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후쿠시마의 병원은 지금(번역문)

파랑새호 2016. 3. 7. 11:56


후쿠시마의 병원은 지금


2011년 3월11일의 동일본대지진으로부터 5년이 흘렀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방사능 누출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 현에서는 아직도 10만명이 대피생활을 하고 있다. 후쿠시마 현내의 민의련 3개병원은 (와타리병원, 쿠와노교리츠桑野協立병원, 오나하마小名浜생협병원)지진직후부터 전국지원도 받으면서 필사적으로 병원기능을 유지하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3병원의 5년간을 돌아본다.


1) 와타리(わたり)병원

후쿠시마 시의 의료생협 와타리병원(196병상)은 후쿠시마 현 민의련 유일의 기간형 임상수련병원이다. 원전사고의 영향으로 특별히 의사부족이 지속된 후쿠시마에서 후계자 육성도 중요한 역할이다.

올해 3월, 기쁜 소식인 초기연수를 끝낸 쿠니이 료(国井 綾) 의사가 와타리병원을 후기연수 기관으로 선택한 것이다. 동 병원에서 후기연수의가 탄생한 것은 실로 10년만의 경사. <의국에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엔도 고(遠藤剛) 원장. 젊은 힘으로 병원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환자의 바람을 들어주면서

와타리병원은 지진 후, 환자의 바람을 들어주는 조직을 개편했다. 현 북쪽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완화케어 병동(15병상)을 오픈하고, 고령화가 진행하고 있는 지역의 실정에 맞게 회복기 재활병동을 57병상으로 늘렸다.

조회를 병동과 외래 전체로 확대하면서 입원시의 컨퍼런스를 시작하는 등 집단적인 의료기능체제도 구축. “지진 후 간호사 인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직원들이 대체근무를 했습니다. 정보나 문제점을 공유하고, 직원의 동기부여를 향상시키는 것과 연동했습니다.”라고 병원 간호부장 아라이 후미코(荒井史子)가 이야기한다.

또한 연수의를 지원하기 위해 멘토(후원자)로서 비교적 젊은 경력간호사를 연결했다. 아라이 부장은 “연수의와 직원이 서로 자극이 돼서, 원내의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라고 회고한다.


             (와타리 병원의 간호사스테이션)


종합진료의사의 길로 들어서다.

이러한 성실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쿠니이 의사에 이어 작년 4월에는 초기연수의 3명이 입사했다. 올해 4월에도 한명이 입사할 예정이어서 올해는 와타리 병원 개원이후 연수의 5명체제가 되었다.

본래 소아과를 희망하고 있는 쿠니이 의사이지만, 동원에서 초기연수를 하는 중에 종합진료의의(GP, General Practitioner) 길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직종과 협력해서 환자분들의 일상생활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종합진료를 통해서 다양한 어려움을 안고 있는 환자분들을 돌보고 싶습니다.“고 포부를 밝히는 쿠니이 의사.

종합진료는 와타리병원에서도 특히 힘을 쏟고 있는 분야이다. 민의련 다운 매력이 넘치는 병원이라서 후기연수를 선택한 것이다.

작년 4월에 입사한 기무라 준(木村純)의사는 “와타리 병원을 선택한 포인트는 지역에 뿌리내린 의료활동입니다. 다른 병원에서 연수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이곳은 정말 실천적인 연수내용으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기무라 의사는 후쿠시마 현 남부의 야마츠리마치(矢祭町)출신. 도쿄의 대학출신이지만, 과감히 후쿠시마의 병원을 선택했다. “원전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지역의 복구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전국의 지원이 배움의 현장으로

와타리 병원이 있는 후쿠시마 시 와타리(渡利)지구는 비교적 방사선량이 높은 지역이다. 지진 후에는 불안해서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는 병동환자가 있었다.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환자분의 이야기를 듣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지도 않은 채, 말없이 옆에서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는 아리이 간호부장. 민의련의 <환자를 돌본다.>는 의료를 실천해 온 것이다. 지진 직후 중견직원들이 계속해서 퇴사했다. 일상진료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지만, 전국의 민의련 사업소에서 의사, 간호사, 재활치료사 들이 지원을 해주었다.

