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본민의련

민의련의 기원과 설립에 대하여

파랑새호 2012. 9. 18. 11:25

※ 아래 원고는 '공의사모'(공익의료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요청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민의련의 기원과 설립에 대하여

 

민의련은 일본 시민운동 내에서 의료의 영역을 담당하는 대중조직이다. 그러나 활동영역은 비단 의료에만 국한되지 않고,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다양한 복지문제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협동조합을 통한 주민자치운동에도 상당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일본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시민사회단체라고 할 수 있다. 50년이상 흘러온 그들의 역사는 민중들의 삶을 위한 투쟁의 역사요, 올바른 의료실현을 위한 다양한 실천의 역사였다. 현재의 전일본 민의련은 1953년도에 발족했으나, 민의련의 출발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설립한 [무산자진료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의련은 [무산자진료소]를 통해 활동했던 1930년부터 1941년 시기를 무산자의료운동의 시기로 부르고 있다. 이 시기는 주지하다시피 청일전쟁, 대동아전쟁으로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은 시기이다. 일본은 1925 [치안유지법] 제정을 통해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1928년과 1941년 이 법을 더 강하게 개정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뿐만 아니라, 종교인 등 모든 전쟁반대 세력들에게까지 탄압을 자행한다. 한국의 식민지 정책도 이 시기부터 대대적인 탄압에 접어들고, 1941년부터는 민족말살정책을 펴는 시기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무산자의료운동이 발생하기 이전에 소위 실비진료소운동, ‘농촌의료이용조합등의 활동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의료는 혜택 받은 소수에게만 가능한 상태였으며, 대중들의 의료부족은 큰 문제였다. 실비진료소는 진보적인 의료인을 중심으로 설립된 진료소로서 저렴한 진료비가 가장 큰 특징이었다. 실비진료소는 건강보험(직장의료보험) 시행과 의사 이외의 진료소 개설 금지가 시행되면서 차차 쇠퇴한다. 농촌의 의료이용조합은 농촌지역에 조합을 설립하여 소위 의사협정요금보다 싸게 진료를 공급하였다. 그러나 의료이용조합은 회비를 부담하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자작농을 중심으로 중류층 주민의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즉 빈곤층은 이용하기 어려웠다. 이외에도 당시 일본에는 세틀먼트운동이 있었다. 주로 지식인들에 의해 진행된 세틀먼트운동은 쉽게 이해한다면 지식인들의 현장활동이었다.

 

무산자진료소 운동은 이러한 당시 일본의 진보운동의 성과를 기반으로, 진보적 의료인과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다수의 대중들이 협력하여 진행한 운동이다. 최초의 무산자 진료소는 오사키 무산자진료소이다. 오사키 무산자진료소는 야마모토센지 (山本宣治) 일본 노농당 의원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야마모토 센지(통칭 야마센)는 토쿄대를 고학으로 졸업하고, 토지샤(同志社) 대학에서 강사를 하고 있었던 생물학자이다. 일본에서는 1928 220 처음으로 남자보통선거를 시행하였는데, 무산정당에서 8명이 당선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정부는 1개월도 채 되지 않은 315일에 일본공산당원이나 지지자 1,600명 이상을 검거하여 485명 이상을 치안유지법으로 기소했다. 야마센은 이러한 폭압실태를 자세히 조사하여 1929 2월 제국의회에서 부당성을 엄중하게 폭로했다. 이에 대해 천황제정부는 최고형을 사형으로 높인 치안유지법 개악안을 냈으며, 심의완료가 되지 않자, 천황의 긴급명령을 발표하고 1929년 3월5 개회한 의회에 사후승인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개악안에 대해 국회의원 중에서 오직 한사람 야마센만이 반대하여, 34일 오사카 텐노지 공회당에서 개최한 전국농민조합대회에서 [야마센 한사람 만이 고독하게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다.  내 뒤에는 대중들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발언한 후, 의회 발언에 대해 준비하고 상경했다. 그리고 의회개최일인 35일 밤, 묵고 있던 여관에서 우익단체회원 구로다호쿠지(黑田保久二)의 손에 암살되었다.

