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치는 철학자자로서 알려지기도 했지만, 미학이론으로도 유명하다. 오래전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리얼리즘 이론 중에 루카치의 영역이 있었다. 루카치의 리얼리즘은 ‘내용’이 중요했다. 말하자면 세상을 바꾸는 의식화된 내용, 목적의식적인 내용, 계급관점에 의한 내용에 더 방점이 있었다. 형식보다는 내용에 더 강조점이 있는 그런 내용이었다. 반면 브레히트는 ‘내용’보다는 문학의 ‘형식’에 더 방점이 있는 리얼리즘 작가였다. 루카치의 ‘내용’과, 브레히트의 ‘형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이르러, 말하자면 ‘내용’과 ‘형식’이 통일되는 그런 리얼리즘에 도달한다. 등등.
그러나 지금 소개하고 싶은 루카치의 대표저작 [역사와 계급의식]은 미학보다는 ‘철학’에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역사와 계급의식]만큼 ‘서문’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독자들은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서문’을 정독해야 한다. [역사와 계급의식]은 ·1923년도에 출간했는데, 물론 당시에도 서문이 있었지만, 1967년에 루카치가 다시 서문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에서는 1922년도 서문과 1967년도 서문을 모두 제시한다. 1967년 서문을 읽고난 후에 책을 읽게 되면 저자의 의도와 주장을 훨씬잘 이해할 수 있다.
(루카치와 루카치의 저서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옮김, 거름출판사, 1986년)
대체로 사람들은 루카치에 대해 두가지 평가를 하곤 했었다. 첫 번째 태도는 그 당시 유행하던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결정론에 반대하고 마르크스의 초기저작에 관심을 갖는 수정주의자로 보는 것이다. 이같은 관심은 주로 유럽의 수정주의자들이 주도한 측면이 있다. 두 번째 태도는 루카치를 극좌로 보는 것이다. 이같은 평가는 주로 공산주의 계열에서 행해졌다. 이같은 평가는 틀리다고 할 수 없지만, 현재의 의미는 아니다. 현재 루카치에 대한 의미는 약간은 달라져야 한다.
루카치는 67년 서문에서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해 밝히기를 “대체 무엇이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내용이며, 무엇이 마르크스주의의 영속성 있는 방법인지”, 즉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고자 열망”했기 때문에 나타난 “시론”이라고 밝혔다. (10쪽) 이같은 루카치의 문제의식은 루카치가 이 글을 쓴 이후 거의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아니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사회주의가 멸망하여 더욱 해결할 수 없는 과제로 되어버린 상태이다. 너도나도 마르크스주의를 외면하거나 깔보는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회주의 멸망이후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말하자면 ‘정통성’, ‘권위’같은 것이 사라졌다. 누구나 다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때론 신랄한 조소와 냉대를 위해, 때론 마르크스의 후예를 자처하나 황당한 자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결국 여전히 본질을 인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논의가 상황의 주종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루카치의 문제의식은 현재에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루카치는 당시 자신의 상황에 대해 “모순적 이원론”으로 자기비판 한다. 즉 한편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순수관념론이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원론이라는 표현은 몇 번 등장하는 데, “모순적 이원론”, “부조화로 인한 이원론”, “발전경향상의 이원론”이 그것이다. 루카치는 자신의 당시 사상이 아직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이원론은 뒤에 가면 “관념론적 유토피아 주의”, “혁명적 메시아주의”, “메시아적 유토피아주의”, “메시아적 분파주의” 등으로 표현한다. 루카치 자신이 당시 주관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극좌적 색채가 강한 운동노선에 몰입해 있었다는 점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당시 루카치의 실천노선이나 사상은 자본주의가 곧 멸망하고, 세계혁명이 임박했다는 극좌적 판단에 기초한 것이다. 루카치는 “부르주아 세계로부터 유래한 제도 내지 생활형식의 어떤 영역, 어떤 것과도 전면적인 단절”을(17쪽)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러한 노선을 채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선명한 계급의식이 강화,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루카치는 자기비판을 전제로 한 후, [역사와 계급의식]의 오류에 대해서 스스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듯한 발언도 한다. “그 기원이 저자의 단편적, 일면적 특이성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록 자주 잘못되기는 하였지만 그 시대의 거대한 경향에 있다는 사실”(33쪽)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하나의 이론이 거대한 위기의 시대에서 설령 객관적인 본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위기의 근본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태도설정만이라도 표현한다고 할 때, 그 이론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33쪽) 등등.
결국 [역사와 계급의식]은 루카치가 당시 갖고 있던 철학적 사고, 실천적 사고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책이다. 또한 [역사와 계급의식]이 갖고 있던 문제로 인하여 실제 운동과정에서, 운동하는 사람들 내에서 심각한 논쟁으로 나타나는 현실도 있었다. 루카치는 자신의 문제가 자신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비롯된 것이지만, 아울러 그와같은 자신의 판단은 당시의 세계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경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비판을 전제한 바탕에서, 자기비판이 충분히 전개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이 갖고 있는 정당한 장점들에 대해서도 소개하였다. 그것이 바로 [역사와 계급의식]의 제1장인 ‘정통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이제 루카치가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문제의식, 즉 ‘정통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규정을 고찰해야 한다.
