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한국의 첫째가는 대기업이고, 아마도 단일 기업으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직장일 것이다. 삼성에 입사하면 (개인의 자존감을 논외로 할 경우) 일단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고 본다.(사실 삼성만 자존감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투기하는 것에만 골몰해 있는 금융자본과는 달리, 삼성은 상당한 제조업의 잉여를 기반으로 서 있는 기업이다. 물론 ‘재벌’의 속성상 잡다한 분야에 잡다한 형태로 설립되었지만, 핵심은 삼성전자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삼성에 납품하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모니터의 부품을 생산하는 사람인 데, 가장 심각한 것이 년초나 혹은 년말에 다음 년도 계약에 대한 단가 후려치기가 있다. 일정한 근거에 기초해서 합리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년도에 회사에서 원가절감 몇%하기로 했다”는 말이 전부라고 했다. 다른 한 사람은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람인 데, 단가 후려치기는 여기서도 여전하다. 그래도 삼성의 간부들은 롯데백화점이나 다른 대기업과는 달리 노골적인 ‘돈’이나 ‘서비스’를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대신 년간 일정한 금액의 상품권을 강제로 할당한다고 했다.
이은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고, 회사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도 이겼다. 이은의는 고백한다. “싸움에서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싸움을 하는 동안 망가지지 않도록 나를 잘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고, 진짜 이기는 것은 스스로가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310쪽) 나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사람이지만, 그 깨달음이 무겁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조건들 속에서 ‘자존감’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드러난다.
이은의는 자신의 투쟁대상이 “삼성이 아니라 그 조직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책임자들이었다.”고 밝힌다. 삼성과 삼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삼성이라는 회사는 조직이고, 조직은 사람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통상 삼성은 이건희와 분리할 수 없다. 굳이 책을 보지 않더라도 삼성이 이건희의 회사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이은의는 “삼성은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며 가치를 창출하는 직원들의 것이지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이은의의 싸움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인권위원회의 시정명령으로 본다. 이은의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인권위원회의 조사 이후 싸움의 전세가 결정적으로 유리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 정부가 인권위원회를 지속적으로 고사시키는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개인으로 살 수 없다. 개인의 의지, 개인의 자존감 등이 싸움의 원인이고, 또 일정한 동력이지만, 절대로 어떠한 싸움도 개인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은의의 싸움은 단순히 한 직장여성이 직장에서 성추행 당한 것에서 끝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은의의 싸움은‘재벌’, ‘대기업’이라는 영역으로 확대될 수 밖에 없고, 한국사회의 문제,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로 우리의 생각을 이끌고 있다. “삼성은 일하는 직원들의 것이다.”라는 주장에 정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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