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의료와 신자유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히포크라테스)

파랑새호 2007. 5. 21. 01:02

  의사라는 직업은 이미 전문직으로 자리 잡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중 대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다만 남자들의 경우 군복무까지 합하면 12년 - 13년이라는 세월동안 훈련받아야 나름대로 진료를 할 수 있는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겪는다고 해서 의사가 되기 싫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의사라는 신분, 의사라는 직업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기 때문에 돈과 명예가 동시에 주어진다. 얼마 전 방영된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도 의사들의 생활을 다룬 바 있다. 환자와의 관계, 동료 의사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의사는 다른 조직의 사람들과 대개 비슷한 양상이었지만, 역시 의사라는 직업이 주는 선망을 없애지는 못한다.

 

  의료는 의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영역이다. 의사가 없는 의료행위란 상상할 수 없으며, 모든 의료행위는 의사의 역할에 다름 아니다. 일반인들은 그저 의사의 진료에 자신을 내맡길 수밖에 없으며, 모든 진료행위는 의사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고 있다. 사람의 생명과 건강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해서도 결코 부차적인 지위로 내몰릴 수 없다.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다룸에 있어 그 어떤 기준도 소용없고, 오직 진료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히포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대개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실패’라는 영역에 의료를 포함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하게 될 때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중의 기본원칙이라 할 수 있는 ‘시장에서의 교환’이라는 제도가 적용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개 돈을 지불하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받게 된다. 돈을 지불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품이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영역은 거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유독 의료에 대해서만 비록 돈이 지불되지 않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위독할 경우 일단 ‘진료’라는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훨씬 강하다. 돈 없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는 사고가 보편적이다.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일단 사람을 살리고 봐야한다는 이런 사고는 사실 자본주의 철학과는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이윤이 보장되지 않는 모든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을 때 의료행위 또한 자본주의에 걸 맞는 이윤보장행위로 거듭나야 했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의 실패’는 곧 ‘존재할 수 없다’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의료는 예전처럼 인간의 생명을 우선할 수 없다. 오직 돈과의 교환을 보장하는 한에서만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영역으로 ‘변신’해야 했다. 신자유주의는 철저하게 돈이 우선인 의료, 이윤이 우선인 의료를 추구하여 의료의 창시자 히포크라테스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신자유주의는 히포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보면 의료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그런 철학이자, 체제이다.

 

 

[히포크라테스], 자크주아나지음, 서홍관옮김, 아침이슬, 2004년

[히포크라테스의 발견], 반덕진지음, 휴머니스트, 2005년

 

 

  비단 의료에 대한 관심이 없어도 히포크라테스에 대해선 공부해볼 만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철학사를 공부하기 위해 책을 펼칠 때 거의 모든 책이 ‘탈레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탈레스로부터 시작하는가? 이 세상이 신의 세상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물질의 세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 탈레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유물론으로 출발했다는 고전적인 주장은 뒤로하자. 고대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단지 유물론이라는 한마디로 쉽게 개념 규정할 수 없는 훨씬 더 넓은 영역을 포괄한다. 히포크라테스는 바로 그 점을 웅변하는 사람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과학이 이제 막 태동하던 그 시대에 ‘사람’에 주목했으며, 당시에 밝혀진 모든 학문적 성과를 의료로 집중시켰다. 노예제도가 지배구조로 자리 잡은 그 시대에 노예와 노예주를 구별하지 않았으며, 사람에게 ‘남성’과 ‘여성’이 있음을 주목했다. 미신이나 권력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구체적인 관찰을 통해서, “보이는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통해서 히포크라테스가 목표로 한 것은 사람의 건강이었다. 주아나는 히포크라테스의 “가장 위대한 장점 가운데 하나는 관찰하고 기록하는 능력”이었다고 주장한다. 히포크라테스가 자신의 모든 지식, 경험, 기술을 동원하여 질병과의 투쟁에 나선 이유에 대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의술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구절을 제시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전문가의 우월성, 전문가의 독단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이 전문가의 이야기를 신뢰할 수 있도록,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고, 문화에 자신들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환자를 설득하기 위해 그는 ‘수사학’까지도 배웠다. 철저한 인간중심의 사고, 인간중심의 철학은 히포크라테스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히포크라테스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자크주아나의 책이 더 효과적이다. 비록 책값이 너무 비싸고(35,000원주고 샀다. 출판사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돌려 읽는 것이 좋겠다.)분량도 600쪽 이상 되는 엄청난 양이며, 번역을 한 문체라서 한글 특유의 긴장감이 없는 것이 단점이다. 그러나 이 책은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이나 의미가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다. 반덕진의 책은 주아나의 책보다는 만원 정도 싸고(23,000원) 분량도 200쪽 정도가 더 적다. 자크 주아나의 책과 상당부분 일치하지만 히포크라테스의 역사적 의미를 약간은 퇴색시키는 느낌을 받는다. 반덕진의 원래 의도는 아니겠으나 그는 ‘윤리’, ‘실증주의’라는 말을 통해 히포크라테스가 갖고 있는 의미를 너무나 현대의 용어로 간략하게 정리하는 느낌을 받는다. 아울러 당시의 문헌이나 시대적 배경에 너무 많은 양이 할애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그런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