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를 위하여(알튀세)

파랑새호 2007. 5. 11. 19:06

알튀세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이 있으며, 항상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했다. 알튀세의 모든 저작에도 마르크스와 관련된 내용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겉으로 보면 분명해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들은 알튀세가 과연 마르크스주의자인지에 대해 엇갈린 평가를 내리고 있다. 우선 알튀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예를들면 발리바르를 비롯한 알튀세 이론의 신봉자들은 알튀세가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사람으로 판단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윤소영’같은 학자는 발리바르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뒤지지 않는 자세로 알튀세를 “서구마르크스주의의 최고실력자”로까지 인정한다. 글룩스만은 “알튀세의 마르크스는 진짜 마르크스이다”고 주장하고, “알뛰세는 올바른 정치적 실천을 위한 근거를 견고하고 분명하게 제시함에 있어 레닌과 모택동을 따르고 있다”고 평가한다. 대체로 70년대 후반 80년대 초까지는 적어도 알튀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예를들면 일본에서 80년에 간행한 [현대마르크스-레닌주의사전]에서는 별도의 ‘알튀세’항목이 있었다. 이 사전에서는 알튀세 이론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출판된 마르크스주의 사전이라 할 수 있는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동녘)에서는 알튀세라는 별도 항목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조주의의 아류로 평가한다. 알튀세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는 셈이다. 오늘 알튀세의 논리를 평가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이같은 극명하게 엇갈리는 논점 때문이다. 사회주의 몰락이후 기준과 지평이 사라진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인정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지가 알튀세 논의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질문이다. 피터 빈스라는 사람은 알튀세를 논의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그런 질문이다.

 

“알뛰세는 도대체 무슨 기준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분류될 수 있는가? 그의 정치학이 - 비록 뒤틀린 유로코뮤니즘적 형식 속에서라 할지라도-마르크스주의적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한편에서 그가 실제로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이기 때문인가? 다시 말해, 그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 가능하고 또 필연적인 그러한 세계 개념과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표현하고 또 그것을 옹호하는 데 주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인가?”(‘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임무는 무엇인가?’, 피터 빈스, [현대 프랑스철학의 성격논쟁] 알렉스 캘리니코스외 지음, 이원영 편역․해제, 갈무리, 1995, 160쪽)

 

 

 (바로 이 사람이 알튀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알튀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알튀세 자신의 저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알튀세는 여러 가지 저작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대표저작으로 손꼽힌다.

 

    저작 ① 맑스를 위하여([For Marx], 이종원옮김, 백의, 2002)

    저작 ② 자본론 읽기([Reading Capital], Ben Brewster 옮김, VERSO, 1997)

 

                                                   

                  (저작 ① 맑스를 위하여)                                    (저작 ② 자본론 읽기)

 

 

  ①은 이미 번역이 되어 있으나, ②는 아직 번역이 없다. 알튀세 자신의 저작물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 예전에는 여러 편 있었던 것 같으나, 2007년도 현 시점에서 책을 구입하려 하니 위의 한 종류 외에는 판매하는 것이 없는 형편이다. 아마도 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빌리거나 헌책방을 뒤져야 할 것이다. 위의 저작과는 달리 알튀세가 작성한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제한된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편의 논문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I]라는 책 300쪽부터 330쪽에 걸쳐 번역되어 있다.(이병천 박형준 편저, 의암출판, 1992년)

 

 

  그렇다고 알튀세를 평가한 글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필자와 같이 철학을 전공하지 않고, 학계에도 있지 않은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인터넷 서점을 뒤지고 뒤져야 몇 권 찾을 수 있는 정도이다. 사실상 인문학이 거의 멸종된 상태에서 알튀세에 대한 최근 연구는 없다. 나와 있는 평가서는 대부분 마르크스주의가 한참 유행하던 시기에 출판된 것이다. 독자들을 위해 필자가 알튀세를 평가하기 위해 참고한 도서목록 10개를 소개한다. (독자여러분들도 한번쯤 읽어두면 좋겠으나, 직장생활하면서 책읽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 알튀세를 이해하기 위해 권하고 싶은 책을 꼽는다면 평가 ①, 평가 ②, 평가 ③을 추천한다. 시간이 있다면 평가 ①을 읽고 시간이 없다면 평가 ②를 읽어보길 권한다. 이도저도 싫다면 알튀세 자신의 저작으로 번역되어 있는 책 ‘저작 ① 맑스를 위하여(For Marx)’만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평가 ① [철학의 시추, 루이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 문성원지음, 백의, 1999

      평가 ② ‘알튀세 : 마르크스주의적 주체 비판’(윤해준), [주체 개념의 비판] 윤효녕,윤평중,윤혜준,

               정문영지음,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평가 ③ [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지음, 그린비, 1994

      평가 ④ [현대 프랑스철학의 성격논쟁] 알렉스 캘리니코스외 지음, 이원영 편역․해제, 갈무리,

               1995   

      평가 ⑤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리처드 커니 지음, 임헌규․곽영아․임찬순 옮김, 한울, 1992

      평가 ⑥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 미셸 리샤르 외 지음, 이상률․양운덕 옮김, 문예출판사, 1998

      평가 ⑦ [현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전 上], 岡崎次郞(오카자키 지로)편집, 사회사상사, 1980

      평가 ⑧ [서구마르크스주의 읽기], 페리 앤더슨 지음, 이 현 옮김, 이매진, 2003년

      평가 ⑨ [구조주의와 현대마르크시즘], M. 글룩스만 지음, 정수복옮김, 한울출판사, 1983년

      평가 ⑩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의 쟁점들] 윤소영지음, 공감, 2007

 

 

  알튀세를 직접 소개하지 않지만 읽어두면 도움이 되는 책은 다음과 같다.

