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솔제니친 - [암 병동](1963)

파랑새호 2016. 10. 23. 02:32

[ 암 병동 1, 2],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영의 옮김, 민음사(세계문학전집 337), 2015년 9월 1판1쇄


솔제니친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즉 [수용소군도]라는 고발문학을 통해 스탈린과 스탈린체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소련의 억압체제 실상을 폭로하고, 소련사회주의에 대항한 작가라는 수식어는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대단히 식상하고 일면적이다. 분명히 솔제니친은 스탈린과 스탈린체제에 대해 거의 목숨을 내던지고 저항했다.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 체제였기 때문이다. 솔제니친의 모든 작품은 스탈린 체제하에서 자행된 야만적 행위, 그리고 작가 자신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루카치는 솔제니친에 대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이라고 평가하기 까지 했다. 불행히도 루카치는 1974년에 출판된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를 읽어보지 못했다. [수용소 군도]를 읽고서도 그 같은 평가를 내릴지는 의문이다.


[수용소군도]에서 솔제니친은 소련의 역사에서 3가지 역사적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처형되거나 어떠한 법 절차도 없이 수용소에 강제연행 되었는가를 폭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을 모두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직접 증언을 토대로 기록하였다. 3가지 사건이란 1) 1929년과 1930년 레닌의 신경제정책을 대체하기 위해 스탈린이 시행한 부농축출과 집단농장 강제이주, 2) 1937년과 1938년의 대숙청. 스탈린 체제하에서 130만 명이 체포되고, 68만 명 이상이 처형된 사건. 이는 50%~75%의 공산당원이나 고위 공무원 고급장교들이 사라지는 효과를 초래했다. 3) 1944년에서 1946년 소수민족 강제이주. 이것은 솔제니친의 표현에 의하면 “소련 내의 몇몇 <소수 민족>을 송두리째 삼켜버리고 수백만의 러시아인을 휩쓸어 떠내려 보냈다.” 솔제니친 자신도 스탈린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친구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로 인해 수용소에 갇히는 만큼, 그의 대표적 작품들은 스탈린 시기 자행된 위 3사건이 집중적으로 거론된다.(소련은 망할수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시한번 강조하는 것이지만, 솔제니친의 대표적 작품이라 일컫는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년)와 [수용소 군도](1974~1976)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아울러 스탈린주의의 첨예한 모순이 점철된 공간인 ‘수용소’를 대상으로 한다. 솔제니친의 문학은 사실상 수용소 문학이요, 고발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지금 소개 하는 [암 병동]은 수용소가 아니다. 병원에서 발생하는 내용이 중심 소재를 이룬다. 앞의 두 작품과 비교하면 정치적 모순이 덜 첨예한 공간이며, 무엇보다 병원이라는 조건상 한 사회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의사들을 포함해서 다양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것도 물론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묻어난 소설이지만, 특히 과연 사회주의 국가는 어떤 사회여야 하는지를 묻는다.


암 병동은 1963년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작품속의 시기는 1955년이다. 1955년은 1953년 스탈린이 죽고, 1958년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후르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했던 년도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소련사회가 스탈린의 사망을 인식하고, 이후 서서히 꿈틀거리는 시기이다. 이때부터 ‘개인숭배’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작품 속에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스탈린 집권 시절 고위관료 출신과 그의 딸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스탈린 시절 고위관료에게는 ‘개인숭배’라는 표현이 아주 이상한 것 일수 있지만, 그의 딸은 벌써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변화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주 이상한 표현말이다. 연설이나 기사에 요즘 많이 나오는 그 .... 개인 숭배라는 단어 말인데....그 말이 정말......그건 분명한 모독아니냐

부끄럽고 치욕적인 일이에요! 어떤 사람이 한번 그 말을 내뱉고 나니 계속 퍼진 거죠. 물론 누군가는 개인숭배라고 하지만 또 누군가는 위대한 계승자라고 말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그냥 피하는 것이 좋아요. 원칙적으로 유연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면 되는 것이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시대에 맞춰 살아가야 해요! (477페이지)


