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무라 칸조 회심기] 우치무라 칸조지음, 양혜원옮김, 홍성사
일본에서 기독교를 뿌리내리는 데 기여한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는 한번 알아둘 만한 사람이다. 도올
우치무라 칸조(1861~1930)와 같은 일본의 기독교사상가는 단지 “두개의 J”를 믿을 뿐이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두개의 J”란 예수Jesus와 일본Japan이다), 기독교신앙을 일본역사의 맥락 속에 위치하도록 만듦으로써 강렬한 현실사회 • 정치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예수이며, 예수는 인간이 만든 조직이나 제도를 통하여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서를 통하여 직접 신으로부터 사명을 받음으로써 해후되는 것이므로 교파의 이해와 결부된 교회라는 조직은 참된 신앙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주장이 그의 무교회주의였다. 교회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신봉하지 않는 자들의 교회”만을 그는 생각했다. 항상 교회라는 조직은 인간의 이해관계와 얽힌 세속적 분류를 만들어내며, 궁극적으로 신앙적 삶의 수양에 역행하는 불경을 지어낼 뿐이다. 교회는 인간세의 관계 속에서 자기 확장만을 계속하려는 필연적 타성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소규모의 성서연구집회만을 허용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핵심은 끊임없이 조직에 프로테스트하는 정신이다. 따라서 성서연구집회도 비대화하면 해체시켰으며, 새로운 소규모 집회를 만들어 끊임없이 조직에 프로테스트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일본의 역사야말로 “구약”이라고 생각했으며, 일본역사의 대표적 사상가들을 모두 구약의 예언자라고 간주했다. 이들 구약의 예언자들로부터 어떻게 새로운 신약의 일본을 만들어내는가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다신론과 군국주의, 그리고 천황숭배의 죄악에 절어버린 일본의 현실정치에 가장 강렬하고 통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대학 학기 한글역주], 도올
함석헌 선생의 전기를 읽어보면 함석헌 선생이 동경으로 유학을 갔을 때 우치무라 칸조와 만난다. 우치무라 칸조는 바로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대 기독교인이었던 김교신과 함석헌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 김교신과 함석헌은 이 영향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만든다. 성서를 조선의 문화와 환경에 맞게 접목을 시켜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런 점은 바로 우치무라 칸조의 사상과 일치한다.
우치무라 칸조는 삿포로 농업대학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와 만난다. 처음 기독교와의 만남은 강제였다. 그가 서문에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은 “느리고점진적인 과정이었다. 나는 하루 만에 회심하지 않았다.”고 밝혔듯이, 당시 미국에서 온 선생에 의해서 동료들과는 달리 상당히 뒤늦게 개종하게 되었다. “고백하건대 기독교를 향한 나의 첫걸음은 이렇게 강제적인 것이었고, 나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으며, 내 양심에 반하는 것이기도 했다.”(34쪽)
기독교가 우치무라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준 것은 유일신 사상이었다. 일본은 지금도 그렇지만 다양한 신이 있다. ‘신사’문화는 일본의 뿌리깊은 전통이다. 우치무라는 이런 일본의 문화에서 여러 신을 섬겨야 한다는 점이 늘 부담이었다. 기독교와 접하면서 그는 이제 유일신만을 섬기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점이 “흥분과 감격으로 가득”차게 했다. “그 당시 하나의 신이라는 사상이 내게 준 영감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믿음이 가져다 준 새로운 영적 자유는 나의 지성과 육체에 건강한 영향을 미쳤다.”(38쪽)
우치무라는 동료들과 함께 작은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 미국 감리교 감독교회가 400달러를 교회건축자금으로 빌려주었는데, 자립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늘 우치무라를 괴롭혔다. 교회의 재정 자립에 대한 생각, 특히 기독교 국가가 주는 재정지원으로부터의 자립은 우치무라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사상이다. 이와함께 기존의 교단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자립교회’를 추구하였다. 한마디로 우치무라는 재정적으로든 조직적으로든 기존의 교회와는 자립한 교회를 추구했던 것이다. 우치무라는 이를 ‘민족독립교회’라고 지칭했다. 우치무라 칸조는 다음과같이 서술하고 있다.
“자신을 의지할 줄 아는 사람만이 얼마만큼의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는지 안다. 의존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다. 자립할 능력이 없다고 불평하는 많은 교회들을 살펴보면 쓸데없는 사치에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교인들이 있다. 교인들이 취미 생활 몇 개만 줄일수 있다면 많은 교회가 자립할 수 있다. 자립은 자신의 능력을 의식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자립이야 말로 인간의 행동 영역속에서 또 다른 많은 가능성을 실현하는 시발점이라고 믿는다.”(123쪽)
졸업 후 우치무라는 도시로 나온다. 도시의 교회에서는 그 당시(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부흥운동이 일고 있었다. 부흥회에 대해 당시 우치무라는 어떠한 감흥도 받지 못한다. 오히려 “다소 병적”인 것으로 보거나, “비정상적인 작용”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부흥을 최면술의 일종으로 대충 설명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내가 심각하게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136쪽)고민하다가, “좀 더 자연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내가 재창조될 희망은 여전히 있다”(136쪽)고 결론 내린다.
