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문제

일본의 ‘워킹푸어’와 ‘자기책임’론(번역문)

파랑새호 2012. 11. 2. 14:20

 

출처 ; 現代日本の貧困をめぐる「自己責任」論を考える(民医連医療 2012年11月号, 40쪽~43쪽)
저자 ;     수도권 청년유니온 사무국장 생명과 생활 총련이사 카와조에 마코토(
河添 誠)


 

1. 빈곤상태에 있는 사람의 최대치는 몇 명인가?

빈곤이라는 말은 다양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나,  홈리스상태에 있는 사람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서 말하는 홈 리스의 개념은 여러 외국과 비교하여 대단히 협소한 점이 특징이다. 홈 리스이기 때문에 원래는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집을 갖지 못한 사람 전부를 지칭하는 것이겠으나, 일본에서는 생활할 집이 없어도 아는 사람 집에서 얹혀 사는 사람들이나 소위 네트카페난민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포함하지 않는다. 노숙생활을 하는 사람만을 홈 리스로 부르며, 그 수는 통계상 대개 2~3만명 수준이다.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집을 갖지 못한 사람 전부를 포함한다면 이 수치는 10배로 증가한다.

생활보호대상자는 205만명 이다. 과거와 비교할 때 가장 많은 수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인구도 1.5배 증가하였고, 인구당 비율을 따져본다면 2.4%에서 1.6%로 오히려 감소하는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본변호사연합회가 발행하고 있는 [Q&A 현재의 일본 생활보호제도는 어떤 내용인가?]가 대단히 알기 쉬운 자료이며, 다운로드 받을수도 있어서 생활보호제도와 관련한 문제가 있을 때 활용하면 좋다. 모자가구(모친과 미혼의 자식만 있는 가구)는 약 124만 가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식해야 하는 것은 1년간 근무해도 년간 수입이 200만엔(한국돈 약 2,600만원)이하의 급여소득자가 1,045만명이다. 즉 급여소득자 4,552만명의 22%가 일을 해도 빈곤상태에 놓여있다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 주변에 보통 쇼핑하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실은 상당히 심각한 빈곤상태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에서, 빈곤이미지의 대폭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다양한 빈곤요인이 존재하고, 그 하나하나에 대해 해명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지만, 빈곤을 말할때의 중심은 일을 해도 빈곤상태의 소득밖에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 = 워킹푸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노동시장에 나가 봐도 빈곤상태에 빠져버리는 압도적 다수의 사람과 그 가정이 존재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을 도외시한 빈곤대책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2. 워킹푸어는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빈곤에 빠지는 이유는 우선 첫째로 임금이 현저하게 낮다는 문제에 있다. 최저임금은 전국평균 737엔이다. 풀타임으로 1개월 일을해도 손에 쥐는 것은 10만엔을 넘지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최저수준이다. 평균적인 임금(중앙치)에 대한 최저임금의 비율은 프랑스 59.5%, 영국 46.1%에 비하여 일본은 불과 37.0%(2010)이다. 이 상황을 개선해야만 하는 것은 분명하다.

두번째 이유는 고용이 파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파견 문제로 이해하는 것은 실은 오류이며, 2010년의 경우를 본다면 파견노동자는 96만명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5.5%에 불과하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1,192만명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68.0%를 점유하고 있다. 뒤이어 계약직 위탁사원이 330만명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18.8%이다.

지난번 [노동계약법] 개정으로 기간을 갖는 고용계약을 반복하여 5년을 넘길 경우,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요청하는 경우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으로 한다고 얼핏보면 노동자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5년이 경과하기 전에 계약을 해지하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카페체인점 [카페-벨로체]를 경영하고 있는 샤노아르가(chat noir ; 프랑스어로 검은고양이) 가장 앞서 이런 조치를 했기 때문에 수도권 청년유니온은 현재 투쟁하고 있다. 이제부터 계속해서 샤노아르 같은 기업들이 나올까봐 걱정이다.

세번째 이유는 고용이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실업시에 소득보장이 대단히 취약한 상태가되어 빈곤에 빠진다. 고용보험의 실업급여 수급율은 실업자의 23%에 불과하다. 77퍼센트가 실업과 동시에 아무런 수입이 없게된다. 저축이 전혀 없는 세대가 전세대의 28.6%라는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다. 당연히 이후 직장은 최저임금 이하여도 [이나마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니 좋다]라는 상태에 빠지게되고, 대개의 경우는 수입이 감소한다. 또한 이러한 고용상황에  있게되면 설령 성희롱과 같은 폭력을 당해도 퇴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심각한 상태이다.