 

      참고 ①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1] 로만 로스돌스키 지음, 양희석 옮김, 백의, 2003

      참고 ② [철학대사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동녘, 1997

      참고 ③ ‘모순론’, [모택동선집 1],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1

      참고 ④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지음, 최호정옮김, 박종철출판사, 2005

 

 

  그런데 알튀세의 글은 대단히 난해하다. 알튀세의 글은 한번에 이해되지 않는다. 읽어보고 또 읽어봐야 이해가 되는 그런 책이다. 왜 이렇게 글을 난해하게 쓰는지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다. 꼭 외계인의 글을 보는 그런 느낌이다. (필자는 그의 글이 어렵다는 점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페리 앤더슨은 “1848년 이후 마르크스는 항상 자신의 생각을 가능한 한 단순 명료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으며, 노동자계급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평가 ⑧, 111쪽)고 말하고, “알튀세는 기만적인 수사 등을 남발”(평가 ⑧, 112쪽)했다고 평가했다. 앤더슨에 의하면 용어의 난해성은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대중적 실천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평가 ⑧, 112쪽)고 주장한다. 따라서 알튀세의 책을 읽는 사람은 문장이나 용어의 난해성으로 한참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꼭 읽어야 하나?”라는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하게 만든다.

 

 

  여하튼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군다나 그것을 다시 평이하게 고쳐 쓰기 위하여, 알튀세의 핵심용어들을 소개한다. 아마도 알튀세의 핵심용어에 대해선 사람마다 거의 의견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개 다음과 같은 용어이다. 아래의 용어를 설명하면서 알튀세 철학을 평가해보도록 하자. (어떻게 쓰다보니 양이 많아 읽는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1) 인식론적 절단(epistemological break)과 문제틀(problematic)

          2)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의 차이(헤겔철학,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의 차이)

          3) 징후적 읽기(symptomatic reading)

          4) 이론 실천적 투쟁(과학과 이데올로기)

          5)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

 

 

  1) 인식론적 절단(epistemological break)과 문제틀(problematic)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말은 헤겔 철학과 마르크스 철학의 차이점,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의 차이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용어를 인용하여 알튀세가 차용한 것이다. 즉 알튀세에게 있어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개념은 헤겔의 관념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절단이며, 고전파 경제학자들과의 절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는 늘 헤겔의 철학을 설명할 때 ‘거꾸로 서있다’ 혹은 ‘전복’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에 비하여 알튀세는 ‘절단’이라는 개념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알튀세가 ‘절단’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이유는 “자신의 과거의 이데올로기적인 철학적 의식과 결별하고 새로운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을 성립시킨다. …… 중략 …… 하나의 절단을 통한 두 가지의 정립, 즉 하나의 과학을 성립시키면서 하나의 새로운 철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저작 ①, 32쪽) 이렇게 해서 ‘절단’개념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사상을 1845년으로 하여 그 이전은 ‘절단’에 선행하는 시기가 되며, 그 이후는 ‘절단’ 이후의 시기가 된다. ‘절단’이전의 시기는 (곧 청년 맑스) “그의 이데올로기적 ․ 철학적 시기의 거의 마지막 텍스트를 예외로 하고는, 헤겔주의자가 아니라 우선 칸트-피히테주의자였고 나중에는 포이어바흐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청년 맑스가 헤겔주의자였다는 널리 퍼져있는 명제는 일반적으로 신화에 불과하다”(저작 ①, 34쪽), “헤겔에 접근하기는커녕 헤겔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저작 ①, 35쪽)고 알튀세는 강조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칸트-피히테 주의자였다는 근거는 무엇인가가 마르크스의 저작으로부터 제시되어야 알튀세의 주장이 힘을 발휘할 텐데, 아쉽게도 알튀세는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엥겔스도 마찬가지로 한번도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대해 “칸트-피히테적”내용이 있다고 고백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초기저작에 대해 관념적 성격은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것이 바로 “칸트-피히테적”이라는 규정을 적용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알튀세의 ‘절단’은 초기와 후기의 절단이지만, 이것이 일반적으로 평가하듯 헤겔과의 절단이 아니라, 칸트 피히테와의 절단이며,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는 헤겔 철학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알튀세는 ‘절단’을 1845년에 위치시킨다. 1845년은 마르크스 자신이 언명한 바 있는 그런 년도와 같다. 알튀세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1845년을 중심으로 갈라지는 데 1845년 이전은 마르크스가 “칸트-피히테적인 철학”경향에서, 즉 ‘관념론적 경향’에서 1845년 이후 헤겔 과는 거의 상관없는 유물론적 경향으로 변한다. 이와같은 알튀세의 주장은 타당한지 검토해보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1845년 봄에 “사실상 우리의 그 이전의 철학적 의식과 결별할 것을 결의하였다.”고 표현했다. 이 문장 자체로만 보면 마르크스도 1845년을 기점으로 중요한 변화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문장에 씌여 있는 말에 주목해야 하는데, 내용인 즉 “이러한 시도는 헤겔 이후의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로 실행되었다.”는 것이다.([저작선집 2], 박종철출판사, 479쪽,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임)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 이전의 철학적 의식과 결별한 이유는 헤겔과의 결별이라기보다는 헤겔 이후의 잡다한 철학에 대한 여러 형태와의 결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이때의 철학이 주로 포이어바흐와 같은 속류유물론이나 프루동 등의 천박한 사회주의 등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르크스가 이전 철학과의 결별을 이야기한 것은 무슨 복잡한 사정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헤겔의 관념론적 성격만 보고, 변증법의 정수를 보지 못했던 잡다한 철학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해 관념론적 성격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이 글을 보고 헤겔과 마르크스주의가 원래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잘못짚어도 한참을 잘못짚은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강조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일관된다.

 

