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진보에대하여-2

파랑새호 2009. 7. 20. 16:43

1. 좌파에 대한 자칭 사회민주주의의 평가

 

한국사회에 형성된 ‘진보세력’ 혹은 ‘좌파세력’에 대한 평가는 한 두권의 책으로 끝날 수 없는 방대한 내용이다. ‘진보’나 ‘좌파’에 대한 의미도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진보 혹은 좌파세력 내부에서도 평가가 있고, 세력 밖에서도 평가가 있다. 다만 평가라는 작업, 모색이라는 작업은 일반적으로 일정한 기준을 근거로 진행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진보나 좌파를 언급할 때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막막한 느낌이다.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사민복지기획위원회 지음, 산책자, 2009년

 

 

한국의 진보세력 혹은 좌파세력은 민주화운동과정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상 주도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화운동과정에서 진보세력 혹은 좌파세력 내부에서 여러 가지 노선의 차이에 의한 논쟁은 있었지만,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대의에는 대개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나 베트남 등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친화적인 경제정책들이 잇달아 등장하면서 맑스 - 레닌주의도 용도폐기 되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맑스-레닌주의 용도폐기로 인하여 좌파세력 혹은 진보운동의 생명도 끝난 것이다라는 인식도 확산되었다. 더군다나 민주화운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지나면서 진보세력 혹은 좌파세력은 분열되거나 상당히 위축되었다. 이명박정부 출범의 일등공신은 진보세력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은(이하 ‘재정립’)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관점에서 한국의 좌파를 규정하고 평가한다. 책의 제목처럼 책을 읽고난 후에는 ‘좌파의 재정립’이 되기를 바라면서 읽었다.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은 일정부분 타당하고, 일정부분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혼재했다.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다음의 표현을 보자.

 

o 한국의 좌파는 레닌주의를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재정립’ 66쪽)

o 한국 좌파운동권의 뇌리에는 ‘배신자 카우츠키’,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등의 표현이 깊이 박히고, 일상 언어생활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매우 나쁜 그 무엇’으로 자리 잡았다. 급기야 사회 파시즘론과 같은 사고방식, “사회민주주의가 파시즘보다 더 나쁘다”는 생각까지 일반화되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는 금기와 경멸의 단어가 되었다. (‘재정립’67쪽)

 

과연 한국의 좌파는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민주주의를 레닌주의에 경도되어 금기와 경멸로 생각했는지 판단해보자.

 