실업시에 수입이 없다는 것은 일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저임금의 일이라도 얻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려, 좋은 일자리는 아니어도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실업상태인가 취직상태인가가 구별이 안되는 상태에 빠져버린다. [반실업 반취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이런 상태가 증가하면 빈곤상태가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워킹푸어상태에 있는 사람중의 상당수의 사람이 이런 상태에 있다.

비정규노동자는 <취직> -> <실업> -> <반실업 반취직> -> <실업> -> <반실업 반취직> -><취업>이라는 악순환을 반복하기 때문에 빈곤상태에서 생활하고 있고, 빈곤상태를 극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넷째는 민의련이 매년조사하여 고발하고 있는 무보험의 문제이다. 국민건강보험(국보 ; 대개지역의료보험임)의 무보험자에 대한 실태는 일체 파악되지 않고있다. 그러나 나에게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중에서 무보험인 사람은 대단히 흔하다. 앞에서 말한 파편화된 고용중에서 복리후생이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는 기업이 있을 수도 있지만, 계약해지의 단계에서 지역의료보험을 신청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보험료를 지불할 수 없고, 신청하고 싶어도 지식이나 사회보험에 가입한 경험이 없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지금까지 공공보험에 가입한 적이 한번도 없는 상담자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물어보면 [악으로 버티면서 극복한다] [일반약으로 치료한다] [몰래 형제의 보험증을 사용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1,000만명을 넘는 워킹푸어가 놓여있는 상황을 보게 된다면, 빈곤문제의 해결은 복지지원이나 정책전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오히려 노동운동의 강화가 결정적이다. 공공보험의 유지나 재정문제도 포함해서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는 과정에 워킹푸어의 문제는 긴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3. 빈곤에 대한 [자기책임]론의 의미

그런데 이 글의 주제인 [자기책임]론에 대하여 말한다면, [자기책임]론은 어떤 사람이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전부 그 사람의 책임이다는 관점을 의미한다.

어떤 30대 여성이 상담을 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고졸자로 취직하려 했지만, 열심히 노력해도 취직할 수가 없어서 단발적인 아르바이트로 생활하였다. 부모는 자립하지 않는 딸자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 집을 나가고 싶었으나 좀처럼 시도할 수가 없었는데, 드디어 공장 기숙사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에 취직을 했지만, 병에 걸려 기숙사에서 쫒겨나 집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으나, 집이라고 해도 매일 좌불안석이었고, 부모는 일하러 가고 돌아오는 시간에 딸은 편의점으로 외출을 한다. 편의점 5곳을 하릴없이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고 낮에 집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또 편의점을 돌아다니면서 매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립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집을 나와 일을 하고 싶다는 의욕이 누구보다 강했으나 고졸 30대의 여성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립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에게 그 사람이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전부 그 사람의 책임이다고 질책해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경우 의욕도 점점 사라져 간다 [의욕의 빈곤]이라는 문제가 대두한다고 유아사 마코토(湯淺誠)는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다. 우리들과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은 일이 없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취직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취직을 시켜줘도 며칠만에 사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모처럼 일을 하게 됐는데 왜 그만두는 거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을 들어보면 [그 일이 자신에게 가능한 것이라고 전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럴수 있을까 싶어도, 이런 사람들은 인생에서 한번도 긍정적인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보면 가능하다고, 노력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체험이 전혀 없다. 이미 초등학교시절부터 자신의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일찌감치 단념하고 만다. 성실하게 살아보자고 말할 기회도 없는 상태에서 이미 포기가 왔던 것이다. 아주 작은 방에 4, 5명의 가족이 생활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고, 자신의 방이 있거나 한번 정도라도 기숙사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상당한 혜택을 받은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난으로 인해 포기를 반복해 왔고, 좌절을 당해본 사람들은 의욕이 사라져버린다. 물론 기운을 내서 취직하는 사람도 있지만, 며칠 만에 사직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에게 [자기책임]으로 정리하지 않고 빈곤의 문제로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고를 당해본 경험은 당신은 이제 필요없는 사람이라는 선고를 받은 것이라서, 한 사람의 인격을 전체적으로 부정하는 효과가 있다. 나도 해고된 경험이 있지만, 반복해서 해고되는 사람들은 불합리에 대해 처음에는 화를 내지만, 차차 자신을 책망하게 되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자살문제의 배경에는 이러한 실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자기책임]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강한자가 약한자를 향해 주장하는 논리이다. 자신의 회사 부장을 향해 [사장이 되지 못한 것은 당신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기책임]이라는 말은 어려운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규정하는 말인 것이다. 수평적인 평가가 전혀 없다. 자신의 경험만을 보편화시키면서 약자를 괴롭히는 말이다. 노력해온 사람, 힘을 내고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책임]론에 공감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기책임]론은 그만큼 확산되기도 쉽다. 그러나 노력을 해서 어려움을 극복해온 사람들에게는 노력으로 가능했던 능력에 더해 계층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경시하고 있다. 유아사 마코토씨의 말 안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환경에는 자신이 혜택받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4. [자기책임]론의 정치기능