  알튀세가 ‘절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하는 용어는 ‘문제틀’(problematic)이라는 용어이다. ‘문제틀’ 또한 ‘절단’이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차용한 것이다. 알튀세에 의하면 포이어바흐는 “헤겔 철학의 내부”에서 헤겔을 비판한다. 다시 말해 헤겔 철학의 ‘문제틀’이 전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헤겔 철학의 “요소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미 유물론자이지만, 아직 포이어바흐적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고, 포이어바흐적 용어법을 차용”한다.(저작 ①, 51쪽) 그러므로 ‘문제틀’은 ‘절단’과 함께 알튀세가 주로 마르크스 저작의 포이어바흐 등의 속류적 관점과, 속류적 관점에 포함되어 있던 헤겔 철학과의 차이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 철학을 논의할 때 알튀세가 주장하듯 ‘인식론적 절단’이 있고, ‘문제틀’의 변경이 있어서 이전과 이후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상황이 있다면, 이는 중차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알튀세가 ‘절단’을 주장하고 ‘문제틀’을 주장하기 위해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연 마르크스 저작의 어떤 내용이나 주장이 칸트 피히테적이었는지 제시하고, 절단의 구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헤겔 철학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언급할 때 주로 제시하는 구체적인 표현들을 거론하면서, 그러한 표현이 왜 헤겔 철학과 상관이 없는지 입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알튀세는 주장은 하되,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절단’이나 ‘문제틀’이라는 용어는 이후 전개될 알튀세 자신의 논리전개를 위한 이론적 장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종의 ‘가설’적 성격을 갖는다. 알튀세는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마르크스 저작을 평가하면서 자신의 주장만을 점점 더 강하게 제시한다. 또한 ‘절단’이나 ‘문제틀’과 같은 ‘이론적 장치’가 주로 마르크스주의 외부에서 빌려온 개념이라는 특징도 있다. 알튀세 이론의 특징은 여기에서 이미 중요한 점이 드러난다. 즉 마르크스주의 외부에서 빌려온 개념을 사용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강하게 주장하되,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마르크스 저작의 구체적 근거 제시는 대단히 미비하다는 점이 앞으로 보겠지만, 알튀세 이론의 주요한 특징이다. 이로 인하여 문성원은 “[자본론 읽기]는 자본론 읽기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또 하나의 짐”(평가 ①, 55쪽)이라고 혹평한다.

 

 

  2)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의 차이(헤겔철학,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의 차이)

 

  ‘인식론적 절단’과 ‘문제틀’이라는 것은 마르크스 철학의 확연한 차이를 주장하기 위해 차용한 이론적 장치라는 것이 밝혀졌다. 덧붙여 알튀세가 외부로부터 빌려온 개념을 사용한 또 다른 이유는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을 비교하여 볼 때. 확연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헤겔 철학이나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가 확연한 질적 차이를 갖고 있다는 점과 상통한다. 알튀세는 초기저작을 헤겔 철학이나 고전경제학의 범주와 크게 다르지 않고(즉 그가 표현한 바에 의하면 ‘요소’의 차이)후기 저작, 구체적으로는 독일이데올로기 이후의 저작은 ‘절단’에 의한 차이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는 주로 마르크스와 헤겔 철학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자본론 읽기]에서는 고전경제학과의 차이를 주로 강조한다. 특히 헤겔과 마르크스와의 차별성이 알튀세 철학의 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문성원 [철학의 시추])도 있을 정도로 알튀세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연관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확연한 질적 차이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며, 과연 유의미한 질적 차이인가? 비록 여기에서도 알튀세는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있으나, 알튀세 자신의 주장을 검토하여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알튀세는 스스로 [자본론 읽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에서 수행한 작업의 본질은 어떤 이미지인가?”

  “마르크스가 자신의 작업이 (이전과는 다른) 혁신이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개념이며, 결국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 자신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고전경제학이 발견한 조건에 대해서는 어떤 개념들의 구조로 평가했으며, 자신이 발견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마르크스 자신이 그의 저작과, 그의 저작이 생산된 이론적 역사적 조건과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어떻게 반영했으며, 어디에서 반영했는지를 탐문하고 싶은 의도가 있다.” (이상 저작 ②, 73쪽)

 

   알튀세에 의하면 마르크스의 청년기 저작들에 대한 연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청년 마르크스가 완전히 마르크스인가?”라는 문제의식, 둘째, 알튀세가 개념 규정한 의미에서의 ‘이론’적 문제가 있다. ‘이론적 문제’라는 것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을 때 예를 들어 ‘절단’이나 ‘문제틀’의 수단을 이용하여 “포이어바흐에 의해 확립된 유물론적 요소들과 마르크스 자신에 의해 확립된 유물론적 요소들을 구분하는 것”이다.(저작 ①, 64쪽) 알튀세는 초기와 후기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론‘의 우위에 대한 인식으로 표현한다.

 

  [자본론 읽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차이 없는 개념 정의가 성립될 수 없듯이 우리는 자본론을 목적과 담론의 모든 영역에서 특별한 차이점의 문제로 고민했다. 자본론의 목적은 고전정치경제학의 목적뿐만 아니라, 마르크스 초기저작, 특별히 1844년 초고의 목적과도 다르다. 자본론에서 나타난 담론은 고전경제학의 담론과 다르고 청년마르크스의 철학적(이데올로기적)담론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저작 ②, 14쪽)

  “노동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로 바꾸는 것, 말하자면 연구의 대상, 연구영역(terrain)의 변경은 무심코 이루어진 행위가 아니다. 분석의 결과는 처음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기 보다는 문제를 지칭하는 ‘용어’(terms)를 완벽하게 변경하여 나타난 것이다. 연구 영역의 변경은 용어의 변경과 같으며, 그리하여 문제들이 규정되고 문제들이 부여한 내용으로부터 비롯된 이론적인 변화이다.”(저작 ②, 154쪽)

 

  요컨대 알튀세는 마르크스의 초기저작에 대해, 관념론의 영향이나 고전경제학의 영향으로부터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규정하고 있으며, 특히나 이런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후기의 저작이 “이론의 변화”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론의 변화”는 연구대상이나 영역, 용어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니 만큼, 초기저작에서 갖고 있던 관념론의 영향은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를 구별하고, 헤겔로부터 마르크스를 떼어내는 것에 의하여 알튀세는 뒤에 가서 본격화되는 주제인 ‘이론의 실천’을 주장하기 위한 밑거름 놓는 작업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초기저작과 후기저작을 구별하는 문제, 고전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구별하는 문제, 특히 헤겔 철학과 마르크스 철학을 구별하는 문제는 마르크스-엥겔스 자신에 의하여 이미 구체적으로 정리가 된 내용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러 지면을 통해 이같은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기 때문에 굳이 이를 문제 삼는다면 마르크스 엥겔스가 정리한 내용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알튀세가 이를 문제 삼았다는 이야기는 마르크스-엥겔스 당사자들의 문제의식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엥겔스는 ‘칼 맑스,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헤겔 철학의 의미와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헤겔 추종자들의 졸렬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헤겔을 지칭한다) 역사의 발전과 역사의 내적인 연관을 증명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 중략 …… 이러한 획기적인 역사 파악은 새로운 유물론적 견해의 직접적인 이론적 전제였으며, 이것만으로도 논리적 방법과의 접합점을 제공한 셈이다. ”([저작 선집 2], 박종철출판사, 488쪽)