“ 정통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연구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이러저런 주장에 대한 ‘믿음’이나 어떤 ‘신성한’책의 해석을 뜻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 문제에서의 정통성이란 오로지 방법에만 관련된다. 정통성은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 속에서 올바른 연구방법이 발견되었으며, 이 방법은 오직 그 창시자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신에 따라서만 확장, 확대, 심화될 수 있다는 과학적 확신이다.”(64쪽)
그리하여 정통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사회 속에서 변증법적 방법을 인식하고 실행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독자여러분은 루카치의 규정과 레닌의 규정을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루카치는 변증법적 방법을 적용할 경우 필연적으로 “총체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은 루카치의 주장들을 보라.
“사회생활을 하나하나의 사실들을 역사적 발전의 계기로서 총체성속으로 통합시키는 연관 속에서야 비로소 사실들의 인식은 현실인식이 될 수 있다. 이런 인식은 방금 특징지어진 단순하고(자본주의 세계 속에서)순수하며 직접적인 자연적 규정들로부터 출발하여 구체적 총체성의 인식, 곧 현실의 사고상의 재생산으로 나아간다. 이 구체적 총체성은 결코 직접적으로 사고에 주어지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구체적인 것이 구체적인 까닭은 그것이 많은 규정들의 총괄체이며 따라서 여러 가지 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이다.’”(74쪽)
“ 개별 계기들에 대한 총체성의 방법적 우위를 상실 -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오류. 부분들은 더 이상 전체 속에서 그 개념과 진리를 찾지 못하게 되었고, 전체는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해서 고찰로부터 제외되거나 부분들의 단순한 이념내지는 총합으로 바래져 버렸다.”(75쪽)
“‘각 사회의 생산관계들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는 마르크스의 진술이야말로 사회관계를 역사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방법적 출발점이자 열쇠이기 때문이다.“(76쪽)
“ 총체성을 변증법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겉보기에는 직접적 현실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또 현실을 매우 ‘비과학적으로’구성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사고상으로 재생산하고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구체적 총체성이란 본래 현실성의 범주이다. (76쪽)
“총체성의 범주는 결코 그 계기들을 지양하여 구별 없는 통일성이나 통일성에 흡수시키지는 않는다. 마르크스 말에 의하면 ‘우리가 다다른 결과는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모두가 하나의 총체성의 구성부분을, 하나의 통일체 내의 구별을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의 특정한 형태는 소비, 분배, 교환들의 특정한 형태와 이 서로 다른 계기들 상호간의 특정한 관계를 결정한다. 서로 다른 계기들 간에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이는 어떤 유기적 전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80쪽)
“전체에 대한 관계가 모든 인식개체의 대상성형태를 결정하는 규정이 된다. 인식과 관련 있는 모든 본질적 변화는 전체와의 관계변화로서 표현되며, 따라서 대상성형태의 변화로 표현된다.”(81쪽) “대상에 대한 인식가능성은 대상이 속한 특정한 총체성 내에서 그것의 기능을 파악할 때 발생한다. 바로 이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총체성을 고찰하는 것은 현실을 사회적 사건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 (82쪽)
그리하여 정통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마르크스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총체성에 대한 강조야말로 루카치가 공헌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속류유물론이 갖고 있던 ‘기계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전체와 부분, 이론과 실천, 구체와 추상이라는 변증법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기도 하다.
루카치에 대한 단순한 표현들, 예를들면 “헤겔에 대한 과도한 강조”등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본을 무시하는 것이다. 헤겔에 대한 강조는 이후 레닌에 의하여 다시한번 나타난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여러 저작들, ‘신성가족’, ‘자본론’과 엥겔스의 ‘반듀링론’등에서 포이에르바하의 속류유물론과 헤겔관념론 비판을 일관되게 진행하면서 긍정적 측면을 수용하는 그러한 철학이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래된’유물론 -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도 물론 속류유물론이다-의 근본적인 결함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1) 오래된 유물론이 주로 기계론적이며, 화학이나 생물학의 최신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2) 오래된 유물론은 비역사적, 비변증법적이며, 발전관점을 시종일관된 자세로, 전면적으로 관철하고 있지 않다는 점, 3) 속류유물론은 인간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사회적 여러 관계의 총체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문제가 세계를 해석하는 문제로 변질된 것, 즉 혁명적 실천활동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다.”([마르크스주의 3가지 원천과 3가지 구성부분], 레닌지음. 高橋勝之(타카하시 가쯔유키), 大沼作人(오오누키 사쿤도)번역, 신일본출판사, 1999년 발행, 33쪽.)
최소한 루카치는 실천활동 과정 중에 자신을 내던지고, 자신의 관념론적 본질을 실천활동 속에서 극복하려한 사람이다.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 “이론투쟁”운운하는 일련의 지식인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사람이다. 그는 어쨌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고민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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