2.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책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베른슈타인이 원조이다. 베른슈타인은 일반적으로 수정주의자로 평가받는다. 베른슈타인의 책도 번역되어 있고,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서라 할 수 있는 룩셈부르크의 책도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평가해 볼 수 있다. 다만,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사회민주주의를 ‘수정주의’라고 표현하지 않고 개량주의로 표현했다. 표현이야 어쨋건 같은 내용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의하면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개량주의의 핵심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용체제, 발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 기업가 조직에 의한 활동으로 자본주의생산의 무정부성을 완화할 수 있고, 결국 자본주의는 지속될 수 있다는 관점, 둘째 자본주의 경제가 지속됨에 따라 중산층의 규모가 확대된다는 관점. 셋째 노동조합 투쟁과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투쟁으로 자본소유자의 권리는 제한되고 점점 더 단순한 행정가의 역할로 전락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제도변화로도 충분히 사회주의적 변혁을 가져온다는 점 등이다. 즉 베른슈타인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과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을 거부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과 자신의 차이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에 차이가 있다”(로자 룩셈부르크의 책 54쪽)고 주장하면서, “노동조합, 사회 개혁과 정치제도의 민주화를 위한 ‘일상투쟁’은 바로 사회민주주의의 투쟁”이라고 인정한다. 다만 베른슈타인의 관점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투쟁과 의회주의의 투쟁은 단지 직접적인 결과, 즉 노동자의 물질적 상태를 개선하고 자본주의의 착취를 점진적으로 제한하며 노동조합의 통제를 확대한다는 관점에서 행해져야만 한다.”(로자 룩셈부르크의 책 54쪽)는 것에 불과하다. 즉 베른슈타인의 관점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것으로서 오직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투쟁을 통해서 자본주의 착취를 점차 제한하는 것에 의해 사회주의 질서를 이룰 수 있다”는(로자 룩셈부르크의 책 54-55쪽) 결론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에 비추어 볼 때 ‘개혁’과 ‘혁명’의 차이를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될 것인가?’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이 필요한가?’의 두 가지 기준에 있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에게는 후자의 문제가 중요하다. 베른슈타인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이 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우는 진정한 민주주의 달성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장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치권력 장악을 통해 자본주의를 종식시켜야만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인 반면, ‘개량’의 경우에는 자본주의 질서 자체가 계속해서 지속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부르주아 정치제도 내에서 노동조합 출신이나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는 사람을 많이 당선시켜도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사실상 로자 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을 개혁이라고 분류하면서 비판했지만, 베른슈타인의 주장 자체는 ‘개혁’이라기보다는 거의 마르크스주의 반대 입장에 가깝다. 베른슈타인은 그의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을 부정하고, 자본주의의 모순 심화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베른슈타인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선 식민지정복이 독일 노동자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등 ‘제국주의’를 사실상 용인한다. 식민지 민족문제에 대한 몰이해는 당연히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연대를 부정하게 만든다. 베른슈타인은 파리꼬뮨을 평가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근거로, 시종일관 마르크스주의를 일종의 좌익모험주의라 할 수 있는 ‘블랑키주의’로 폄하하고 있다. 또한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주장한 부르주아혁명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베른슈타인은 부르주아 혁명을 “진보적인 부르주아의 급진적 당파가 권력을 잡고 혁명적 노동자들은 비판적인 압력세력으로서 그 뒤에 자리를 잡는다.”(베른슈타인의 책 111쪽)고 마치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가 진행하고, 사회주의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 뒤에 순서대로 오는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같은 베른슈타인의 관점은 혁명을 기계적, 도식적으로 이해한 것으로 예를 들어 레닌이 [사회민주주의자의 두가지 전술]에서 주장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부르주아혁명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다. 즉 베른슈타인은 1) 마르크스주의 핵심인 변증법을 부정하고, 2) 제국주의를 용인하며, 3)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부정하고, 4) 부르주아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권력 장악에 대한 몰이해가 두드러지고, 5) 자본주의 모순 심화에 대한 부정을 주장 한다. 이는 ‘개혁’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반마르크스주의로 평가해야 타당하다. 따라서 레닌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귀족 노동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로 판단했다.

 

사회주의가 모두 멸망하고 자본주의가 번성하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 볼 때 베른슈타인의 관점이 타당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점진적 달성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했다. 베른슈타인이 결정적으로 강조한 점은 부르주아 지배체제, 혹은 자본주의 정치경제 제도를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주주의 증가를 중산층의 증가와 일치시키며, 중산층의 증가는 곧 혁명이론의 완전한 폐기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베른슈타인은 사실상 자본주의를 옹호했다. 따라서 베른슈타인의 관점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수주의자일 뿐이다.

 

다시 [한국사회 좌파의 재정립]으로 돌아가 보자. 책에서는 베른슈타인의 노선을 ‘수정주의’라고 표현한다. 개혁, 개량,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거의 하나의 내용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정주의와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수정주의는 약간 다르다. 지금의 수정주의는 사실상 일본을 비롯한 서구공산당의 노선을 지칭하는 것이다. 수정주의는 무장혁명, 폭력혁명의 수단을 부정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점을 주로 강조한다. 방법의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을 배제한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 아울러 의회진출 등의 활동이 있지만, 의회진출 자체가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모순심화를 부정하거나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대체로 서구의 좌파정당은 나름대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며, 해당 국가에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일상적인 진보의 활동은 개량을 포함한다. 엥겔스는 그의 저서 ‘공상에서 과학으로’라는 글에서 부르주아는 봉건제와 달리 전일적 지배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부르주아 정권의 특징은 궁극적인 차원에서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었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한 전면적 지배는 아니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달성하기 위해서 의회민주주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개량활동과 개량주의를 혼동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아직 진행 중에 있으며 의회민주주의도 그러한 형태의 하나이다. 반면 의회민주주의로 완전한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개량주의이다. 베른슈타인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진보는 개량을 정치활동의 최종목적으로 설정하는 개량주의에 반대할 수 있지만, 개량활동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베른슈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단 하나이다. 베른슈타인은 개량주의를 자신의 정치활동의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볼 때 개량활동을 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이상 개량활동 자체만을 보고 그가 개량주의자인지, 진보를 염두에 둔 사람인지 구별 못한다. 더 나아가 일상적인 개량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진보인지 개량주의자인지 아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개량’이라는 말은 어쨌든 현실을 변화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3. 한국사회 좌파에 대한 문제제기와 평가

 

