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야 대학 다닐 때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을 보고, 황석영의 소설들, 예를 들면 [무기의 그늘] 이나 단편소설 ‘탑’, 박영환의 [머나먼 쏭바강]등에서 그 실상을 알 수 있거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유명한 영화들, ‘지옥의 묵시록’이나 기타 헐리우드의 베트남소재 영화들도 부족하긴 하지만 그 실상을 약간은 전달한다. 현재 ‘도이모이’라는 정책을 펼치면서 경제개발을 위해 애쓰는 베트남이지만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고 승리했다. 베트남 전쟁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은 물론 베트남 국민들이겠지만 베트남 국민들은 지금도 ‘호치민’을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한다. 호치민은 베트남의 국민적 지도자이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들은 현재 [Economist]의 보도에 의하면 “단지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 정치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Economist] 2007년 3월29일자 ‘Plenty to smile about’에서 재인용) 베트남 공산당은 아시아에 경제위기가 발발했던 1997년부터 시장을 개방했다. 베트남은 아시아 외환위기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2000년 이후 년 평균 7-8%의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이라는 도시는 베트남 독립의 영웅 호치민의 이름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호치민시는 [Economist]의 보도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유행하는 도시”로 변해버렸다.(이상 [Economist] 2007년 3월14일자 ‘The revolution has been adjourned’에서 재인용)
베트남의 변화는 사회주의가 망하고 신자유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 시기에 살아남기 위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베트남의 변화는 베트남 고유의 경험과 특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베트남 고유의 경험과 특징은 바로 호치민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기 원하지만 그렇다고 호치민을 잊은 것은 아니다. 호치민의 말이나 철학, 사상은 아직 베트남 국민들 속에 녹아 있다.
호치민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통상적으로 어떤 사람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존 몰리뉴라는 사람은 [고전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스탈린이나 아시아의 민족해방운동은 고전마르크스주의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존 몰리뉴의 관점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의 국제혁명을 추구하느냐 아니냐에 마르크스주의의 기준이 있다. ‘일국 사회주의’, ‘민족해방운동’ 등은 이 기준에 어긋나는 것이다. 결국 존 몰리뉴에 의하면 호치민은 ‘민족주의자’이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닌 것이다.
존 몰리뉴 지음 | 최일붕 옮김 | 책갈피
그런데 호치민은 정반대로 생각한다.
“ 그가 아는 프랑스사람들 대부분에게 식민지 문제는 좀더 폭넓은 문제 - 세계자본주의라는 문제-의 주변적 측면에 불과했다. 과거 마르크스도 유럽 중심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유럽의 그의 후계자들도 대부분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115쪽)
“결국 그는 화가 나서 한 동료에게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식민주의를 비판하지 않으면서, 식민지 민족들의 편을 들지 않으면서, 어떻게 혁명을 하겠다는 겁니까?”([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116쪽)
“공산주의는 산업과 농업의 발전이라는 기초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베트남은 이런 조건 어느 쪽도 갖추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호는 이렇게 덧붙였다. 카를 마르크스의 꿈이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2천년 전에 예수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것도 아직 꿈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556쪽)
호치민은 언제나 현실주의자였다. 서구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실용주의자’이기도 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외교전술, 중국이나 소련의 분쟁 시에 보여준 조심성스러운 태도,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전선에 대한 유연성, 베트남 운동가들에게 나타났던 ‘좌편향’에 대한 비판 등 호치민은 독립과 해방에 대한 목표를 위해 ‘대동단결’을 주장했고, 과거를 묻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보라.
“ 독립이 핵심입니다. 그 다음일은 그 다음 일이지요. 어쨌든 그 다음일이 생기려면, 먼저 독립부터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 서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사람은 우리 자신밖에 없습니다.” ([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514쪽)
“그는 이론은 무시하고 대신 식민지 체제와 그 수레바퀴 밑에 깔린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직접 거론하면서 늘 분개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140쪽)
“응우엔 아이 쿠옥(호치민의 다른 이름)의 행동규범 목록은 전통적인 유교도덕을 연상시키는 면이 강했다. 검소해야 한다. 다정하면서도 공정해야 한다. 잘못은 단호하게 고쳐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 배움을 존중해야 한다. 공부하고 관찰해야 한다. 오만과 자만을 피해야 한다. 관대해야 한다.”([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224쪽)
“호치민은 12월17일 하 박성의 토지개혁 간부들에게 연설하면서, 반혁명 활동을 한 죄를 지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신중하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인민에 대항하는 죄를 지은 자들이라도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일은 삼가라고 되풀이해서 주의를 주었다. 호는 토지개혁은 뜨거운 국과 같이 천천히 마실 때 가장 쉽게 먹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703쪽)
“4월에 해안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간부들에게 연설을 하면서 호는 기계적인 태도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선주들이 모두 부정직하고 잔인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오직 압제적 행동을 한 자들만 처벌해야 한다. 배에는 노를 젓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키를 잡는 사람도 필요하다.” ([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704쪽)
마르크스주의 핵심, 생명, 정수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신이 자라온 지역의 대다수 민중들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새로운 상황에 대한 변증법적 역사인식, 창조적 사고가 핵심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중요한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바로 상황이나 사실을 분석하고 그에 따라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창조성이다. 대개 뛰어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와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원칙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그 틀에 짜 맞추는 사람은 기계론자이며, 비창조적이고,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호치민은 마르크스주의에 얽매이지 않았으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다음 표현들은 이를 입증하다.
“현재 문제는 우리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아는 것, 국내외의 유리하고 불리한 모든 조건을 객관적으로 깨닫는 것, 그런 뒤에 올바른 주장을 하는 것이다.” ([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537쪽)
“ 베트남은 영토가 중국보다 작고 또 완전한 식민지 체제이기 때문에, 베트민은 중국공산당이 항일전쟁 때 중국 북부에 건설했던 것과 유사한 대규모 해방구를 건설할 수 없었다. 또 중국공산당의 투쟁에서는 외교적 수단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베트민은 그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629쪽)
그리고 아마도 호치민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현재의 베트남 '도이모이'를 실행하게 한 철학적 배경일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우리한테는 기계도 없고, 원료도 없고, 심지어 숙련된 노동자도 없다. 우리 재정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 조국에는 산과 숲, 강과 바다가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 동포는 결의, 용기, 창의성이 강하다.“([호치민평전], 윌리엄J.듀이커 지음, 정영목옮김, 푸른숲 발간, 2001년, 5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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