민과 연대하여 의료를 지키려는 관점도 있고, 민의련의 회원기관은 그와같은 양심적인 개업의의 “샘플”이라는 입장에서 논의하였으며, 이러한 사고가 제6회 총회(1958년 6월)에서는 민의련의 회원기관은 진보적인 의사의 “집단개업”이라는 관점도 제기되었다. 


4. 심각한 의사부족, 인턴에 대한 장학금제도를 개시


제5회 대회(1957년 6월)에서는 진료수가제도 전문의제도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홋카이도 민의련에서는 의사부족을 계획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인턴생6) 당시 일본의 인턴은 의대를 졸업하고 아직 국가고시를 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대학의학부, 의과대학,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1년 이상 진료 및 공중위생과 관련한 현장수련”을 거쳐야 의사면허를 딸 수 있는 의사국가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즉 한국의 경우에는 인턴은 의사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데, 이 당시 일본에서의 인턴이란 의사면허를 따기 이전의 사람을 말한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해서 일본정부는 1968년 인턴제도를 폐지한다. 189페이지 참조 

에게 ‘장학금’을 주고 국가 시험 후에 몇 년 정도 홋카이도긴이쿄(勤医協)에서 근무하는 계약 제도를 시행”한다면서 인턴생에 대한 장학금제도를 제정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는 전체적으로 제2회, 3회 대회의 혼란을 정리하고, 또한 제4회 대회에서 집단개업의론도 극복하여 결국엔 민의련운동의 방향성을 확실하게 세운 대회였으나, 동시에 의사부족의 문제나 회원기관의 소유권이나 이와 관련된 기반조직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① 의학생에게도 장학금제도 채택을 검토

제7호 총회(1959년 6월)는, 제3회 대회에서 처음 강령을 개정한 후 민의련운동을 총괄하면서, 향후 민의련 운동의 내용(성격)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하였다. 구체적인 주제들을 보면 무차별 • 평등의료에 대해, 의료기술의 향상에 대해, 경영을 지키고 직원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의료보장의 충실화와 의료제도의 민주화를 위해, 의료전선의 통일에 대해,  평화를 지키기 위한 활동에 대해 등이다. 이런 논의들은 제3회 대회에서 간단하게 두 개 항목으로 강령을 변경한 후에 약 4년간의 착실한 활동 속에서 이루어진, 향후 민의련 운동의 본질에 대한 논의였다. 동시에, 이때의 총회를 통해서 처음으로 ‘의사대책’에 대한 성실한 논의를 시작했다. 

논의에서는 “의사부족은 반드시 민의련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제도에서 의사의 편중은 피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선 진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에는 일반병원에서도 ‘의사신보’등에 의사모집 광고를 게재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당시 민의련의 상근의사수를 본다면 다음과 같은 수치가 남아있다. 

1953년(제1회 대회) - 300명

1956년(제4회 대회) - 420명

1965년(제13회대회) - 590명

1968년(제16회대회) - 550명

제7회 총회방침에서는 “의사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업무가 보람 있어야 한다는 점, 공공의료기관 우선의 정부 방침, 전문의제도 제정과 학위제도에 의한 대학병원 의국 지배현상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의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않기 때문에 이런 의사들에게 호소하기로 했다.(주의 ; 의과대학 증설 등의 의견은 당시, 아직 각계와 같이 제기하지는 않았다. 아울러 당시에는 ‘의학박사’취득은 의사로서 필수적인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대학의국에 들어가는 것이 박사학위 취득의 기본 조건이었다. 박사학위 취득 후에의 근무지에 대해서는 일정기간 의국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의사들의 진로였다.)

또한 제7회 총회 방침에서는 우리들 민의련 활동을 추진하여 가는 과정에서 민의련의 존재의미를 알게 해줄 필요가 있다면서, 

1. 현장이 민주적이고, 물질적으로 많이 보상받지는 못해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을 한다는 점, 

2. 의사 부족은 각 회원기관에 상호지원, 교류로 벗어난다는 점,

3. 특히 작은 진료소는 의사가 잘 취업하지 않기 때문에 지역내에서 계열화하여 상호지원을 해야 한다는 점, 

4. 중앙 지방에서 신이쿄(新医協)7), 봉직의들의 의사조직, 의사회, 의대조직 등과의 접점을 끊임없이 강화한다는 점, 

5. 민의련 회원기관으로서 의학생에 대한 장학금제도를 검토한다는 점, 

6. 지역 연합회가 없고 고립해 있는 곳은 중앙에서 향후 조직화를 검토한다는 점

등의 구체적인 방침을 제기하고 있다.(이리하여 1961년 10월29일에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제3회 대회에서 결정한 2개 항목 강령을 개정하여, 새로운 5개 항목 강령을 결정했다)