야마센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사망을 애도하고, [야마센기념병원]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어, 1929 315 [315일 기념사업회 노동자농민 병원을 만들자!!!]라는 호소문이 해방운동희생자후원회(후술)와 병원설립기금모집위원회 명의로 잡지 [센키(戦旗)]에 발표했다. 

 

호소문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부르주아와 지주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술이어야 할 의술조차 완전하게 독점하여, 노동자농민무산시민 앞에서 모든 병원은 문을 닫아 걸고 있다. 우리들은 질병에 걸려도 돈이 없기 때문에, 의사 진찰받기를 몇 번이나 주저하여 가벼운 질병을 위독상태로 만든다.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도 보증금이 없기 때문에 입원을 거절당한다. 약값이 밀려있어 죽음이 닥쳐와도 왕진을 중단한다.(중략)  이리하여 우리들의 건강은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들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의 병원을 만들어야만 한다. (중략) 후원회가 지원하는 젊은 의사 약사 간호사 등은 건강을 빼앗긴 노동자 농민을 위해, 앞장서 전문적 기술을 제공하게 되었다. (중략) 공장, 농촌, 직장, 학교 등 어디에서나 일전 2전의 작은 기금을 모아 보내, 대중적 지지를 받는 우리들의 병원을 건설하자]

그리고 다음해 일본에서 처음으로 무산자진료소인 오사키무산자진료소가 현재의 JR 고탄타역(五反田驛) 부근에 탄생했다. 이후 무산자진료소는 총 1개병원, 23개 진료소로 확대되었다.

 

무산자 진료소운동은 의료시설이 없는 농촌에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수행하였으나 일본정부의 탄압과 경영상의 이유로 중단되었다. 무산자진료소는 태평양전쟁이 시작한 1941년 탄압으로 모두 폐쇄되었다. 대체로 일본 민의련에서는 무산자진료소 운동의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비판적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  즉 환자를 차별하지 않고, [부르주아독점의 의료제도절대반대]=[프롤레타리아의료제도 확립]을 내걸고, 노동자나 농민을 무산자의료동맹이나 동료모임으로 조직하여 여러 사람이 운영에 참가하였다던가, 혹은 노동쟁의 해방운동을 향한 후원과 반전활동을 하였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존재하였다. 이러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무산자진료소는 한계도 안고 있었다. 1) 대중의 참여에도 불구하고 활동가에 의한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2) 정당이 분열될 때 영향을 많이 받아, 정당과의 자주적 관계수립을 하지 못했다.

 

종전 후 일본은 전쟁의 여파로 모든 의료가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패전으로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국민들은 말로 할 수 없는 식량난, 주택난, 비위생과 질병의 만연으로 고생했다. 의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절박한 의료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주민이나 민주단체, 공산당이나 노동조합의 진료소설립 운동이 높아졌다. 이 요청에 부응한 의사 • 의료종사자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사람들의 푼돈을 모아 민주진료소 전국에 설립했다.

 

민주진료소는 주로 공공의료기관에서 확대되기 시작한 의료노동운동과 민주적 의사조직의 진보적 의료인을 중심으로 한 운동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특히 최초의 민주적 의사조직이라 할 수 있는 간사이 의료민주화 동맹(1946 1)은 조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간사이 민주병원진료소 연합회를 50년에 결성하였고, 긴키 6개지방 50개 병원 진료소가 참가하여 [전국민의련]조직결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1947 2, 토쿄를 중심으로 신일본의사연맹이 발족했고, 의료-노동연대를 위해 의료노동조합등과 의료민주화협의회(1946 10)를 결성하였으며, 교하마지방 민주진료소연합회(1949 1)의 결성도 추진하였다. 이것은 후일 간토병원진료소연합회(1952 2)로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얼마 안 있어 봉직의, 개업의, 민주진료소의 3분야로 나뉘고, 각기 전국조직이라 할 수 있는 신일본의사협회, 보험의협회, 민의련으로 발족해 갔다.

