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1세기혁명과 이행에서의 주체형성 전략”, 박영균, [혁명과 이행](한울아카데미, 2017년), 406~434페이지
2) “마르크스의 코뮤니즘, 그 고유성과 현재성”, 박영균,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2018년 (출처 :
두 글은 박영균이라는 한 사람이 작성했다. 두 글이 약간 논점은 다르지만 일맥상통한다. 저자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원래 제시했던 것은 ‘코뮤니즘’이다. ‘코뮤니즘’을 ‘공산주의’라고 하지 않고, 굳이 ‘코뮤니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의도가 있다. 정통좌파와 구별하기 위함이요, 마르크스의 고유성을 부각하기 위함이다. 저자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이론적 독창성은 “이행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에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기존의 좌파들이 떠들어대던 계급투쟁을 위한 국가기관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직접 민주주의가 관철되는 자기-통치기관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번역을 쓰지 않고, 독재에 해당하는 말인 ‘Diktatur’를 제시하면서 ‘집권’이라는 말로 바꿨다. 독일어 사전 찾아보면 ‘Diktatur’는 여전히 독재로 되어 있는데, 어쨌든지 ‘집권’으로 바꾸면서 일본공산당은 강령자체에서 독재라는 말을 빼버렸다.) ‘코뮤니즘’에서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것이 노동자를 중심에 두는 사고라기보다는 “모든 계급의 지양”이면서,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기”라는 것이다. 기존의 정통 좌파는 ‘노동자주의’에 빠져 있다. 노동자주의는 노동자의 양면성과 관계가 있다. 노동자는 한편으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의 담지자이면서 모순의 해결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본의 축적과정 속에 매몰되어 있는 만큼 “자본의 파트너이자 협력자인 ‘친 자본’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쉽게 생각하면 노동귀족이나 노동조합주의에 빠진 노동자를 생각하면 될 듯하다. 이런 주장을 긍정적으로 판단한다면 21세기인 현재에 이르러서는 자본이 총체적 위기에 도달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본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의 해방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럴 때 ‘코뮤니즘’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니라 ‘대중’이다. ‘민중’이라 해도 좋고, ‘인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정통’좌파의 오류는 바로 이 풍요로움, 새로운 사회 건설과 주체 형성의 내용을 앙상한 계급 모순으로 환원한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좌파들은 “앙상하게 남은 ‘계급’이니 ‘투쟁’이니 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자본이 파괴하는 삶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실험적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대중의 실천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생협, 대안학교, 생태공동체, 레츠와 같은 지역화폐와 지역공동체 운동, 기본소득 등등의 다양한 실험으로부터 배우면서 “보편적인 가치로 만들어가는 헤게모니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마르크스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자는 취지에서 이행기 혹은 과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바람직한 관점이다.(저자가 제기하는 ‘코뮤니즘’이라는 용어도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어소시에이션 혁명’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최근 들어 이런 주장을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는 잘 보지 못했다는 느낌이라 더 그렇다. 나아가 변혁운동의 주체를 정통 좌파의 “앙상한 노동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실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 대중들로 변경하는 것도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다 좋다고 본다. 대중들의 사상이 ‘무정부주의’면 어떻고, ‘사민주의’면 어떠냐, 자본에 반대하여 대중의 자기통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전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서 만일 노동자를 뺀다면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마르크스가 노동자를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축적과정을 담당하기 때문이며, 결국 자본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일단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의미를 변혁의 주체라는 관점만이 아니라, 투쟁의 성과가 직접 미래사회형성의 준비를 한다는 점, 즉 저자 자신이 강조한 바 있는 이행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살리려면 주체로서의 노동자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혁명이라는 것은 원래 노동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례를 중국, 쿠바나 베트남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쉽게 납득할 것이다. 레닌 자신도 러시아혁명을 노동자 혁명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다수파’(볼셰비키)혁명이라고 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소위 ‘바쿠닌 노트’에서 첫째, 프롤레타리아가 대중 속에서 적어도 상당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점과, 둘째 노동자 – 농민 동맹 없이 혁명은 없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에 대해 계급모순만을 보거나, 노동자만의 혁명으론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왔다. 우리가 노동자를 처음부터 염두에 둬야 하는 이유는 혁명 자체라기보다는 정작 중요한 과정이 혁명이후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마르크스가 경제학비판 요강의 서문과는 달리 자본론의 경우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주체로서의 성장 발전이 필수적인 조건으로 구비되어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한 것은 마르크스 학계에서 이론적 발전으로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하는 점은 마르크스의 진짜 강조점이 혁명이후에 있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투쟁 의미에 대해 변혁의 조건이라는 각도에서만이 아니라 투쟁의 성과가 직접, 미래사회형성의 준비를 한다는 각도에서 탐구를 진행시킨 점을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부 제1편 제1장 <상품>에서 이미 미래사회의 전체상을 서술하였다.
혁명은 노동자가 없어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혁명이후의 과정에서는 노동자가 없이는 이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일 저자의 주장대로 “마르크스의 이론적 독창성은 이행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으로 규정하려면 노동자의 주체형성은 필수적이다. 노동자 없는 대중은 상상이다. 노동자 없는 ‘코뮤니즘’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혁명의 주체와 이행의 주체를 달리 상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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