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문제

진보에 대하여 -1

파랑새호 2008. 2. 4. 15:17

1. 문제제기

현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현상은 특정한 이론이나 원리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현실은 다채롭고, 기이하며, 때론 터무니없지만 늘 풍부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질문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사로잡았다.

 

한국의 대선에서는 이명박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다.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치에 관심 있고, 신문정독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저런 잡다한 근거를 얼마든지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명박을 당선시킨 2008년의 대선을 보면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후에, 루이보나파르트가 당선된 선거를 떠올렸다.

 

맑스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루이 보나파르트는 공화정의 대부르주아지에게 신물 난 분할지 소유 농민들과 프롤레타리아, 소부르주아지가 “몽땅 나폴레옹에게 찬성투표 한 것”에(‘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칼 맑스, 최인호 번역,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 김세균 감수, 박종철 출판사, 1992년, 44쪽) 의해 상대후보 까베냑의 100만표와 비교할 때 600만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대통령에 뽑혔다. 맑스에 의하면 당시 까베냑은 대 부르주아지의 대표였으며, 루이 보나파르트는 까베냑의 반대자였다는 이 구도가 나폴레옹 당선의 결정적인 기반이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부르주아 집단의 어떤 분파도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프랑스혁명이후 소외되어 있던 농민에게 주목했고, 룸펜이라는 행동대원을 포섭하여 선거에서 승리했다.

 

신자유주의에 충실했던 노무현 정부는 경제 때문에 이명박을 당선시킨 일등공신이다. 주식시장의 강세, 수출의 역대 최고 실적, 외환보유고 역대 최고 등 주류경제학에서 볼 때 성공적인 경제운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외면당한 이유는 ‘어설픈’ 혹은 ‘어정쩡한’ 정책 때문이다. 어정쩡한 부동산 정책으로 가진 자를 배불리 하다가 그나마 집 한채 갖고 있던 중산층의 자산증가마저 막아버렸다. 어설픈 비정규직 정책으로 기업 측에서도 노동자 측에서도 어느 하나 환영받지 못했다. 이랜드 사건은 이랜드의 사용자 집단이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랜드 사용자는 형식상 완전한 ‘합법’행위를 했다. 그러나 법의 취지에는 어긋난다.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은 아주 어정쩡한 내용이다. 이런 식의 정책들이 노무현 정권에서는 아주 많다는 느낌이다. 상당수의 사람들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데, 무언가 진보적인 정책집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어설픈 느낌이 강하다. 사람들은 어설픈 진보, 얼치기 진보를 비판하면서 싸잡아 진보진영 자체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이명박은 대기업 자본 분파, 금융자본 분파, 상층 관료집단 외에도 상당수의 중산층과 노동자들로부터 지지 받았다.

 

이렇게 이명박이 당선되는 상황에서 과연 진보는 무엇을 했나? 일반 국민들에게 ‘노무현’은 곧 진보이다.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노무현이 진보로 인정받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노무현에 대해 얼치기진보라고 생각한다. ‘얼치기진보’라는 것은 진보흉내를 내지만 사실상 진보가 아니라는 차원에서 쓰는 말이다. 말하자면 위장된 진보이거나, 서툰 진보를 일컫는다. ‘얼치기’라는 말의 반대말로 ‘제대론 된’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얼치기 진보’라는 말은 자신들을 진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면서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얼치기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감도 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얼치기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얼치기 규정은 소위 ‘진보진영’의 고질적인 파벌싸움으로도 보일 수 있다. 특히 진보진영 일부에서는 “대중들은 ‘얼치기진보’에 싫증이 나서 보수를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김규항을 예로 들어보자.

 

김규항의 블로그에 나와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단적인 사례이다.

 

문제는 그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진보라 선전되는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데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개혁에 인민들의 삶이 거덜 난 건데 인민들은 진보 때문에 거덜 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된 책임은 인민들에게 신자유주의 개혁을 진보라 착각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게 노무현 정권이 아닌가요?

 

그들만은 아닙니다. 사실 그들이야 자신들이 진보라고 하지, 진보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력이라고 하겠습니까?

 

조중동 같은 수구 언론 때문인가요?