아리이 부장은 “감염대책 등 전국의 간호사로부터 다양한 참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원은 아주 큰 힘이 되었으며, 동시에 배움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고 회고한다.

직원은 아직 여유가 없이 부족한 상태이지만, 전국에서 의사의 지원은 작년 10월로 끝났다. 동 병원은 지원에 감사하는 DVD를 제작해서 전국 민의련 사업소에 우송할 예정이다.


지역에 보다 밀착하는 병원으로

지진으로부터 5년이 지났어도 원전사고는 수습되지 않은 채, 주민의 불안은 계속되고 있다. 동 병원은 방사선 학습회를 반복해서 열고, 방사능을 “제대로 무서워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원내에 내부피폭을 측정하는 홀바디 카운타를 설치하여 시의 위탁으로 주민의 방사선량을 측정하고 있다.

의사양성의 분야에서는 후쿠시마 현 민의련의 의사위원회를 재건하여 위원장에는 엔도원장이 취임. 후쿠시마 시 의사회를 중심으로 시내의 기간형임상연수병원(후쿠시마 적십자병원, 오오하라종합병원, 와타리병원)의 연대를 강화하는 <NOW 프로젝트>(NOW는 일본적십자, 오오하라, 와타리의 머리글자)도 시작했다.

엔도원장은 민의련의 이념인 “무차별평등지역포괄케어”를 내걸고 재활고 재가의료를 강화해서 지역에 보다 밀착하는 중소병원으로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주민이 안심하고 이 지역에 계속해서 거주할 수 있도록 향후에도 병원기능을 강화하고 싶습니다.”고 포부를 밝힌다.


2) 쿠와노교리츠(桑野協立) 병원


쿠와노교리츠 병원(코오리야마시郡山市, 120병상)의 츠보이마사오(坪井正夫)원장은 원전사고를 <핵재해>라고 주장한다. 코오리야마 의료생협은 2012년에 <핵피해 대책실 쿠와노>를 세우고, 실장 츠보이원장이 발행하는 <핵재해 대책실 쿠와노뉴스>는 작년 10월에 1천호를 넘어섰다. 핵재해의 거리에서 살면서 핵재해에 맞선 5년간이었다.


혼란속에서

“흔들림이 심해서 움직일 수 없는 중에 누워만 지내시는 환자분이 제 손을 밀었습니다. <놔두고 그냥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하면서 옆에 있었습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진 당시 병동의 수간호사였던 이시이토모코(石井智子). 경험하지 못했던 흔들림으로 서있는 것도 뭘 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즉각 환자의 안전확인을 위해 달려갔다.

흔들림이 진정되자 마자 직원들이 모여 대책본부를 설립했다. 츠보이 원장은 “피난은 행정지시에 따른다.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의료를 계속한다.”고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환자를 계속해서 받았다.

지진직후, 코오리야마시에서는 전기는 계속해서 가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TV로 원전사고 내용을 알수 있었다. 하세가와슈이치(長谷川修一, 사무직)는 “코오리야마시는 원전에서 70킬로 떨어져있어 피난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거리는 죽은 듯이 고요했습니다. 그러던 중 원전가까이 사는 사람들이 점점 코오리야마시로 피난을 와서 흡사 일본같지 않다는 느낌을 게속 받았습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원전사고 후에는 정보가 없어서 불안했다.>고 이야기한다. 츠보이원장은 정보를 얻기위해 매일 지역신문인 <후쿠오카민보>福島民報와 <후쿠오카민우>福島民友를 보고 있었으나, 원전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현지사람이 소식을 보내지 않는다면 누구도 소식을 알 수 없다. 우리들이 소식을 보내지 않는다면”하면서 매일 <핵재해대책실 쿠와노 뉴스>를 발행했다.