  “헤겔이 죽은 이후에는 어떤 과학을 그것의 고유하고 내적인 연관 속에서 전개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공인 헤겔학파는 대가의 변증법으로부터 단순하기 그지없는 기교를 부리는 법만을 습득하였는데, 그들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졸렬한 방식으로 이것을 아무데나 적용하였다.”([저작 선집 2], 박종철출판사, 486쪽)

  “헤겔의 유산 전체는 그들에게 있어서 각각의 주제를 적절히 구성할 때 베낌으로써 도움을 더는 밑그림일 뿐이었으며, 사상과 실증적 지식이 결여되었을 때 때맞추어 모습을 두러내는 것 이외에 아무런 목적도 가지지 않는 단어들과 어법들의 목록일 뿐이었다.”([저작 선집 2], 박종철출판사, 486쪽)

 

  마르크스 자신이 헤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것은 자본론에 이르러서도 지속된다.

 

  “나는 약 30년전에 [헤겔변증법이 아직 유행하고 있던 시기에]헤겔 변증법의 신비로운 측면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내가 [자본론]제1권을 저술하고 있던 때에는,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활개 치는 불평 많고 거만하고 또 형편없는 아류들이 헤겔을 [일찍이 레싱(Lessing)시대에 용감한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이 스피노자(Spinoza)를 대하듯이]”죽은 개“로 취급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을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제자라고 공언하고 가치론에 관한 장에서는 군데군데 헤겔의 특유한 표현방식을 흉내 내기까지 하였다.”([자본론 1권 상],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8쪽)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하였지만,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형태를 처음으로 포괄적으로 또 의식적으로 서술한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자본론 1권 상],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쪽)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와지와 그 이론적 대변자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否定(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 ․ 운동 상태에 있다고 간주함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 ․ 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자본론 1권 상],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9쪽)

 

   따라서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헤겔 철학에 대한 강조, 특히 헤겔이 적용한 변증법에 대한 강조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칙이라고 까지 해야 할 그런 내용이다. 알튀세는 결코 헤겔의 변증법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강조했던 헤겔의 의미를 애써 외면하려 했다. 이는 바로 알튀세 자신이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비판하려 했던 “형편없는 아류”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그의 표현을 “흉내 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알튀세는 마르크스 저작의 초기와 후기의 차이를 강조했던 것일까? 우리는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학자로부터 엿볼 수 있다.

 

 “[경제학 철학 초고]가 발견된 이래 ‘초기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의 관계가 세계적으로 문제시되어 왔다. 이것을 단순화하면 초기 마르크스의 연장선상에서 후기를 생각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초기와 후기를 ‘단절’된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쟁점으로 집약된다. …… 중략 …… 초기 마르크스가 강조되는 것은 경제결정론과 생산력이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었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이며, 후기 마르크스가 강조되는 것은 초기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부르주아적인 인간학의 수준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환원시켜 버리는 데 대한 반발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스탈린주의에 대응해서 초기 마르크스가 서 있고, 초기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에 대응해서 반인간학적인 후기 마르크스가 서 있는 것이며, 변함없이 강력한 마르크스주의와 그것에 대한 부정, 나아가 그 부정의 부정이 뒤얽힌 채 마르크스 텍스트의 독해에 대한 쟁점을 형성하고 있다.”([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이산, 2003년 75쪽)

 

  페리 앤더슨도 당시의 프랑스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프랑스공산당은 1941년에 시작된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했고, 2차대전을 통해 세력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2차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에 프랑스노동자계급 내에서 프랑스공산당의 조직적인 권위는 정점에 달해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지식인들을 끌어들이는 흡인력도 빠르게 증가했다. 1960년대 당시 프랑스공산당의 공식 교리는 선진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어 협력 파트너들(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가톨릭교도)의 연대의 매개로써 휴머니즘을 내세웠으며, 소련공산당은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라는 대중선동 슬로건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알튀세는 자신의 이론 작업을 반 휴머니즘적인 것으로 못 박았다.” (평가 ⑧, 88쪽)

 

  결국 알튀세가 마르크스의 초기저작과 후기저작을 구별하는 것은 당시 시대의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알튀세가 강조한 바와 같이 “부르주아적인 인간학의 수준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환원시켜 버리는 데 대한 비판” 그 자체만을 갖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적인 인간학은 마르크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초고는 이후 전개될 경제학 연구에 대한 “밑그림”으로서의 역할이 크며, 그것이 어떤 완결된 체계를 갖는 독립된 저서는 아닌 것이다. 로만로스돌스키의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은 바로 이점을 입증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초기저작을 근거로 마르크스의 철학 전체를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알튀세가 만일 초기저작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부르주아 인간학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판했더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후기 철학의 초기와의 ‘절단’을 강조했다. 그리고 알튀세는 후기의 저작이 연구대상이나 연구영역이 전혀 달라진 이론의 발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 자체가 비변증법적 사고유형의 하나이겠지만, 이론이 절단된 상태에서 이론의 발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알튀세에게 있어서 후기저작은 초기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하늘에서 솟아난 저작이며, 후기에 이르러 초기저작은 땅으로 꺼진 철학에 불과하다. 둘 사이의 연관성은 아무데도 없다.

 

  마르크스는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출발하였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단순한 감성으로 끝내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에 적용하여 세상을 바꾸려 하였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세상에 대한 변혁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는 자야만이 변혁을 고민할 수 있다. 초기와 후기를 구별하는 행위야 말로 마르크스주의를 파편화시켜, 삶속에 살아 숨쉬는 싱싱한 활력을 거세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 작업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알튀세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창조성을 보지 못했으며, 살아 있는 생생한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생명을 보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초기저작과 후기저작이 절단되어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사상이 아니다.

 

 

  3) 징후적 읽기(Symptomatic Reading)

 

  알튀세가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나 엥겔스 자신의 표현으로 근거를 제시하기 보다는 마르크스주의 외부에서 용어를 차용하고 있음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징후적 읽기도 그에 해당된다.