 

민주진료소는 1946년 도쿄 지유’(自由)병원이 최초 설립기관이다. ‘지유병원은 노동조합을 경영모체로 출발하였으며, 병원 개설 후에는 법인을 설립하였다. 민주진료소의 여타 병원들의 경우, 의료생활협동조합으로 추진하기도 하고, 생활과 건강을 지키는 모임이나 민주단체를 모체로 독립한 기관, 개업의 생활을 하다가 민주진료소로 이행한 의료기관, 공산당이 설립한 진료소로부터 독립한 기관 등 각 지역별 특징에 따라 다양했다. 1953년까지 전국적으로 117개의 병원과 진료소로 급속하게 확대하였다. 이렇게 급속하게 확대가 된 우선적인 이유는 1949미군에 의해 자행된 레드퍼지 (Red-Purge; 각 조직에서 사회주의자 색출하여 해고)였다. 국립병원 등에서 해고된 의사 등이 참가한 결과 료소 설립 급속하게 확대한 것이다.  민주진료소는 1953 6월 민의련을 결성하게 된 결정적인 토대였다.

 

민의련 결성시 일본의 의사수는 9만명에 달하고 있었지만, 민의련의 상근의사수는 300~4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전국과 비교하여 1%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현재의 민의련과 비교하면 소수에 불과했지만, 전전의 무산자진료소 활동, 혹은 치안유지법에 저항한 의사, 전후 사회운동의 고양에 합류한 의사, 50년 전후 레드퍼지를 당한 의사, 학원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의학생들이 민의련에 참가하였고, 같은 경력을 갖고 있었던 기술자, 사무직원도 참가했다. 또 하나 민의련 창설의 주요 인적 특징으로서, 중국으로부터 귀환한 사람들의 민의련 참가가 있었다. 1957년까지 이런 간호사들은 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민의련 창설시기의 제1세대는 높은 정치의식과, 의료활동에 헌신적인 참여라는 공통된 특징을 갖고 있었던 집단이었다.

 

 민의련이 설립된 이후부터 민의련의 성격과 활동을 규정하는 강령에 대한 논의가 수년간 지속되었다.[1] 당시에는 극좌모험주의로 인하여 국민정부 결성등의 내용이 강령에 포함되어 있었다. 대중조직으로서의 모습보다는 정치적 경향이 더 강했던 것이다. 또한 환자조직으로부터 의료의 고도화에 대한 요구를 받게 되면서 당시까지 의료의 고도화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스스로의 모습을 비판하기도 한다. 정치주의의 오류는 경영에 대한 비과학적 사고를 초래하여 진료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너무 쉽게 판단하거나, 차입금에 대한 견제나 감시가 전혀 없어 곤란을 초래하는 상황도 나타났다. 이러한 정치주의 노선은 3차 대회에서 반성하게 된다. 이때 나온 구호가 의사는 의사답게였다. 그 이후에도 조직의 성격을 둘러싼 논의가 지속 되었는 데, 예를들면 60년대에는 민주적 대중운영인가, 대중적 민주운영인가대중소유문제 등이 있다. 이후 민의련은 여러 차별이나 제도개선을 위한 대중의 실천, 대중적 소유원칙과 함께, 민의련 회원 의료기관의 안정적 운영과 과학적 경영이라는 두가지 과제를 동시에 추구하여 왔다. 또한 민의련은 경영관리와 의료활동의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각 기관 건설과정에 대중출자 참여를 강조한다. 대중화의 문제에 대해 대중화의 근본적인 문제는 경영주체 조직의 대중화이고, 기관운영에 대한 참가의 대중화이며, 출자 등 자금의 대중화를 중심에 둬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화와 함께 [생활과 건강을 지키는 모임]의 의료소비자 운동도 진행하고 있다. 대중의 출자와 건강모임의 구성원은 대개는 중복이 되지만, 건강모임의 경우에는 단지 기관을 지키는 모임과 같은 협소한 내용이 아니라, 독자적인 대중조직으로 발전해가면서, 민의련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1] 이때는 약칭은 민의련이라 하지 않고 전의련으로 불렀다. 2회대회에서 [전국민의련]으로, 67년 제15회 총회에서 [민의련(미니렌)], 70년 제18회 총회에서 [전일본민의련(젠니혼미니렌)]으로 결정했다. 이하 기본적으로는 [전일본민의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