정보를 얻기위해 FTF(패스트 트랙 파이버 = 사진)이나 식품방사능 스크리닝 모니터, 공간선량계측기를 구입해서 독자적으로 인체나 식품, 시내의 방사선량을 측정했다. 방사선량 측정에 대한 코오리야마 의료생협조합원인 오카모토테츠조우(岡本鉄藏)는 “우리 시민들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정부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 눈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고 주장한다. 츠보이 원장은 “원전사고의 피해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은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기억이 흐려지는 과정에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수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특히 방사선 측정기록이라도 남겨둬야 했습니다.”고 이야기한다.


뉴스의 역할

뉴스에서는 원전사고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도착한 지원물자나 의료생협 활동도 게재했다. 민의련 코오리야마서부지역 포괄지원 센타의 시로이시 요시미(白石好美)는 2013년 1월부터 매월 1회, 임대주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모여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모임인 <모란회>를 운영한다. “모임이 발족하고 나서 처음엔 피난자들의 힘든 생활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모든 사람들이 <현재도 피난 상태인 것을 알리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피난자로 알려지면 <좋겠네. 배상금도 받고>하면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점점 더 지역속에서 고립되어 버립니다.”고 시로이시는 주장한다. “피난자의 생각을 알리는 것이 우리들의 역할”이며 <모란회>의 이야기는 반드시 뉴스에 게재한다.

뉴스를 발생하는 한편으로 전국에서의 지원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동 의료생협에서는 현재도 야채나 과일 등의 지원물자가 도착한다. “언제나 지원물자와 함께 메시지가 옵니다. 문제의식이 희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힘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들려주면 다들 마음을 다잡습니다. 운동을 계속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이시이(石井). 전국에서 보내준 다른 많은 메시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몇십년간 지속되어야 하는 활동

코오리야마 의료생협은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검사기사인 야마다 아케미(山田明美)는 지진당일 아이 중학교의 졸업식에 있었다. “학생은 절반정도 밖에 안남았지만, 우리들은 <여기서 힘을 내자.>고 결심했습니다.”고 밝히는 야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면서, 쿠와노 협립병원이 현민 건강관리 조사에서 갑상선 초음파 검사의 거점의료기관이 되기 위해 후쿠시마현이 실시하고 있는 인정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그후에도 검사기사와 방사선기사가 두명이 합격해서 동 병원은 거점의료기관으로 지정을 받았다. 현재는 조사 시행을 위해 후쿠시마 현립 의과대학과 계약을 추진중에 있다.

동 병원 사무차장 카노마타 타츠지(鹿又達治)는 “체르노빌에서도 당시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갑상선 암이 발생했습니다. (갑상선 검사는)후쿠시마에서도 향후 몇십년간 지속해야 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원전사고로 인한 의사부족, 개호직원부족이 더 심각해 지고 있고, 지금부터 지역의료를 어떻게 지킬수 있을 것인가가 큰 과제입니다. 이러한 과제를 돌파하기 위해서도 계속해서 정보를 알리고 연대를 만들어가야만 합니다.”고 설명한다.



3) 오나하마(小名浜)생협병원

이와키시의 오나하마 생협병원(129병상)은 지진피해지역 관람창구이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민의련 사업소 등 120건이 넘는 견학을 신청 받아 소화했다. 지진 당일부터 지금까지 경과과정을 들어보았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다.

이와키시는 교통편이 좋기 때문에 피해지역 견학의 입구역할을 하고 있다. 병원은 지진 4개월 후부터 전국 민의련 사업소나 여러 단체의 견학 창구 역할을 해왔다. <기본적으로 중단하지 않는다.>는 방침하에, 월2회의 토요일, 일요일에 두 사람의 직원이 만 하루동안 이와키시에서 나라하마치(橧葉町)나 오오쿠마마치(大熊町) 등을 통해 나미에마치(浪江町)까지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는 견학코스 안내를 맡고 있다.

정보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많은 언론이 원전사고의 내용을 보도하지 않아, 사고가 잊혀져 버릴 위기감을 느끼면서부터. 무엇보다 실제로 피해지역을 보면 의식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서 금지구역이 어떤지 알수 있는 장소, 쓰나미로 파괴된 채 남아있는 집, 이러한 것은 몇 번을 들어도 실제 한번 보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이번의 사고는 우연히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전국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오나하마 생협병원 사무장인 쿠니이 마사요시(國井勝義)는 주장한다.