 

  ‘징후(Symptom)'라는 말은 정신분석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특히 알튀세가 영향 받은 것은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이다. 라캉은 프로이드 정신분석에 구조주의적 언어학과 인류학을 결합했다. 라캉은 소쉬르의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간의 결정적 구별을 차용하여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무의식은 기표의 구조를 이용하여 메시지를 기호화 한다”고 설명한다. 라캉은 “징후는 은유이다”, “징후는 미래로부터 온다. 즉 징후의 의미는 해석 작업의 구축이다.” 고 설명하여 ’징후‘의 의미를 무의식의 메시지를 해석할 수 있는 작업영역, 혹은 기호라고 판단한 것이다.(이상 인용은 [Encyclopedia of postmodernism], Victor E. Taylor & Charles E. Winquist 편집, Routledge, 2001, 385쪽) 따라서 징후는 한마디로 무의식으로부터 파생되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알튀세의 징후적 읽기는 바로 텍스트 자체로서, 혹은 텍스트에 사용된 언어로서 드러나지 않은 기호나 은유를 파악하는 행위임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자본론을 ‘징후’로 읽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필자 같은 사람이야 자본론 읽다보면 문장 쫒아가기도 벅차지만, 텍스트만 읽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징후’까지 판단하여 읽는 다는 것은 혹시나 ‘자본론 읽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가? 설마 마르크스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판단하라는 의미인가? 알튀세 자신이 제시한 징후적 읽기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논쟁 속에 나타나는 단순한 글자읽기라는 것은 텍스트의 지속성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그러나 ‘징후’적 읽기는 다음과 같은 공백들(lacunae)을 인지할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즉 징후적 읽기는 뱉어진 말들의 뒤에 남아있는 침묵의 담론을 드러낸다. 징후적 읽기는 의도된 내용들의 외부적 한계로 인해 발생하는 혹은 엄격한 규정을 실패한 뒤 발생하는 공란, 말하는 이야기 속에서 유발되는 빈 공간(blank)을 드러낸다. 말들의 부재, 부재로 인하여 한계가 발생하지만, 그러나 어디까지나 열려진 공간속에서의 부재라서 징후적 읽기를 통해 드러낼 수 있다.”(저작 ② 86쪽)

  “그리고 사실상, 마르크스가 애덤스미스와 리카도를 읽었을 때, 그는 그들의 저작 속에 감추어져 있는 말들, 글자 뒤에 숨어 있는 말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번역하고, 생략된 말들을 나타낸다. 엄밀하게 말해 지대와 이윤을 읽으면서 스미스와 리카도의 저작이 잉여가치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다 해도, 잉여가치는 결코 지대나 이윤의 내적 본질로서 명명될 수 없다고 해도, 잉여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을 달성한다.”(저작 ②, 91쪽)

 

  위의 인용에 의하면 알튀세에게 있어서 징후적 읽기는 이론적인 저작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징후적 읽기를 통해서만 원전에 드러나 있지 않은, 감추어져 있는 새로운 개념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마치 정신분석에 있어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을 해석하는 작업인 것처럼, 알튀세에게 있어 징후적 읽기는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 드러나지 않은 영역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알튀세가 드러나지 않은 문제를 징후적 읽기를 통해 알 수 있다고 주장 했을 때,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실제 드러나지 않은 바로 그 문제라는 판단은 누가 할 수 있는가? 징후적 읽기를 통해 드러난 내용이 실제 저자가 감추어둔 무의식, 침묵, 결론적으로 저자가 감추어둔 문제라는 판단을 누가 자신 있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행간의 숨은 뜻’과는 다른 내용임에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텍스트에 담겨져 있는 ‘숨은 뜻’을 알기 위해서는 사실 텍스트의 내용들을 심사숙고하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텍스트의 용어들, 전후맥락, 관련된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방법만이 ‘숨은 뜻’을 드러낸다. 이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텍스트를 구구절절 인용하기도 하고, 텍스트가 작성된 배경을 장황하게 제시한다. 즉 텍스트의 ‘숨은 뜻’을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역설적으로 텍스트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들이 누군가의 징후적 읽기를 배려해서 일부러 감추어둔 문장, 생략된 글을 남겨둔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작가는 글로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분석을 텍스트에 의하여 제시하기 보다는 징후적 읽기를 통해 드러내려 한다. 징후적 읽기를 통하여 얻어낸 결과가 과연 객관성을 담보하여 텍스트를 ‘해석’한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알튀세가 제시하는 징후적 읽기는 그것이 당초부터 무의식의 해석 작업을 위해 설정된 개념이어서 철학 등의 논쟁에서는 객관적 내용을 담보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윤해준은 알튀세의 자본론 읽기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강한 오독(誤讀)“이라고 평가한다. 사실 윤해준의 글은 알튀세에 대해 너무나도 신랄하다. ”이론의 빈곤“(평가 ②, 131쪽), ”간접적인 언급을 통해 마르크스를 대변할 뿐이면서 마르크스를 거명하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텍스트적 권위를 향유“(평가 ②, 134쪽), ”자본론을 읽는다고 하면서도 꼼꼼히 읽기를 거부하는 독법“(평가 ②, 136쪽), 그러므로 알튀세는 주관적 관념론의 전형을 보여준다.

 

 

  4) 이론 실천적 투쟁(과학과 이데올로기)

 

  지금까지 알튀세가 주장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알튀세는 ‘인식론적 절단’, ‘문제틀’과 ‘징후적 읽기’등의 마르크스주의 외부용어들을 차용하여 마르크스 후기저작의 내용을 새로운 이론으로 판단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같은 알튀세의 판단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일정부분 파생된 것이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천박한 이해와 서구 관념론의 무분별한 차용으로 인한 주관적 관념론의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알튀세가 이렇듯 마르크스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도들을 통해 주장하고 싶은 이론이란 무엇인지를 검토해 볼 차례이다.

