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

파랑새호 2007. 12. 11. 15:27

[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 유채림 지음, 새움출판사, 2006년

 

소설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는 실제 화가 ‘한묵’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화가가 주인공인 만큼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예술과 관련되어 있다. 예술이 우리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예술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예술을 인생의 큰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만의 의미로 끝나버린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다른 사람에게 삶의 풍요로움을 주는 것에 예술의 의미가 있다. 배우들, 문필가들, 소설의 주인공인 화가들에게 자신의 연기, 글, 그림이 어떠한 메시지나 느낌을 전달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술은 타인과 공유하는 것에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의 주인공 ‘한’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나의 사실에서 무언가를 특히 강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면 화가는 사실의 세계를 이미 떠난 것이 된다. 떠오르는 해를 강조하면 바다가 죽고, 여성의 육감을 강조하면 모성적 부드러움이 죽고, 쓰러져가는 농가를 강조하면 밝고 화려한 색이 죽어버리는 것이다.(60쪽)

      난 어떤 선택된 주제에 따라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모름지기 견딜 수가 없다. 뇌릿 속에 스치는 어떤 것을 포착해, 내 감정이 안내하는 대로 그것을 펼쳐 보이고 싶을 뿐이다. 사는 데까지 살고, 내 방식대로 그리는 데까지 그리는 거야.(107쪽)

      다들 비를 피해 움츠리는데, 느릿느릿 빗속을 걷는 보헤미안을 볼 줄 아는 것, 살벌한 집선봉 벼랑 끝에서 오히려 낮잠을 즐기고 있는 어떤 환상을 볼 줄 아는 것, 그림은 언제나 있는 것 너머를 그려내야 하는 것이거든.(127쪽)

      한은 깊어가는 여름을 짙은 녹음 따위로 표현해 내려는 빈약한 상상력에 대해서는 구역질을 느낀다.(158쪽)

      어떤 강제에 의해 그려냈다면 그게 자신의 그림이 되겠는가. 그는 자신의 표현 세계로부터 여하한 물러날 생각이 없다. 자유로운 창작생활을 통해 자신의 표현 세계가 한층 무르익는, 그런 세계만을 애원한다.(158쪽)

      사실적인 것보다 수많은 상징을 담은 그림들이 때론 이렇게도 가슴에 와 닿는구나 싶네요.(198쪽)     

      구상을 상실하면 그 대신 감각적인 현실 세계와 본능적인 접촉을 하게 되는 거지. 오브제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해방이 됐다는 거니까, 힘은 아마 그 자유로움으로부터 분출 되는게 아닐까?(277쪽)

      다 드러내지 않고 반쯤만 드러내고 있는 비구상 회화야말로 얼마나 치열한 작가정신이냐구? 관객은 드러나지 않은 나머지 반을 통해 끝없이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펼쳐나가는 거지.(278쪽)

 

즉 소설의 주인공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에 대해선 거부감이 있다. 선과 도형에 의한 고도의 추상이 그림의 절대적 조건이 된다. 작가의 상상력과 관객의 상상력이 꼭 일치하리라는 법은 없다. 보는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각자의 자유로운 상상으로 그림의 빈곳을 채운다. 어쭙잖은 사실묘사는 빈약한 상상력만을 드러낼 뿐이다.

 

[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는 고등학교 때 읽었던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를 생각나게 했다. [달과 6펜스]는 나에게 예술과 철학에 대해 많은 감동을 줬다. 일상의 편안함을 뒤로하고 오직 예술을 위하여 가정과 직장을 버린 주인공의 삶은 과연 진정한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해 젊은 고등학생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그가 자신의 인생 최후로 그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기 위해 나는 당시 종각에 있었던 ‘종로서적’에 갔었다.  명화집을 뒤져 마침내 그림을 보았다. 아쉽게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감동’은 없었다. 다만 작가 자신이 원하고, 드러내고 싶고,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인지를 추측했을 뿐이었다. 소설의 감동 때문이었을까, 하여튼 난 그림이 멋있어 보였다.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도 [달과 6펜스]와 주제는 거의 같다. 다만 [달과 6펜스] 주인공의 경우 본인이 원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자발적으로 고생하는 반면,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는 체제가 요구하는 그림보다는 자신의 그림을 고수하기 위해 일상으로부터 밀려난다. 원인이야 무엇이든 혼자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추구해 간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같다.

 

개인적으로 추상화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소설 속 주인공의 견해에 동의 할 수도 없다. ‘치열한 작가정신’이 비구상화에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림에 대해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이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를 읽다보면 그림에 대한 자연스런 지식을 얻게 된다. 소설이 주는 부수적 효과이다. 소설 속에는 다음과 같은 화가들이 등장한다.

 

외국화가 - 쿠르베, 앵그르, 들라크루아, 마르셀뒤샹, 피카소, 칸딘스키, 고흐, 세잔느, 루오(Rouault), 모딜리아니, 엘 그레코(El Greco), 틴토레토, 티치아노, 고야, 벨라스케즈, 마네, 제르벡스, 카라바조, 마사치오, 뭉크, 롤랑

한국화가 - 정선(진경산수), 김규진(금강산만물초승경), 최북, 길진섭, 유영국, 김환기, 김관호, 김찬영, 일제말기 친일파 화가들인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심정구, 한국전쟁 후에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했던 박고석, 이규상, 김경, 문신 등

 

소설에서는 위 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주인공의 견해가 서술된다. 단지 이름만 언급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 평가를 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위 화가들에 대한 인터넷 검색은 필수이다. 다행히도 인터넷은 위의 모든 화가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금강산최후의 환쟁이]를 읽다보면 우리말을 살려내고, 또 말의 ‘조탁’을 위한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문장을 갈고 다듬기를 수없이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사물에 대한 묘사, 풍경에 대한 묘사, 사람에 대한 묘사는 뛰어나고 내용도 풍부하다. 다만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갈등, 심리묘사 등에서는 약간 허전한 면을 느낀다. 특히나 사회주의 체제가 주인공에게 강요한 리얼리즘에 대해 주인공의 치열한 고민이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또한 전체 300쪽에 달하는 내용 중 거의 4/5에 해당하는 양이 금강산의 생활을 다룬다. 일본유학시절, 금강산을 내려와 지낸 피난시절과 서울생활, 외국생활은 지극히 간략하다. 소설의 구성상 금강산 내용은 3/5정도로 하고, 다른 생활에 대한 서술이 더 길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한겨레신문에 작가인터뷰와 서평이 있다. 참조하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