남은 자의 고통, 떠나간 자의 고통

“지금이야 말로 당시의 판단이 정확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원자로가 두 번 폭발하지 않는 다는 보장조차 없었습니다. 만일 또 폭발사고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이 늘 있었습니다.”고 쿠니이가 설명한다.

원전 사고 직후인 2011년 3월15일, 병원이 있는 이와키 시가 전가구에 대피명령을 발령했다. 인구 34만 명 중에 16만 명이 대피하였으나, 병원 직원의 상당수는 남았다. “입원환자를 놔두고 대피할 수는 없다.” - 이것이 공통된 생각이었다.

입원환자 전원을 시외 병원으로 이송하는 수단도, 받아들이 만한 곳도 없는 현실 앞에 환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병원의 직원들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명도 위험한데,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직원들에게 남아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원 직원이기 전에 사람이고 대피할 권리는 의료종사자에게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직원에게 <남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남는 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결정이었습니다.” 쿠니이 사무장은 눈을 글썽이며 회고했다.

가족이나 친인척 사람들이 대피하는 중에 남아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도, 그렇게 판단한 동료를 남기고 대피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괴로웠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기도 하고, 개별면접이나 방사선전문의 강의도 해야 했지만, 가장 힘이 된 사람은 각 부서의 책임자였다고 말한다.


피해자에게 형성된 마음의 벽

지진 직후에는 병원을 계속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1개월후에는 도쿄 민의련의 지원도 받아가면서 안부확인을 위해 직원총회에서 쓰나미 피해지역 1,700가구의 조합원 자택을 방문했다. 2개월이 지났을 때는 대피소에 들어가서 물리치료사들이 체조나 밥짓기 등의 지원을 시작했다.

지진 1년 후, 직원은 조합원과 함께 가설주택에서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거기서 같은 피해자 중에서도 경우에 따라 마음에 응어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돌아갈 집도 없는 사람중에서, 원전사고 피해자에게는 도쿄전력에서 보상금이 나왔지만, 쓰나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사고이전에는 원전이 있는 오오쿠마마치(大熊町) 등의 지역에는 정부나 도쿄전력에서 보조금이 나오고 있었던 점, 그렇지만 이와키시를 포함해서 주변 지역주민은 원전건설반대운동을 하고 있었던 상황도 갈등이 발생하는 요인이었다.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없었지만,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은 모두 같다.”고 병원이 소속된 하마토오리(浜通り)의료생협의 이토타츠야(伊東達也)이사장은 주장했다. 갈등을 해소하는 것도 의료생협의 역할이라면서 활동을 계속했다.


“연결”을 계속하면서

오나하마(小名浜)생협병원이 현재까지 다양한 활동을 계속해온 것은 “연결”이라고 쿠니이 마사요시(國井勝義)는 주장한다. 지진 후였던 2011년 5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전국 민의련이나 의료복지생협연합회에서 합계 40명의 간호사가 지원을 했다.

지금까지 관여하지 않았던 민의련 이외의 개호시설도 물자부족 속에서 식량이나 이불 등을 분담해주면서 교류를 시작했다. 자신들만이 일본에서 버려졌다는 느낌이었을 때 전국에서 보내준 격려깃발이나 메시지가 담긴 지원물자에서 생각지도 못한 눈물이 넘쳐흘렀다.

“이러한 연결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는가 그것이 과제”라고 말하는 쿠니이 사무장. 고난을 함께 극복해온 동료가 차츰 퇴직하는 한편에서, 의사나 간호사 등 전문직 입사자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의료를 지키는 고난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도 이 지역에서 생명과 생활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동 병원 간호부장 아마노 유미(天野ゆみ)는 “지금까지는 눈앞의 일에 전력을 다했지만, 지역에서 어떻게 의료나 개호를 지속할 것인가 저희들에게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를 직원분 모두와 함께 생각해서 대책을 마련하고 싶습니다.”고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