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연극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영화-밀양)

파랑새호 2007. 6. 11. 11:05

세 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거기에 서 있던 사람들 몇이 이 말을 듣고 "저것 봐!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르는구나" 하였다. 어떤 사람은 달려오더니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 끝에 꽂아 예수의 입에 대면서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공동번역 성서, 마르코복음 15장 34 - 37)

 

영화 밀양은 맑고 푸른 ‘하늘’이 첫 장면이다.(똑같은 ‘하늘’이 주인공의 아들이 유괴되어 변사체로 발견된 날 다시 나타난다.)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아주 대조적으로 지저분하고, 쓰레기와 폐기물이 뒹구는 ‘땅’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이 자살을 통해 저항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무서워서 죽지 못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발광하면서 결국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미장원에서 못다 자른 그녀의 긴 머리를 잘라낸다. 머리카락이 떨어진 그 땅, 땅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하늘’과 ‘땅’의 대비, 대립이 밀양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노예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그 이후 기독교는 한번도 자리바꿈을 하지 않았다. 중세시대에 기독교는 지주를 떠 받들어주는 이데올로기였다. 사실상 사제계급과 지주계급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이었다. 토마스 뮌쩌라는 사제에 의하여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록 사제가 주도한 농민전쟁이고 농민 다수가 참여한 전쟁이었지만, 그런 이유로 기독교가 피지배계급의 종교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중세가 몰락하고 지주계급이 몰락하여, 모든 개인의 신분이 자유롭게 되고, 신흥지배계급 부르주아가 나타났을 때, 기독교는 ‘근검’과 ‘절약’정신으로 무장하여 다시 지배계급의 종교로 거듭났다. 중세의 기독교를 가톨릭이라 하고, 자본주의 기독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사회학자들이 구별하여 지칭하더라도, 기독교가 지배계급의 종교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경제적 양식이라고 주장하게 한 결정적인 배경이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체제를 지원한다고 주장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그 유명한 명제도 나타났다.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기독교는 한국에 이식되었다. 이식된 지 20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는 명실상부 한국 최대의 종교이며, 우리 삶의 모든 곳에 구석구석 파고들고 있다. 말, 정신, 행동, 관계 등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리하여 한국은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거의 매일 하느님에 대한 회개, 하느님의 구원과 용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거듭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매일 회개하기 위한 전제인 약탈, 강간, 유괴, 강도 등 반인간적 범죄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반인간적 범죄행위 후에 그들은 거의 매일 회개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영화 ‘밀양’에서처럼 그들을 매일 용서하고 구원한다. 영화 밀양을 좋아할 사람은 두 부류이다. 모든 범죄자를 깡그리 씻어 없애자는 파시스트이거나 혹은 종교를 싫어하는 급진주의자들.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땅이 아닌 하늘에 대한 믿음과 하늘에서 부여한 질서에 자신의 세계관과 자신의 인생 자체를 내맡기는 현상. 이것은 지독한 모순이다. 그렇다. 우리네 삶은 온통 모순투성이다. 영화 밀양은 소설가 김훈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우리가 의지해야하는 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가 적인 상황에서, 모두가 나 아닌 타인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은 교통사고로 죽거나 유괴되어 죽는 이 세상에서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적어도 이 힘든 육신의 삶속에서 일주일에 한번은 위로받기를 원한다. 일주일에 한번 위로받지 못한다면 아마도 살 수 없을 것이거나 미쳐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신 전투현장으로. 살기위해, 살아남기 위해 다시 전투현장으로. 의지하고 의지하자. 우리 뒤에는 든든한 하느님이 계신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의지하여 살아보고 싶다. 온전히 나를 내맡기자. 제발 나를 맡아줘. 나를 버리지 말아줘.

 

그러나 하느님은 저 하늘위에 계신다. 하늘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고, 하늘나라를 기다리기 위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늘 깨어 있을 수도 없다. 늘 깨어 있기에는 삶이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 사람들은 모두 엘리야가 “병거타고” 내려와 예수를 십자가로부터 내려주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하느님의 아들이 저토록 괴로운데, 하느님의 아들이 저토록 고생하는데 하느님이 과연 가만히 있겠는가라는 그 실날같은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길 간절히 원하면서. 하느님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영화 밀양의 여주인공은 결국 무서워서 죽지 못했다.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그 위로아닌 위로가 장례식 상주에게 가장 많이 전해지는 말이듯이, 죽기는 너무 어렵다. 죽어야 하느님을 만날 텐데, 우리는 죽기가 너무도 어렵다. 그래서 그냥 산다. 죽지 못해 산다.

 

 (죽고싶지만 무서워서, 두려워서 죽을수 없다)

 

하느님의 질서를 이 땅위에 구현하는 시도는 모두 어리석다. 언제, 어디서 하느님의 질서가 이 땅위에 나타났는가? 도대체 하느님의 질서는 무엇인가? 자신의 아들마저 죽여야 하는 이 세상일진대, 우리가 무엇을 위해 하느님에게 의지하는가? 우리는 다만 땅의 괴로움, 땅의 모순, 땅의 불행을 잊기 위해 하느님을 찾는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지만 그 허상을 위해 그 신기루를 위해 하느님을 찾는다. “그냥 햇빛이에요.”라고 주장하는 여주인공. 그러나 그 속에 비밀이 있다. 비밀의 빛. 밀양 아닌가? 비밀을 느꼈다고 하는 그 순간, 여주인공은 그 비밀을 혼자서 간직하기에는 가슴 벅차 자신의 아들을 죽인 학원원장을 찾아 교도소를 방문한다. 그리고 이미 그가 하느님을 통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음을 목격한다. 이제 그 빛은 다시 비밀이 된다.

(교도소 방문 후, 다시 비밀의 빛으로 변하는 순간)

 

인간은 늘 자신이 강해야 하느님도 강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은 늘 하느님이 자신의 감성과 일치해야만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은 인간과 한 몸인 셈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독한 착각이다. 하느님은 늘 인간의 한계 속에서 나타났고, 한번도 그 한계를 뛰어넘은 적이 없다. 성경속의 그 수많은 기적, 가끔 나타나는 현실의 그 기적 같은 현상들은 어쩌면 하느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세상은 어쩌면 추잡하고 더럽고 모순된 이 세상 자체일지도 모른다. 온갖 고통으로 점철되고 있는 세상, 죽기는 어렵고 살기는 힘든 이런 상황이 하느님이 만든 이 세상이다. 더 이상 하느님에게 기대하지 말자. 우리 모두는 죽을 때 예수가 소리쳤던 것처럼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죽자.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