5. 전국적으로 통일된 의학생 영입 창구를 조직적이면서 계획적으로 


제10회 총회(1962년 7월)에서는 사회의학적 활동, 집단검진, 의료반활동, 부락의료활동, 폴리오문제(백신투쟁)등을 특별히 강조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활동을 새롭게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한편에선 “왕진의뢰를 해 온 환자와 이를 즉각적으로 이행하지 않고 있는 의사와의 사이에서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문제”나 조직문제(호리카와(堀川)병원의 민의련 탈퇴문제)도 발생했다.8)

 “60년대 민의련의 발전을 제약하고 있는 것은, 의사부족과 진료소 중심의 조직구조였다. 60년 안보투쟁 당시, 학생자치회의 상당부분은 극좌폭력 집단이 장악했다. 그러나 안보투쟁이후 학생운동 중에서 민주세력과 연대해 투쟁하려는 학생이 증가해 왔다. 그 중에서 민의련 운동에 접근하는 학생도 나타났다.”9) 따라서 “학생과 교류의 장을 만든다.” “전국적으로 통일된 학생영입 창구를”등 의사 마쯔이 히데에(松井秀枝)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민의련의 향후 의학생 대책으로서 “센타 병원을 지정해 국내 유학제도를 만들자.”는 제안도 받았으며, 진지하게 논의하였다.10)  또한 “의사 기타 인력부족에 대한 대책을 강화하자”에서는 “오랜 기간 근무한 의사가 개업해 가는 것은 끊임없이 발생한다. 새로운 의사를 영입하는 노력을 하기 전에 현재 묵묵히 회원기관을 지키고 있는 의사들의 노고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이들 의사들이 민의련 운동에 대한 열정이 더 강해질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서술하였으며, 나아가 “민의련 운동의 발전에 따라, 향후 상당수의 신의사, 신간호사를 영입할 가능성이 증가하였다. 의사를 중심으로, 치과의사, 약사, 간호사, 영상의학 기사, 기술자 부족대책을 회원기관의 일부의 노력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 계획적으로 장애를 타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제14회 총회 1965년 7월)


6. 의과대학 내의 민주적 조직의 육성, 확대


제11회 총회(1963년 6월)에서는 조직상의 여러 문제 - ‘의사, 간호사, 기타 의료기사의 충원에 대하여’의 주요 내용으로서 다음과 같이 처음으로 대학의학부의 민주적 조직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제기했다.

“상근의사 부족이 민의련 운동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는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회원기관은 다양하게 노력하고 있지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민의련 회원기관에서 근무하는 의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회원기관에 정착하고, 회원기관의 간부로 육성해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과대학 내에서 민주적 조직을 육성하고 확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의학련, 사의련, 셋틀먼트 활동참가자 중에서 장래 상근의를 배출할 수 있도록 의욕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상근의 들의 평균연령은 38.4세, 출신학교는 71개중에서 도쿄대, 교토부부설의대, 도호쿠대, 오카야마대 등 4개 학교가 전체의 24.4%를 점유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민의련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대학에 의식적으로 활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7. 장학금제도의 확충과 민의련 운동연구집회(民医硏, 미니켄)의 개최


① 아르바이트 신분인 인턴에 대한 의식적인 지도후원

1963년, 동서학술집담회가 처음 열렸다. 내용 중에 사회의학적 활동의 확대로서 “상근의사 부족이 많은 회원기관의 발전을 방해한다. 상당수 회원기관은 궁지에 몰려 이런 저런 인맥을 동원하거나, 혹은 의사소개기관에 의뢰하여 충원에 목을 매고 있는 상태로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 홋카이도, 미야기, 군마, 사이타마, 교토 등에서 의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여 해 주고 이해를 심화 하려는 자세는 본받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토호쿠에서는 인턴의 약4분의1은 민의련의 회원기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이들 인턴에 대한 의식적인 지도후원 활동은 현상적으로 대단히 불충분하다.”고 지적하였다. 

활동방침에서 “의사부족 대책”이라는 특별항목을 설정하였다. “금년도는 의사부족 대책에 조직적으로 참여. 단순히 고액의 급여로 확보하려는 자세는 내부의 분열 등 모순을 발생시키며, 활동을 저해하는 경우도 많아서 금년도는 특히 의학생, 인턴에 대한 관심을 강화하고, 조직적인 영입의 기초를 조성해야만 할 것이다.”고 서술하였다. 이때부터 의학생을 상대로 한 “민의련운동연구집회(미니켄民医硏)”를 개최하였다. 