 

  알튀세는 우선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자에서 서술한 “이론 없이는 혁명적 실천도 없다.”는 명제를 설명하면서 “실천에 핵심적이라는 이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라고 물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저작 ①, 197쪽) 알튀세는 레닌이 여기에서 말하는 ‘이론’이란 “사회구성체들의 발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과학(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을 말하는 것”이며, “실천일반의 <이론>으로서의 유물론적 변증법에 관여하는 명제를 언표 했다.”(저작 ① 200쪽)고 주장한다. 무슨 말인지 대단히 애매하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원래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혁명적 이론이 없다면 혁명적 운동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알튀세는 이 문장 중 ‘혁명적 이론’을 ‘이론’으로 슬그머니 대체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냥 용어의 변경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말고 넘어가자. 레닌이 이 문장을 사용한 이유는 특히 ‘경제주의’라는 실천 활동의 협소한 형태에 대한 매몰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위의 문장을 서술한 이후, 레닌은 사회 민주주의 운동의 각국의 경험으로부터 자국의 특수성에 맞는 정치적 경험을 위해서는 풍부한 이론적 역량이 있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레닌은 비사회주의적 이론에 대한 비판과 각국의 운동경험으로 유추해야하는 자국의 특수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강조한다. 그 다음 레닌은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서문을 장황하게 인용한다. 주지하다시피 엥겔스의 [독일농민전쟁]서문은 “독일 철학, 특히 헤겔 철학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독일의 과학적 사회주의 - 지금까지 존재한 단 하나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들 사이에 이론적 감각이 없었다면, 이 과학적 사회주의는 결코 오늘날의 상황처럼 노동자들의 살과 피로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는([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지음, 최호정 옮김, 박종철 출판사, 2005년, 32쪽)주장을 통해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엥겔스는 노동자 대중 속에 보급되어 실천과정상에서 노동자의 무기가 되는 이론, 변증법적 사고의 지평을 넓혀 과학적 사회주의를 갖춘다는 의미에서의 이론을 강조한다. 레닌은 엥겔스의 이러한 지적이 당시의 사회조건에서 정확한 평가를 가능하게 하며, 이후의 실천이 이를 입증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레닌에게 있어서 ‘이론’은 각각의 특수성에 입각한 상황해독 능력, 상황분석능력을 의미하며, 이러한 이론작업을 통해 당면 임무를 설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엥겔스는 역시 [독일농민전쟁] 서문에서 “투쟁은 세 가지 측면 - 이론적 측면, 정치적 측면, 실제적 경제적(자본가에 대한 저항)측면-에 걸쳐서 단일한 음조와 연관을 유지하면서 계획적으로 수행되고 있다.”(위의 책, 33쪽)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투쟁의 세 가지 측면 중 이론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점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엥겔스의 이 말이 이론을 별도의 실천으로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엥겔스가 강조한 것은 투쟁의 측면으로서 이론이다. 투쟁을 하는 가운데, 투쟁 속에서 투쟁이론(레닌에 이하면 혁명이론)이 필요하고, 투쟁이론이 노동자계급에게 확산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알튀세에게 있어 이론은 실천의 한 범주이다. 투쟁의 주요측면으로서 이론이라기보다는 이론의 영역 자체가 독립되어 있는 정치적 실천과는 별도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은 상호 변증법적인 관계이다. 예를들면 다른 나라의 실천을 통해 자국의 실천이나, 당면임무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되는 차원에서의 이론, 말하자면, 실천과 이론의 상호작용이라는 차원의 그러한 이론이다. 과학적 이론에 의하여 과학적 실천이 담보되고, 투쟁을 한 단계 상승하며, 한 단계 상승한 투쟁속에서 다시 새로운 이론이 탄생되는 그러한 관계이다. 알튀세에게 있어 이론은 여러 실천중의 한 영역에 불과하다.

 

  이것은 알튀세가 정의하는 실천 자체가 대단히 자의적인 것에서 연유한다. 알튀세는 실천을 “일차재료를 특정한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모든 과정”(저작 ①, 197쪽)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실천이 하나의 동일한 복합적 총체성에 속해있지만 실재적으로 구분되는 상이한 실천들이 존재한다.”(저작 ①, 198쪽)고 주장한다. 이렇게 사회 속에서 즉 복합적 통일체로서의 사회 내에 존재하는 실천은 4가지가 있다. “1) 특정한 생산관계의 틀 내에서 자연을 유용한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실천, 2) 특정 사회적 관계를 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변형하는 정치적 실천, 3) 인간들의 의식이라는 자신의 대상을 변형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실천, 4) 마침내 이론적 실천, 즉 사람들이 실천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실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실천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고려하고, 연구하고, 판단하는 행위(저작 ①, 198쪽)”등이다.

 

  “이론적 실천은 자신의 前史라고 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이론적 실천과는 구분된다.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용어로 지칭할 수 있는 그러한 질적인 불연속성의 형태인 것이다. 이론적 실천은 말하자면 이제까지 과거로부터 과거의 내용으로 이야기하나 과거와는 다른 어떤 것을 말한다. 과거의 이론을 변형시키는 행위. 과학적 성격의 모든 이론적 실천을 이론이라 한다.”(저작 ①, 199쪽)

 

  알튀세의 이론적 실천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맑스주의적 이론적 실천이 아직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영역들의 변형” 때문이다.(저작 ①, 201쪽) 이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알튀세 ‘이론’의 핵심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아직 도달하지 않았던, 언급할 수 없었던, 사고하지 못했던 그런 영역들에 까지 사고가 도달하여(‘절단’, ‘문제틀’, 징후적 읽기 등을 통해 가능하다) 이제까지의 인식, 이론, 이념이나 의식, 철학, 예술 등을 변형하는 그와같은 행위가 이론적 실천의 핵심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학술활동이나 문화활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데, 이것이 알튀세가 말하는 이론적 실천의 핵심이다.

 

  알튀세는 이론적 실천의 경우 “일반성 I에 대한 일반성 II의 노동에 의해 일반성 III을 생산하는 것”(저작 ①, 222쪽)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일반성 I은 이미 나와 있는 기존의 이론이다. 기존의 이론은 앞서 알튀세가 차용했던 ‘인식론적 절단’, ‘문제틀’, ‘징후적 읽기’등과 같은 일반성 II를 수단으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반성 III이 되는 것이다. 일반성 I이 일반성 III 으로 되는 과정은 어디까지나 “인식 속에서만” 진행된다. 일반성 I 과, 일반성 III은 “질적인 불연속성”이다. 알튀세에 의하면 헤겔은 이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헤겔은 “내적연관성”에 의해, “내재성의 발전모델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모델을 부과”(저작 ①, 227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서 “과일은 과일의 개념이 자기발전에 의해서 과일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과일들이 과일의 개념을 생산”(저작 ① 228쪽)한다.

