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김훈의 칼의노래

파랑새호 2007. 3. 19. 13:41

([칼의노래], 김훈, 생각의나무, 2001년 발행)

 

 

 책의 구성은 이렇다. 우선 앞표지를 넘기자마자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의 선정이유가 나온다. 속표지가 나오고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여러 사진이 나온 다음 작가의 서문이 나온다.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 (칼의 노래 서문)

 

 

  작가의 이같은 서문은 적어도 칼의 노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벼리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난 후 뒷표지 안쪽에 동인문학상 수상소감이 있다. 동인문학상의 수상소감을 책 뒷표지 안쪽에 배열해 놓은 것은 참으로 타당하다. 소설을 읽고난 후 수상소감을 볼 때 거의 99% 작가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었고, 계급의 이름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무너지면서 그 시대를 통과해나간 그의 파탄과 죽음은 언어와 현실의 간극을 긍정할 수 없었던 한 청춘의 비극으로 보였습니다. .....중략....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는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다시, 임화를 추억함.’ [칼의 노래] 뒷표지 안쪽에 적혀있는 김훈의 동인문학상 수상소감 중에서)

 

 

 이순신은 적과 전쟁을 하는 중에 적이 누구인지, 적의 실체는 무엇인지, 적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다. 자신을 모함한 간신배들과 간신배들의 말에 넘어가 자신을 죽이려 한 임금,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과 그 일본군에게 잡혀 조선을 향해 조총을 겨누고 있는 조선민중들, 이 모두가 적일 수도 있고, 적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은 민족의 위기를 구해낸 전쟁영웅이다. [칼의 노래]에서 나오는 이순신은 적이 누구인지, 전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런 인간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이라는 보편적인 의미가 없다. 적의 실체가 없고, 적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상황이다. 적과 싸우고 있는 나는 따라서 적의 적이다. 다음과 같은 표현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21쪽)

    다시 내 앞에 펼쳐진 바다에서 적의 조건도 나의 조건도 보이지 않았다.(35쪽)

    크고 확실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헛것인지 실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헛것들은 실체의 옷을 입고, 모든 실체들은 헛것의 옷을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41쪽)

     이 세상과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헛것은 칼을 받지 않는다. 헛것은 베어지지 않는다(44쪽)

     어디를 조준해야 하는지 표적은 흔들렸다. 바람은 계통 없이 불어댔다. 화살은 거의 맞지 않았다.(48쪽)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65쪽) 나는 다만 적의 적의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68쪽)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141쪽)

    임금의 몸과 적의 몸이 포개진 내 몸은 무거웠다.(166쪽)

    나는 그 칼이 뿜어대는 적의의 근원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나는 내 적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219쪽)

    나는 적에게 둘러싸였고 백성들에게 둘러싸였다. 바다에는 지나간 것들의 흔적이 없었다. 붙잡힌 백성들을 앞세우고, 적은 또 다가오고 있었다. (235쪽)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적이 아닌 아무것도 없을 듯싶었다.(295쪽)

    나의 적은 만나지지 않는 적이었다.(304쪽) 적을 만질 수 없었고 적을 겨눌 수 없었다.(309쪽)

    적에게 닿을 수 없었다.(311쪽) 아마도 그때 나는 이 세계 전체를 적으로 맞아야 할 것이었다.(317쪽)  

    그때, 적들은 경건해 보였다. 적이 경건했다기보다는, 적이야말로 그 앞에서 내가 경건해야 할 신비처럼 보였다. 신비, 신비라고나 해두자. (322쪽)“

 

 

  결국 민족이라는 이름의 조직, 국가라는 이름의 조직이 개인에게 부과한 그 모든 명분, 이념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임기응변적인 것인가?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걸수 있는 대의명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보편성은 무엇인가? 이순신에게 그 모든 것은 헛된 것이었으며, 무의미한 것이다. 이순신은 집단으로서의 적, 실체로서의 적을 느끼지 못한다. 오직 파편화된 개별성만이 있다. 적들의 개별성속에서 적을 느낀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254쪽)”

 

 

  인간들이 만들어낸 그 모든 이념과 명분, 조직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이순신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는 개인이 그 모든 의미의 시작이요, 끝이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는 개인에 대해 그 누구도 단죄할 수 없다. 실존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무의미한 전쟁, 무의미한 삶, 무의미한 조직 속에서 개별의 삶을 온전하게 지탱해주는 힘은 무엇인가? 죽음에 대한 지배, 죽음에 대한 의미만이 남는다. 그러나 죽음 또한 이 세상의 무의미를 극복할 수 없다. 다만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을 뿐이다.

 

 

    “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26쪽)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53쪽)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65쪽)

    나의 사지는 내 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잘 죽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길은 너무 멀어서 끝은 보이지 않았다.(87쪽)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칼은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는 있지만 죽음을 벨 수는 없었다.(105쪽)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113쪽)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114쪽)

    희망은 없거나, 있다면 오직 죽음 속에 있을 것만 같았다.(172쪽)

    그때 나는 세상이 견딜 수 없이 가엾고, 또 무서웠다. 나는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들이 무서웠다.(179쪽)

    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 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203쪽)

    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206쪽)

    삶과 죽음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었다.(208쪽)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내가 수락할 수 없는 방식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었다. (261쪽)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327쪽)“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자신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어떤 누구도 할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깊은 허무, 오직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는 자의 외로움, 두려움이 있다. 외로움과 두려움을 체득해가는 개인의 실존이 있다. 세상으로부터 규정받고 있는 개인, 세상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가야만 하는 개인, ‘우리’라는 개념으로,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국가’라는 개념으로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사람들의 그 허무함. 내 죽음은 오직 나의 것이다. 이순신은 민족의 영웅이기 전에 실존하는 개인인 것이다. 모든 개인은 세상이 그를 영웅으로 평가하건, 역적으로 평가하건 온전한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했다면 그는 온전히 자기 삶을 지배한 사람이다. 오직 가치 있는 것은 강요된 세상의 의미 속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모순으로 점철된 ‘나’이다.

 

 

  소설의 내용, 주제와 간결한 문체는 너무도 잘 어울린다. 김훈은 언젠가 어떤 인터뷰에서 “소설이 밥벌이가 안된다면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 태어나는 순간 개인들에게 다가오는 세상 속에서 ‘고귀함’이라는 단어는 사치일 것이다. 일단 먹고살자. 누구나 다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니냐? 필자는 김훈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제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의미부여를 해보자는 취지로 [칼의 노래]를 이해했다. 무리 속에 파편화되어 있는 개인들에게 더 이상의 의미부여는 강제이다. 자신의 삶이 모순된 삶이며, 인간의 언어로 납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온전히 살아가고, 그 삶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것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김훈에게는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개인은 어차피 모순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나는 [칼의 노래]가 ‘인텔리의 정신적인 사치’라고 한마디로 주장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이 납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 인생은 물론 모순과 납득할 수 없는 여러 계기들이 뒤엉켜 있다. 나는 모순 덩어리로서 모순 덩어리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절대로 혼자살수 없다. 사람의 본질은 집단에 있고, 무리에 있다. 집단과 무리는 반드시 개인을 통해 나타난다. 모순 덩어리와 모순 덩어리가 만나 뒤엉켜 있으면서 집단이 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우리는 보편성과 특수성 그 어느것을 떠나서도 살 수 없다. 개인과 집단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어쩌랴, 태초의 원죄인 것을. 발버둥 칠수록 세상은 더욱 더 내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