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연극

열한번째 엄마(룸펜프롤레타리아의 일상)

파랑새호 2007. 12. 3. 10:36

우선 김혜수라는 여자배우가 이런 영화에도 출연을 하니 의외라는 생각이다. 영화 ‘열한번째 엄마’는 한국 저소득계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룸펜프롤레타리아의 일상 자체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이든, ‘프롤레타리아’이든, 혹은 프롤레타리아 축에도 아직 끼지 못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든 사람 사는 일상생활을 주제로 할 때는 영화 보다가 졸기 십상이다. 경제적 궁핍이 있고, 경제적 궁핍 속에 생존에 대한 본능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생활일지라도 그것이 사람의 생활일진대 대개 모두 비슷하다. 하지원과 임창정이 주연했던 ‘일번가의 기적’이라는 영화와 주제 자체는 동일하다. ‘일번가의 기적’에서도 아이들이 나타나고, 하늘을 날고 싶은 강렬한 꿈이 나타난다. ‘일번가의 기적’에서는 직접 하늘을 날고 싶어 파라솔을 타고 날아간다.

 

 (모든 아이들의 꿈은 하늘을 날아가는 것인가? 하늘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아니다.)

 

‘열한번째 엄마’에서는 새를 그린다. 새를 타고 날아가는 그림을 그린다. “나도 그 새에 태워줄래.” 김혜수는 자신의 아들에게 부탁한다. 나는 영화속에 나온 그 그림이 맘에 들어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아쉽게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영화 ‘열한번째 엄마’에서 나오는 아들은(김영찬) 아주 강한 생활력을 우선적인 특징으로 한다. 룸펜 중에서 영화속의 아들처럼 ‘강한 생활력’을 갖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활력이 강한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겨우 프롤레타리아로 변신할 수 있다. 졸라 피나는 노력. 그럴 때만이 룸펜은 살아남는다. 수많은 룸펜들은 영화속의 아빠처럼(류승용), 혹은 옆집 아저씨처럼(황정민)그저 돈 많은 사람에 기생하면서 한건하려하거나 무능력한 일상을 보내야 한다.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도 만들지만, 룸펜 프롤레타리아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룸펜은 프롤레타리아의 공급소이면서 징벌소이기도 하다. 프롤레타리아는 끊임없이 룸펜으로부터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자본에 복종해야 한다는 세계관을 주입 당한다. 룸펜에게 내일은 없다. 열한번째 엄마 김혜수도 죽었다. 길 건너 반듯한 놀이터가 있는 아파트가 룸펜에게는 꿈이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 더러움, 불안정, 멸시와 모멸, 끊임없이 통증을 전달하는 질병.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나다.

(내일은 없다....)

 

룸펜이 폼나게 성공해야 한다는 해피 엔딩은 영화의 흥미를 더 반감시킬 것이다. 그냥 담담하게 룸펜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영화가 사실을 드러낼 때 그냥 드러내는 경우는 없다. 드러내는 이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열한번째 엄마’의 이유는 무엇일까? 룸펜도 사람인 이상 사랑과 애정이 있다는 것인가? 췌장암은 빨리 죽는다는 것인가? 사기치면 교도소에 간다는 것인가? 그냥 사람을 슬프게 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자꾸 눈물을 흘리면 득보다는 실이 많다. 눈물은 반드시 과정 속에 그냥 한번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눈물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