1964년 8월  1회 민의련운동연구집회, 21개 대학, 66명 참가. “의료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 청년의사가 가야할 길”을 발간.

1965년 8월  2회 민의련운동연구집회, 33개 대학, 303명(간호학교 17개교도 참가)

1966년 8월  제3회 민의련운동연구집회, 91개 대학, 470명.

이후, 니이가타, 군마, 치바, 가나가와, 이시가와에서 지역모임을 개최했다.(제12회 총회 1964년 6월)


② 의사퇴직의 요인으로 회원기관의 분열이 원인.

제13회 총회(1965년 7월)에서는 “의학과 의료의 파괴”라는 항목을 제기하고, 의료종사자 부족, 개업의, 무급의국원, 공익의료기관 등의 모순문제나 건강보험, 의료보호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한 “민의련 회원기관에서의 파트타임 의사에 대한 의존도가 매년 증가하고, 특히 홋카이도, 호쿠리쿠, 산인(山陰)에서 의사충원 문제의 어려움은 심각하다”고 지적. “일반적으로 의사의 대도시 집중은 의료위기 시에 나타나지만, 민의련에서는 의사가 그만둬서 발생하는 의사 문제도 있지만, 회원기관의 단결이 불충분해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이 보이며, 의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령을 중심으로 회원기관의 단결이 소중”하다고 지적하였다. 


8. 전일본민의련 이사회, “청년의사의 영입과 수련에 대하여”를 발표하고 ‘청년의사대책위원회’를 설치.


제15회 총회(1967년 6월)에서는 환자를 노동과 생활 현장으로 연결해서 보는 “눈과 자세”, “민주적 협력체제”등이 특별히 강조된 시기였으며, 활동하는 사람도 질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의사와 기타 인력의 부족 대책을 강화한다.”에서는 간호사 대책 등에서 홋카이도, 토호쿠, 큐슈에서 일정한 진전을 봤다고 서술하였다. 나아가 “의학계열 학생과의 유대를 발전시키는 활동”에서는 “전년 1966년 8월의 제3회 미니켄에 91개교에서 각 직종에 걸쳐 470명이 모였으며, 민의련 운동의 발전 토대를 쌓아가고 있다” “올해 4월 케이스워커 등 100명을 영입했다.”등등. 

그리고 “청년의사 영입과 수련에 대하여”를 발표.(1968년 1월15일) 주요취지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민의련에 참가하는 청년의사를 “단순한 노동력으로 보지 않는다.” “즉시 진료현장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하게 제기하고 민의련 사업소 자체가 스스로의 방침으로 청년의사를 육성해 가야한다는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민의련 자체적으로 수련구조를 정비하여 미니켄운동과 결합해서 발전시켜 간다는 점을 밝혔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방침이었다. 이후 방침에 따라 전일본민의련 이사회 안에 <청년의사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위원장 ; 다카하시 미노루(高橋実)부회장, 위원 ; 이마무라 유우이치(今村雄一), 아자미 쇼죠(莇 昭三), 나카노 마사루(中野勝) 등) 이미 민의련에 참가한 청년과의 간담회를 중심으로 각 의학부의 학생과 간담회를 개최. 


9. 1968년 4월, 전국에서 약 50명의 청년의사를 영입


제16회 총회(1968년 7월)에서는 “의사, 의료기사 부족대책에 대하여”의 항에서 의사대책을 다루었으며, 다시 한 번 “청년의사의 영입과 수련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여기에서는 “작년 11월, 민의련 청년의사 교류집회를 개최하고, 금년(1968년) 1월, 단순한 노동력으로 취급하지 않고, 교육수련 계획(커리큘럼작성)을 작성하며, 수련목표의 명확화, 청년의사의 집단화, 성과에 대한 평가, 이후 배치와 전문분야 설정은 의사개인의 희망과 지역연합의 규모를 감안하여 전략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할 것 등을 강조했다. 청년의사를 단순한 노동력으로 편의적으로 다루는 경향이나, 이런 경향과 동전의 양면으로서 정신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개선하여 구체적인 교육수련 구조를 강화할 것”등을 강조하였다. 