 

  여기에서 알튀세의 이론적 실천 영역을 뒷받침하는 인식론을 엿볼 수 있다. 알튀세의 ‘이론’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생각하는 인식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인식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관점은 “이론은 ‘실재의 두뇌 반영’이라는 점”에 있다. 다음과 같은 마르크스의 표현이 그것이다.

 

  “나의 변증법적 방법은 헤겔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헤겔에게 있어서는 [그가 이념(Idea)이라는 명칭 하에 자립적인 주체로까지 전환시키기고 있는]사고과정이 현실세계의 창조자이고, 현실세계는 이념의 외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관념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이 인간의 두뇌에 반영되어 사고의 형태로 변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자본론 1권 상],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18쪽)

 

  알튀세는 실재와 실재에 대한 사고간의 관계는 지식의 관계라고 판단한다. 즉 “지식은 그 지식이 적정하든 적정하지 않든 실제관계가 아니며, 사고는 실재에 대한 지식이라고 표현된 그 실재 속에 기입되어 있는 관계라는 점을 의미한다. 실재와 실재의 지식과의 이러한 지식관계는 이 관계 속에 알려진 실재의 관계가 아니다.”(저작 ②, 87쪽)

 

  예를 들어 사과가 있다면 사과라는 개념과 실재 사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사과라는 개념은 어떻게 해도 실재 사과와는 다르다는 점이며, 이것이 이론의 영역이다. 따라서 알튀세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는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이다. 자본주의는 고전경제학에 대한 생산, 노동, 교환 등과 같은 개념을 변형시킨 것에서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이다. 이론은 이론이다. 이론은 이론적 대상에 대한 것이다. 이론적 대상은 경험적 현실로부터 여러 단계 떨어져 있다. 이론적 실천은 사회구성체의 모든 다른 수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그 자체의 내적조직을 갖고 있다. 사회구성체의 한 수준을 이룬다. 이론적 실천의 산물은 사회구조의 기반과는 무관한 것이며, 이론은 여러 가지 생산 가운데 하나의 생산이라고 믿는다. 이론은 사회구성체의 별도의 구조를 갖는다는 개념에 주목하자. 마르크스주의는 ‘두뇌활동의 산물’, ‘모사’, ‘반영’등으로 인간 인식의 기본내용을 구성하나, 알튀세는 사회구성체의 한 구조로서 이론이 존재한다. 이론은 실체이다.

 

  이렇게 해서 ‘이론’은 알튀세에 의해 사회 속에서 엄청난 비중을 갖게 되며, 이론적 실천을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존경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별도의 이론적 실천이 여타의 실천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에, 아니면 최소한 여러 실천중의 하나로 독립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마도 학자들은 알튀세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윤해준은 이와같은 논리에 대해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주체들이었던 노동자들을 깨끗이 망각한 채, 대학의 울타리 속에 안주하는 주체“(평가 ②, 152쪽)로 비판한다.

 

  알튀세는 ‘변증법’을 뱉어내면서 형이상학을 주장하고 있고, ‘마르크스주의’를 뱉어내면서 정신분석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방법을 차용한다.

 

 

  5)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

 

  중층결정은 필자가 판단할 때 알튀세이론의 가장 핵심이다. 일부 사람들은 대개 알튀세의 중층결정이 갖고 있는 기계론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다양한 경험과 사고를 하지 못하는 기계론의 폐해는 사실 알려진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층결정은 알튀세가 사용하는 여러 용어들처럼 마르크스주의 철학 내부에서 만들어진 용어라기보다는 역시 정신분석에서 차용한 것이다.

 

  중층결정은 처음 프로이드에 의해 사용되었다. [꿈의 해석]에서 프로이드는 잠재적이라 할 수 있는 꿈이 하나의 생각에서 다른 것으로 자리이동하거나 혹은 하나의 이미지가 여러 사고의 응축(condensation)으로 변하는 것을 중층결정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내용이 명백하거나 어떤 이미지가 명백한 경우일 때에도, 내용 혹은 이미지는 관계 속에서 의미 있는 요소들의 다양성에 의해 중층-결정된다.

 

  알튀세에게 있어 중층결정은 모순의 다양성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으로서 사회구성체의 복잡한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중층결정된 모순은 존재가 갖고 있는 고유조건을 반영한다. 이리하여 중층결정은 모순이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알튀세의 중층결정이란 사회구성요소의 그 어떤 영역(예를들면 경제, 정치, 이념 등등)도 지배적인 지위를 갖지 못하고, 전체의 존재 자체(혹은 전체의 복합성)에 다름 아니라는 주장이다.(저작 ①, 249쪽) 마르크스나 레닌이 어떤 사회의 조건, 고유의 문제, 특수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회가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여러 측면에 대한 검토를 의미하며, 구체적인 평가를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깊은 탐구와 실천과정상의 여러 반성, 모색이 결합된 것이다. 그러나 알튀세는 사회의 각 여러 영역들이 복합되어 있고 각각은 개별요소로서 병렬되어 있는 것에 가깝다. 알튀세에게 이것은 ‘이론’인 바, 결코 경험적인 영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알튀세에게 있어 특수성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사회는 그 시점에서 그 자체가 하나의 전체이며, 경제와 정치, 이데올로기는 복합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특수성에 초점을 두기 보다는 복합적인 것 그 자체로서 고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실천과 전혀 연관될 수 없다. 중층결정의 개념은 특수성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복합성의 개념이다. 중층결정은 사회의 여러 항목이 각각 모두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다.