 

조중동이 개혁정권을 좌파로 왜곡한다고들 하는데 그건 한국의 극우파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곡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군사파시즘에 빌붙어 살아온 그들에게 민주화 운동하던 사람들은 모조리 빨갱이로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 이명박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조중동에 사로잡힌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 누군 때문인가요?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과 미디어들입니다. 한겨레와 경향 그리고 그 신문들에 기고하는 ‘거의 모든’ 지식인들 말입니다. 메이저 시민운동 세력들, 창비니 민족문학작가회의니 민예총이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니 하는 곳들 말입니다. 그들이 인민들을 이명박에게 몰려가게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다는 건가요?

 

그들은 언제나 개혁과 진보를 뭉뚱그려 말했지요. 지난 수년 동안 그들이 입이 닳도록 사용한 ‘개혁진보세력’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그래도 이명박만은 막아야 한다” 소리치고 있지요.

 

만일.. 그들이 개혁과 진보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개혁정권에 실망한 사람들이 이명박에게 가는 게 아니라 진짜 진보를 찾아 가겠지요. 민노당이나 그보다 급진적인 정치세력으로 말입니다. 그랬다면 한국은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좌와 우가 균형을 이루기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로소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출처 ; 김규항의 블로그 2007년 12월17일, ‘왜 사람들이 이명박에 몰려갈까요?’에서 인용함)

 

김규항은 “개혁과 진보를 구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소위 ‘개혁진보세력’과 같은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김규항은 “진짜 진보”라는 표현을 “급진적인 정치세력”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김규항은 진보세력도 아닌 “지식인이나 미디어가 진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서 국민들이 진보를 싫증내고, 따라서 보수인 이명박을 지지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특히 지식인이나 미디어에 대해 정조준하며 비판하고 있다.

 

나는 김규항의 논리가 언제부턴가 참으로 독단적이라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만일 국민들이 ‘진짜 진보’가 아니라, 자신을 진보라고 주장하는 개혁세력 사람들에게 싫증이 났다면, 그래서 김규항의 말대로 ‘위장된 진보’에 싫증이 났다면 ‘진짜 진보’를 찾는 것이 다음순서가 되어야지 왜 이명박을 찾는가? 진짜 진보를 찾다가 갑자기 보수를 찾게 된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금번 대선결과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노무현의 경제정책에 싫증이 났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국민들은 노무현을 진보로 인식하고 있어 노무현의 경제정책은 곧 진보의 경제정책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진보 보다는 보수를 선택한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국민들의 보수 성향이 강화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인식이 곧 “국민들은 위장된 진보 때문에 진보에 싫증이 나서 이명박을 찍었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수 없다. 김규항의 인식에는 자칫 지나치기 쉬운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전제로 되어 있어 논리적 으로 성립할 수 없다.

 

김규항의 논리에는

첫째, 국민들이 진짜진보와 가짜진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국민은 바보’라는 인식(그러나 김규항 자신은 구별하고 있다는 자신감),

둘째 국민들의 상당수가 아직 진짜 진보를 모르지만 진짜 진보를 알게 되면 지지할 것이라는 인식,

셋째 민주노동당이나 급진적인 정치세력의 진짜 진보와 진보로 위장한 개혁세력은 구별해야 한다는 인식 등 3가지 내용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지식인의 자기 우월적 상황인식에 불과하다.

 

이글은 굳이 김규항 일인을 비판하기 위해 작성된 것은 아니다. 진보의 정확한 개념을 적용하고 진보세력의 올바른 연대를 위한 시론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통칭하여 진보세력이라고 말할 때 진보의 범주, 내용에 대해 아직은 불완전하며, 합의된 것이 없다고 인식한다. 정치인들은 진보나 보수라는 단어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기성 정치인들과 지식인을 싸잡아 비판하는 김규항 식의 ‘진짜 진보’라는 단어도 나와 있는 상황에서 ‘좌파’, ‘진보’, ‘개혁’ 등등의 용어가 무차별적으로 남발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진보’를 분명히 인식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진보를 인식하기 위해 나는 ‘개혁’, ‘좌파’, ‘진보’라는 용어의 기원을 살펴볼 것이다. 주로 이같은 용어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많이 사용되었고, 무엇을 규정하기 위한 내용인지에 대해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런 연후에 우리가 통칭하여 ‘진보’ 혹은 ‘진보세력’이라고 할 때 어떤 점을 염두에 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판단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