1968년 4월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약 50명의 청년의사를 영입했다. “이것은 의료계열 학생과의 결합 측면에서는 미니켄(民医硏, 제4회)이 성공했으며, ‘지방집회’도 개최되기 시작하여 300명이 모이는 전국 집회의 성공요인이었다. 또한 이 집회에서는 의학생, 간호학생 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의료계열 학생들이 모였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체로 1966년부터 전국적으로 민의련의 장학금제도가 출발하였다.(이해 1968년 의사인턴제도는 폐지되었다.)

당시 ‘청년의사 민의련 영입 인원’을 보면 1965년-20명, 1966년-30명, 1967년-34명, 1968년-55명,1969년-43명, 1970년-52명, 1971년-70명, 1972년-96명, 1973년-?, 1974년-84명 등이었다.(전일본민의련이사 의사위원회 담당자 아자미쇼조의 효고민의련 강연에서 인용)

당시 청년의사의 민의련 영입자는 위와 같지만, 1960년경부터 시작된 ‘미니켄’운동이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했던 것이다.



10. 회원기관 전체에서 청년의사의 수련구조 확보 


“청년의사 영입과 수련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수련 지도의사의 부족,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고, 수련의와 상근의사 간의 생각에도 차이가 있다. 회원기관 전체적으로 수련할 수 있는 구조가 확립되지 않는 등 극복해야만 하는 다양한 어려움이 있다. 민의련 이사회는 청년의사대책 위원회를 설치하여, 영입과 수련에 대해 수련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것, 수련계획을 세우고 계속해서 토론할 것, 민의련의 역사와 강령이나 ‘민의련 의료의 특징’을 필수항목에 추가할 필요가 있으며, 회원기관 전체의 기술향상과 수련의의 기술향상을 결합하는 점이 중요하다는 중간평가를 한 바 있다. 아울러 청년의사 중에는 일정기간 후에 대학으로 복귀해야 할 사람이 뒤섞여 있어서, 이런 조건에서도 수련을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점이 민의련을 확대 강화해 가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회원기관 전체의 기술을 향상시켜는 것이야 말로 수련의의 기술도 향상할 수 있다는 경험을 배워야만 한다. 지역연합 이사회는 이러한 문제를 지도하고, 후원하고 점검해서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학의학부가 존재하는 지역연합은 반드시 책임자를 임명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17회 총회 1969년 6월)


11. “70년대의 과제에 걸맞는 민의련 운동의 새로운 전진을 위하여”를 제기


- 수련과정에서는 청년의사의 자주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 

- 수련 지도의가 끊임없이 상담할 수 있는 구조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

제18회 총회(1970년 7월)에서는 “청년의사의 영입과 수련”의 항목에서 각 지역연합에서 청년의사에 대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50명을 넘는 청년의사를 영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사부족은 여전히 심각했다. 전국 이사회는 청년의사의 영입, 미니켄 운동이 없는 의대에서의 미니켄 운동에 대한 후원을 중점적으로 논의하고, 아울러 간호학과생에 대한 미니켄 운동의 확대를 추진하기로 했다. 나아가 이사회는 “다시한번 민의련에서 청년의사의 영입과 수련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여기에서는 청년의사 영입이 당면 가장 중요한 과제로 자리매김하고, 수련은 청년의사의 자주성을 존중할 것, 수련 지도의가 끊임없이 상담에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보장할 것, 각 대학 의학부의 미니켄 운동과 각종 써클 운동에 대한 협력, 학원민주화 투쟁에 대한 협력을 주장하였다. 

“70년대의 과제에 걸맞는 민의련운동의 새로운 전진을 위하여”는 r겐분(健文)사건11)을 계기로 제기된 전국이사회의 반성을 포함한 방침이지만, 다시한번 민의련 운동의 본질을 스스로 자문하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의료활동을 지향하는 계기로 삼았다. 즉 예전부터 애매하게 처리했던 독선적, 분파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고, 운영의 민주화, 과학적 관리, 민주적인 합리화, 광범위한 의료종사자와 연대투쟁을 지향하는 방침을 확인했던 성명이었다.(제18회 총회 1970년 7월)


12. <청년의사회>를 조직


2회에 걸친 “민의련에서 청년의사 영입과 수련에 대하여”를 제기하여, 청년의사의 영입은 성공하고, 결국 80명, 외과수련에서는 우선 내과수련을 일정기간 시행할 필요성을 지적하였으며, 자만 지역연합으로서는 토의가 불충분한 곳도 있었으며, 나아가 “의사대책을 강화하자”라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제기했다. 