 

  “조건들이 복합적 전체의 당면한 존재에 다름이 아니라면, 그 조건들은 복합적 전체의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의 서로간의 유기적 관계를 각자가 반영하고 있는, 복합적 전체의 모순들 자체이다.”(저작 ①, 249쪽)

 

  알튀세는 “각각의 모순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모택동의 모순론에 나오는 모순이라는 개념과 자신이 사회구성체 상의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각각의 영역을 얼핏 보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각각의 모순은 자신이 그 속에서 존재하는 복합적 전체의 지배라는 구조를, 따라서 이 전체의 현재적 존재를, 따라서 당면 ‘조건들을 자신 속에 반영하기 때문에, 조건들과 하나를 이룬다.”(저작 ①, 249쪽)

 

  알튀세는 “모순이 더 이상 단일한 성격의 것일 수가 없다”(저작 ①, 251쪽)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이렇게 모순이 단일성격이 아니라면 모순이 모호해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알튀세는 사회 전체가 중층결정 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적 실천과 이론적 실천에 의하여 설명할 수 있다. 정치적 실천에 의하여 모순이 응축되고 결정적 폭발이 된다.

 

 “사회에는 여러 층위가 있는 데, 층위들 간의 위계를 불변적으로 정해버리고 그 본질과 역할을 고정시키고 층위들 사이의 관계의 의미를 단일하게 규정하는 것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이 아니라 경제주의이다.”(저작 ①, 255쪽) 즉 각각의 모순 속에서 가장 중요한 모순은 없다는 것이며, 모순들은 중층결정된다.

 

  이같은 알튀세의 논리는 변증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는 것이며, 특히 ‘모순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하는 것이다.

 

  ‘모순론’에서 모택동은 교조주의와의 투쟁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소련의 ‘데보린학파’에 의한 교조주의나, 중국공산당 내부의 소위 ‘진독수주의’등의 교조주의에 대한 투쟁을 위해 정확한 변증법적 인식이 필요한바 모순론은 그런 목적으로 서술된 것이다. ‘모순론’에서는 모순의 ‘보편성’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후 모순의 특수성, 모순의 개별성, 특수-보편-특수로 진행하는 모순의 발전과정과 특수와 보편의 통일, 개별과 일반의 통일, 주요 모순과 모순의 주요측면 등을 강조한다. ‘모순론’의 내용을 대략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물이나 사회에는 모순이 있으며, 이것이 모순의 보편성이다. 모순의 보편성은 ‘반드시’ 모순의 특수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사회의 발전을 위해선, 모순의 특수성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 사회속의 여러 모순에는 ‘반드시’ 주요모순이 있고, 주요모순에 대한 해결을 중심으로 여타의 모순을 해결한다. 등등.

 

  다음과 같은 모순론의 구절은 이를 뒷받침 한다.

 

  “특수한 모순은 그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특수한 본질을 구성한다.”([모택동선집],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1, 370쪽)

  “모든 사회 형태 및 사유형태는 각각 자기의 특수한 모순과 특수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모순론, 위의 책 370)

  “모순의 특수성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그것을 그 연관속에서, 그 총체에서 고찰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각계 단계의 모순의 각 측면으로부터도 고찰하여야 한다.”(모순론, 위의책 377)

  “구체적 분석을 떠나서는 어떠한 모순의 특성도 인식할 수 없다.”(모순론, 위의 책 378쪽),

  “일반성은 일체 개별성 가운데 존재한다. 따라서 개별성이 없으면 일반성도 없다.”(모순론, 위의 책381)  

  “과정 가운데 있는 모순을 균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되며, 그것들을 반드시 주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의 두 부류로 구별하고 주요모순을 파악하기에 치중하여야 한다.”(모순론, 위의 책 383쪽)

  “모순과 투쟁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지만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 즉 투쟁의 형태는 모순의 성격이 다름에 따라 서로 다르다.”(모순론, 위의 책 395쪽)

 

  그런데 알튀세의 모순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변증법적 관계에 초점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토대나 상부구조 각각의 병렬, 복합성 등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이다. 토대와 상부구조간의 내적 연관과 통일성, 토대와 상부구조간의 상대적 독자성 등은 구체적인 시기와 조건에 의해서 대단히 구체적인 상황으로 판단해야 하는 문제이지 어떤 일반화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알튀세의 ‘중층결정’이라는 용어는, 용어자체가 정신분석에서 빌려왔다는 점을 그냥 무시한다면,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의미가 모두 포함된 2가지 의미를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해보자.

 

  첫째 긍정적의미라고 판단할 때 중층결정의 논리는 기계론적 사회관, 기계론적 역사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알튀세가 기계론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을 했기 때문에 그 점을 높이 산 평가이다. 둘째 부정적 의미가 있다. 알튀세는 엥겔스의 “최종단위에서의 결정”이라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최종단위는 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사회 전체를 볼 때 토대와 상부구조 각각이 늘 존재하고 있고, 각각의 영역은 모두 중층적으로 작용한다는 논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실천에서 필요한 것은 모택동이 강조한 “주요모순”이 무엇이냐에 있으며, 특수성이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 특수하며, 왜 지금 여기서 이런 조건에서 나타났는가? 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다.

 

  알튀세의 저작을 아무리 읽어봐도 긍정적 의미보다는 부정적 의미가 더 크다. ‘중층결정’이라는 의미가 만일 특수성에 초점을 둔 것이라면 그것은 모택동의 서술이 더 확실하다. ‘중층결정’이라는 의미가 만일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그리하여 상부구조가 토대를 결정짓는 요인이거나 혹은 토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영역이라면 그것은 비 변증법의 전형적인 사고일 뿐이다. 알튀세는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알튀세는 모순의 특수성, 모순의 개별성, 모순의 주요측면 즉 주요모순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사회구성체상의 경제와 정치, 이데올로기 영역의 복합성, 중층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모순론’에서 다음과 같은 살아있는 변증법과는 관계가 먼 것이다.

 

 “우리는 전체로서의 역사발전에서는 물질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을 결정하며,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또 정신적인 것의 반작용, 사회적 존재에 대한 사회적 의식의 반작용, 하부 구조에 대한 상부구조의 반작용도 인정하며, 또 반드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물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계적 유물론을 피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견지하려는 것이다.”(모순론, 위의책 387쪽)

 

  이상에서와 같이 알튀세의 핵심용어와 개념으로부터 판단하여 볼 때, 알튀세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에 가깝다. 다만 그의 철학소재가, 그의 글속의 소재가 마르크스주의일 뿐이다. 그의 핵심이론이나 용어는 정신분석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누구나 다 마르크스를 언급하고, 누구나 변증법을 뱉어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를 이야기한다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더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