우치무라는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기독교 국가로 유학을 가는 것이라, 우치무라는 대단히 흥분한다. “이교도의 문명보다 훨씬 더 탁월한 기독교의 문명에 대해 듣고 읽은 것에 대한 확신”으로 미국을 “성지 그 자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미국땅에 닿자 마자 변한다. 미국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탐욕의 정신에 잘 맞도록 개조된 봉건주의 성의 축소판이다.”(158쪽), “미국인들 사이에 잔재해 있는 심한 인종적 편견만큼 기독교 국가를 오히려 이교도 국가처럼 보이게 한 일은 없다.”(159쪽) “ 기독교 국가는 또 하나의 복음을 갖고 있다. …중략… 힘이 곧 정의이고 돈이 바로 그 힘이다.”(163쪽) 그리하여 우치무라는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 빠져 두려움과 죄와 의심으로 요동”하게 되었고, 지금껏 “(자신의)할머니를 우상 숭배자라 부르고, 할머니의 미신을 불쌍히 여기고, 할머니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 내게 화가 있을 지어다!”하고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기독교를 유럽이나 미국의 종교라고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기독교의 신앙에 입각하더라도 동양의 전통, 일본의 고유 문화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미국에서의 생활은 우치무라로 하여금 자본주의 타락상을 보게 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동양적 감수성으로 바꾸게 하는 것이다.
“내 나라가 정말로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이교도 시절에 보았던 괴상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역사적 개성을 가지고 우주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가진 나라로 보였다.”(176쪽)
우치무라에게 신약은 자신의 내적 성찰에 대한 기록이고, 구약은 일본의 역사였다. 특히 구약의 예레미야서는 우치무라에게 큰 영감을 준다. “나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 나라의 몇몇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했다.”(204쪽), “그리스도와 사도들로부터 내 영혼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배웠다면, 선지자들로부터는 내 조국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배웠다.”(205쪽) 이와함께 병원에서의 ‘간호보조원’생활은 자신을 육체적으로 단련하고, 병적인 종교성에 빠지지 않도록 타락으로부터 구해주는 훈련장이 된다. 우치무라는 특히 “기독교적 관용”을 중시하면서, 분파에 물든 기독교를 비판한다. 분파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가 우치무라 신앙의 또 한 측면이다. 자신이 속한 민족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기독교의 어떠한 분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립정신은 이렇게 해서 우치무라가 신학교를 가기 전부터 사실상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우치무라가 판단할 때 기독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후로 우치무라는 ‘기도’에 대한 묵상을 통해 스스로 이제 완전한 크리스찬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한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로 완전히 설득당해서 자연 법칙 자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고, 아직도 그런 식으로 기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도다. 내 영혼이여 항상 선한 것을 의도하시는 그분의 뜻에 그대의 뜻을 맞추어라.” 이러한 묵상과 함께 우치무라는 “이곳에서 진심으로 회심했다고, 돌아섰다고 믿는다.”(242쪽)고 고백했다.
우치무라가 신학교에 들어간 이유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또 신학박사가 되려 했기 보다는 “종교는 객관화 되어야 하며, 만질 수 있어야 하며,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257쪽)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 당시 미국의 신학교가 “미국 교회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워졌기 때문에 미국과는 처지가 다른 나라에서 일할 사람들을 훈련시키기에는 이상적인 장소가 아니다”(260쪽)고 결론 내리고 신학교를 그만둔다. 4개월 만에 귀국하는 것이다.
우치무라는 주장한다. “만약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공자가 가르친 것만 제대로 지키게 할 수 있다면, 그 두 민족을 가지고 유럽이나 미국의 그 어느 민족이 만든 기독교 국가보다도 뛰어난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280쪽)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우리가 받은 속죄의 은혜를 통한 구원이 바로 기독교인 것이다.”(282쪽) “이교도를 회심시켰더니 이제 그 이교도가 당신을 재회심시킨다. 이것이 바로 인류다.”(299쪽)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살았던 사람이 현 시대마저도 꿰뚫는 생각으로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우치무라의 위대한 점이다. 진리는 늘 살아있다. 기독교 신앙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기에 우치무라는 그 살벌한 천황제 체제 하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며, 일본 교회의 초석을 놓을 수있었다. 나는 우치무라의 신앙을 ‘무교회주의’라고 평가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지만, 그가 생각한 그릇을 조금 작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치무라는 더 크고 더 넓다. 그의 신앙은 모든 진리에 대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라틴어로 ‘Veritas’라고 쓰는 진리에 대해 “사물과 지성의 일치”라고 규정했다. 우치무라에게 있어 진리란 모든 사물과 모든 지성에 대한 개방성이다. 세속과 돈에 쩌들어있는 한국교회가 다시금 새겨둬야 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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