[자기책임]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적인 사회보장개혁의 지지자를 증가시켜 왔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은 자신의 일은 자신의 책임으로, 타인에게 불안을 넘길 것인가라는 사상이 여러 외국보다 더 강한 것이어서, [자조]중심주의를 강화시키는 상황에 일조하고 있다. 특히 생활보호가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왔다.

[아사히신문](2012년 8월18자)에서 [사회보장간판 뒤집기 억제착수 표적은 생활보호]라는 제목으로 대강의 요구기준결정을 보도하고 있지만, 사회보장비를 삭감하려는 때에 연금개혁은 더 이상 어렵고, 의료비는 일본의사회 등의 요구도 있어서 삭감할 수가 없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갖는 단체가 없는 생활보호로 눈을 돌려 노골적으로 쓰고 있다.

일본의 생활보호비는 3조엔이지만, 이것을 표적으로 예산을 삭감하려는 것이 예능인 후려치기로도 적용되고 있다.  텔런트 카와모토(河本)의 사례는 법률적으로는 부정수급은 아니다. 이것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진실로 무차별공세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세금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소득자의 부모에 대해서까지 생활의 돌봄이 필요할 것인가라는 의문에는 고소득자의 경우 많은 세금을 내고 있고, 부모의 생활이 어려울 때에는 생활보호를 적용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근대국가의 상식적인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모에 대한 돌봄은 자식이 해야 한다]는 예전의 상황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일본은 복지국가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개인의 생활상의 어려움은 국가가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취약할 수 밖에 없어, 이러한 비난이 순식간에 확산된다고 생각한다. 있을 수 없는 말이지만, 실제로 부모의 부양의무를 강화한 경우에는 부모나 친척이 어려운 상태에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부양의무를 많이 져야 하기 때문에,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빈곤상태에서 빠져나올수가 없게 된다. 부모가 빈곤하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확대하는 것에 불과한 심각한 사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의 비난은 정부가 이것을 진심으로 추진하려 했다기 보다는 이러한 비난을 통해 생활보호 신청을 유보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고소득 텔런트의 어머니가 생활보호를 받고 있다는 비난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생활보호를 받지 않고 고독사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여 사회문제화 되었기 때문에, 생활보호를 받는 것이 중요한 해결책이라는 주장이 많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런 분위기를 단 순간에 역전시켜 버린 것이 생활보호에 대한 비난이었던 것이다.

생활이 어려울 때 생활보호를 받는 것은 권리이며, 뭔가 고려해서 주저 할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새로운 복지국가]구상의 기본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는 비계층적인 보편적 복지라는 발상 그 자체도 [자기책임]론자들은 적대시하고 있다.

정권교체한 민주당이 실현한 아동수당 정책은 비계층적적인 보편적 복지의 구현으로 주목받는 것이었으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아동수당 법안의 평가를 둘러싸고 혁신정당에서도 여러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되어 수정안을 제출했던 것은 향후 중점 논의해야 한다.

 

5. [자기책임]이 아니라 연대의식을 조금이라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복지국가]운동에는 [자기책임]론에서 번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를 위해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질서에서 제외되어 있는 영역을 운동적으로 의식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들은 사회에서 받아줄 수 있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점을 느낄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자화자찬이지만, 수도권청년유니온이나 반빈곤지원네트웍, [이대로 가면 어려운 사람들]의 행동 등이 그러한 운동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민의련의 모든 사람과 건강친구모임, 의료생협조합원이 그 역할을 점점 더 많이 해야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이나 투쟁이 없는 곳에서 [자기책임]론에 대한 논쟁은 결코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