▶ “다시한번 민의련에서 청년의사의 영입과 수련에 대하여”를 지역연합에서 토론하고, 지역연합의 수련방침을 세울 것

▶ 상근의의 기술향상을 적극적으로 추진 할 것

▶ 지역연합 차원에서 수련성과를 총괄하고, 초기수련기관을 다수 확보할 것

▶ 각 의대의 미니켄, 기타 써클활동에 협력하고, 공동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연합 차원에서 담당자를 배치할 것(제19회 총회 1971년 7월)

▶ 당면과제 - “청년의사 자신이 자발성과 창조성을 발휘해서 단결하며 향후 민의련운동의 전망을 확보해가는 능력과 적극성을 만들어 가는 것을 중심으로, 기술수련에 대해서는 수련 지도의 구조를 보장함과 동시에, 청년의사 자신의 노력과 협력을 중시하고, ‘청년의사 모임’이 만들어지지 않은 곳은 지역연합의 지도로서 . . . .”, “ . . . 또한 전국차원이나, 지역별 수준에서 다양한 교류집회를 개최하며, 청년의사 동지들과의 교류를 활성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 . . ”(제20회 총회 1972년 2월)

※ 미니켄을 “전국의료연구 써클 연락회”(젠이켄)로 개칭. ‘미니켄’을 광범위한 의학계열 학생들의 자주적 의료연구회로 발전시키기 위해 “전국의료연구 서를 연락회”로 개칭하였다.(제21회 총회 1974년 2월)

※ 청년 잼보리 등에서 청년의사의 역할

청년 잼보리의 성공, 모든 직종이 참가하는 증례검토회의 실시, 민주적인 집단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이런 운동에서 청년의사가 큰 역할을 수행해 왔다. 청년의사의 수련에 대해서는 기술수련만이 아니라, 민의련의 간부로서 성장할 수 있는 후원을 해야만 한다.(제22회 총회, 1976년 2월)


13. 1980년 “민의련에서 의사영입과 수련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3번째 성명)를 발표


이것은 청년의사의 수련시스템이나 로테이션 정착 등에서 성과를 올리고 있으나, 영입이 150명 전후, 1979년에는 130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 발표였다. 

구체적으로는 영입이 하나도 없는 지역을 없애고, 모든 곳에서 의과대학으로부터 수련의를 영입하며, 중점학교를 결정하는 활동, 의학생 대책은 전국적 관점에서 참여하고, 중견의사들은 자신의 전망, 지역연합 회원기관에서의 역할, 일상진료에서 후배의 지도, 수련지도 참여를 포함한 전문수련의 향상 등을 검토하자고 제기하였다. 또한 계속해서 연간 200명을 영입하고, 영입이 없는 지역연합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수련의 두 가지 목적을 제기하였다. 

1. 의료 황폐화에 맞서 싸우며, 환자의 입장에 서서 현장의료를 기술적인 차원이나 조직적 차원에서 모두 풍부한 역량을 갖는 의사를 대량으로 육성하는 것. 

2. 많은 청년의사에게 현장의료기관에서 수련의 장을 보장하고, 환자의 요구에 근거한 수련의 필요성과 우월성을 분명하게 입증하여 가는 것(제24회 총회 1980년 3월)


원문 ; [민의련의료(民医連医療)], 2018年 3月号 48~54페이지

번역 ; 박찬호(녹색병원 사무처장)


------------------ 미주 -------------------

 1) 가나자와 의대 졸업. 가나자와 죠호쿠 병원의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원장을 역임했다.

 2) [차별없는 평등의료를 지향하며], 민의련, 박찬호 역, 건강미디어, 103페이지, 422페이지 참조.

 3) 위의 책 45페이지 참조

 4) 위의 책 118페이지 참조

 5) 두개 항목 강령은 위의 책 121페이지를 참조.

 6) 당시 일본의 인턴은 의대를 졸업하고 아직 국가고시를 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대학의학부, 의과대학,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1년 이상 진료 및 공중위생과 관련한 현장수련”을 거쳐야 의사면허를 딸 수 있는 의사국가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즉 한국의 경우에는 인턴은 의사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데, 이 당시 일본에서의 인턴이란 의사면허를 따기 이전의 사람을 말한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해서 일본정부는 1968년 인턴제도를 폐지한다. 189페이지 참조.
 7) 신일본의사협회의 줄임말. 진보적 성향의 의사조직이다. 
 8) 앞의 책 196페이지 참조
 9) 앞의 책 186페이지 참조
 10) 앞의 책 187페이지 참조
 11) 앞의 책 225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