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고슴도치의 우아함 - 서구 프롤레타리아의 삶

파랑새호 2007. 9. 18. 18:32

[ 고슴도치의 우아함 ],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옮김, 아르테출판, 2007

  

프랑스소설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엔가 한번 읽은 적이 있었던 장폴 뒤부아라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 [프랑스적인 삶]에서 받은 인상은 '유럽 부르주아 가정의 황폐화'였다. 어쨌든 장폴 뒤부아는 우리 인생이 아직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만 프랑스가정에서는 모든 고민과 결정이 각자의 몫이며, 가족은 이제 허울뿐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드러냈다는 부작용과 함께. 희망과 꿈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과 꿈을 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기만이다. 유럽소설의 경향은 잘 모르지만,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프랑스적인 삶]에서 주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의 배경은 [프랑스적인 삶]과는 달리 주인공이 프롤레타리아다. 그녀는 부르주아 동네의 아파트에서 수위로 일하지만, 자신이 수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길 원한다. 수위에 불과한 신분이지만, 그녀는 문학이나 예술, 특히 네덜란드 거장들의 ‘정물화’를 좋아한다. 철학책을 즐겨 읽으며,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도 좋아한다. 그녀의 충분한 지적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쨌든 아파트 수위이며, 부자들로부터 버림받을 까봐 노심초사한다. 프롤레타리아로서 부르주아에 속해보려 노력했던 친언니의 죽음이 그녀에게 끼친 영향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녀를 드러내지 않고 수위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방법으로 생각한다. 이런 그녀의 노력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프랑스 사람, 구체적으로 아파트에 살고 있던 프랑스 부르주아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녀를 발견하는 사람은 어쨌든 팔로마라는 초등학생과 새로 이사 온 일본사람이다.

 

서구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이나 있는 지 의심스럽다. 계급이 확실하게 존재하지만, 이민자의 문제로 인한 일자리의 부족, 계급보다는 환경문제로 관심돌리기, 신자유주의라는 체제가 만들어낸 과잉경쟁의 환경에서 ‘자각’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겐 삶의 풍요로움,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남아 있으나, 어쨌든 그것이 자신의 주위로부터 누군가에 의해 시도되는 소극적인 것이다. 깊은 내면에서는 사람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신분과 계급을 극복한 상태에서 인간으로 만나고 싶지만, 누군가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거나 체념한다. 파편화된 세계속의 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망쳐버린 우리의 철학, 세계관이 아직 저 깊은 지층에서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채 꿈틀거리고 있지만, 표면화되기는 어렵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라는 소설의 첫 문장은 ‘마르크스’라는 단어로 출발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맨 끝 단어이다. ‘마르크스’는 예전의 프롤레타리아이고, ‘아름다움’은 현재의 프롤레타리아이다. 작금의 현실에서 둘은 상반된다. 그러나 원래 둘은 하나였다. 고슴도치가 우아한가? 작가는 고슴도치를 편견에 대비시키고, 편견이 제거되었을 때 비로소 ‘우아함’이라는 실제 모습이 보인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편견을 극복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고슴도치가 만들어졌는가에 있다. 작가는 아직 그 수준까지는 나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