[한국사회 좌파의 재정립]에서는 한국 좌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 하고 있다. 사실 다음의 주장이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o 한국의 진보세력은 단지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 세력의 헛발질을 비판하는 안티테제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 현재 어떤 생산적인 대안도 제출하지 못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재정립' 10쪽)

o 한국의 진보세력이 지금처럼 유리한 상황에서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이유는 무엇보다 여전히 과거의 혁명주의적 사고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의 개선’이 갖는 긍정성을 부정하고 화려한 저항의 몸짓에만 강하다. 당면한 생활의 개선에 대한 관심은 희박하고, 한 번에 체제를 혁파하면 그런 ‘사소한’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식의 사고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재정립' 11쪽)

o 지난 10여년동안 진보 혹은 범민주화 운동세력 중 상당수가 이른바 ‘자유주의 중도 개혁정권’에 몸소 참여해 신자유주의적 경제 ․ 사회개혁을 이끌었으며 그리하여 진보를 희화하 하는 일에 일조했다. …… 중략 …… 진보세력의 일부는 여전히 20세기 러시아나 북한판 혁명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일부는 서구의 68혁명에서 시작된 절대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무정부주의, 즉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부정과 대안 없는 즐거운 저항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재정립' 29쪽)

 

책에서는 일관되게 한국 좌파는 레닌주의의 도그마에 빠져 어떠한 창조적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저항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주도하기 까지 했다고 평가한다. 한국의 좌파가 레닌주의의 도그마로부터 빠져나오는 탈출구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특히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창조적 대안을 제시하고,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선 한국좌파에게 전략의 일대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창조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상적인 개량활동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타당한 지적이다. 이러한 논의를 진행함에 있어 먼저 전략을 수정해야만 창조적 대안이나 개량활동이 필요하다는 사고, 즉 전략중심적 사고는 이 책의 근본문제기 자체를 혼동스럽게 만든다.

 

지금은 전략적 논의가 필요한 시기인가? 사회개량 혹은 국민들의 실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은 꼭 전략적 사고가 변해야 가능한 것인가? 특히나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가 우리의 금과옥조가 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한국좌파는 과연 실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혁명이론만 주장했던가? 이러한 의문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노동운동의 양대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제도권 정당인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각 시민사회단체들은(모두 그 속내는 모르겠지만) 책에서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개량활동에 전념하는 조직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이들 조직에서 혁명을 주장하는 내용을 듣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아니면 민주노동당에 ‘자주파’와 ‘평등파’가 있어서 분열 되었다는 점이 혁명도그마에 매몰된 증거인가? 이들은 한국의 제도권 틀 내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지금은 통칭하여 좌파 혹은 진보세력이 창조적 대안을 모색하고 제시하여야 하는 시기라는 점에 대해선 완전하게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안이 사회민주주의라는 철학 혹은 세계관에서 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또 다른 형태의 도그마로 보인다. 이런 현상은 내가 판단할 때, 진보에 대한 개념이나 좌파에 대한 개념이 자의적인 것에서 유래한다.

 

물론 기존 질서를 무조건 거부하는 서구의 일부 좌파들도 있긴 하다. 도대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에서 유래한 여러 잡다한 행위들을 좌파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적어도 진보 혹은 좌파세력에게서 시대를 관통하여 일관된 특징이라고 한다면, 다수가 결정하고, 다수가 주도하며, 소수가 존중받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다수가 확실하게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수에 의하여 권력이 장악되어야 하며, 이것이 전략적 사고의 핵심이다. 우리에게 지금 남아있는 유일한 기준, 전략은 완전한 민주주의 실현이다. 국가행정의 민주주의, 기업경영의 민주주의, 사회생활의 민주주의가 완전히 뿌리내리는 그런 상황이 진보 혹은 좌파가 추구해야 할 삶이다. 만일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가 이런 내용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유행에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는 어떤 대응을 했던가? 스웨덴 국민들은 신자유주의 풍랑을 약간은 비껴갔을지 모르겠으나 그것뿐이다.

 

국민들의 실생활을 개선하는 활동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에 입각하건, 혁명도그마에 매몰된 사람들이 주도하건 실생활 개선활동은 누구든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역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철학이 무엇인건 그와 같은 행동을 추진하는데 함께하는 것이다. 실생활 개선은 굳이 전략의 변경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전략이 먼저 대두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실생활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 진보 혹은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차이’보다는 함께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국민들의 실생활을 개선하자는 데 누가 반대하는가? 또다른 도그마로 좌파를 규정하는 것은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