한편 [암 병동]은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봐야 할 소설이다. 환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의사의 의무는 무엇이며, 바람직한 의료제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사회주의의 의료제도, 보편적 복지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 내용들이 소개된다. 노먼 베쑨의 전기를 읽어 본 사람은 노먼 베쑨이 소련의 병원을 방문한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베쑨의 전기에서는 소련의 의료제도에 대해 그렇게 상세한 내용은 서술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노먼 베쑨이 근무한 자본주의 국가의 병원과 비교되었으며, 긍정적으로 묘사된 것은 분명하다. 이 작품에서는 전 인민에게 무료로 의료를 시행하는 한편에 가정의 제도를 폐지한 것에 대해 소련의 의사들이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전 국민 무료의료제도를 시행하면서 한편에선 가정의 제도를 폐지하다니 ! 지금 생각하면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당시 소련에서는 예방의학의 실제적인 내용이 없었던가, 아니면 의료제도에 대한 천착이 부족했던 것은 확실하다. 아니 오히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계속해서 ‘부르주아적 사상’으로 쫒겨나는 조건에서 가정의에 의한 주치의제도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솔제니친의 다른 한가지 특징은 ‘톨스또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거의 빠짐없이 톨스또이가 등장하는 느낌이 든다. [암 병동]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톨스또이 작품을 소재로 등장한다. 톨스또이의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소재로 암 병동의 환자들이 대화를 나눈다. 주지하다시피 이 작품은 톨스또이의 후기 단편 중에서 대표적 저작의 하나로서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다. 암환자 중 한사람이 톨스토이의 이 소설을 읽고, 같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에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암환자들로 부터 나온 대답은 다음과 같다. 1) 보급(식량보급, 일용품 보급), 2) 월급, 3) 공기, 물, 음식, 4) 자격증, 5) 자기고향, 6) 이념과 공공복지. 마지막 답변인 '이념과 공공복지'라고 말한 사람은 스탈린 체제의 고위관료 출신인데, 누가 쓴 소설인지를 물어본다. ‘톨스또이’라고 답하자 "그 톨스또이는 참 괴상한 소리를 했지, 그는 이해력이 상당히, 아주 상당히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레프 톨스또이와 그 일파가 주장한 도덕적 완성에 대해서는 이미 레닌이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어요! 그리고 스탈린 동지도, 고리키도!"하면서, "오스트로프스키의 책을 읽어보세요. 훨씬 유익할겁니다."라고 말한다. 톨스또이는 상당히 부족한 사람이며, 읽으려면 오스트로프스키를 읽으라는 이 평가. 오스트로프스키가 누군가? 바로 유명한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쓴 사람이다. 솔제니친에게 막심 고리키나 오스트로프스키는 노예문학을 대변한 사람들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 민중은 어떻게 해서 스탈린 체제를 가능하게 했을까? 솔제니친은 작품 속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어떻게 민중이 모두 바보가 될 수 있겠나? 미안하지만 민중은 영리하지. 그저 살기를 원했던 것뿐이야. 모든 위대한 민중에게는 법칙이 있어. 그저 살기를 원했던 것뿐이야. 모든 위대한 민중에게는 법칙이 있어. 그것은 모든 것을 견디고 살아남지!


그리고 또 한가지 저항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는 회한이 진하게 남아있다. 솔제니친의 작품 속에는 늘 스탈린 시대에 왜 자신이 반항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회한이 남아있다.


어디에 이런 역사적, 시대적 변화의 비밀이 있다고 보는가? 똑같은 민중인데, 십년사이에 사회적 에너지를 모두 상실해 버렸고, 용기는 비굴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어. 나만 해도 1917년 이래 계속 볼세비키였는데 말야. 탐보프 시의회에서 사회혁명당 멘셰비키들을 용감하게 몰아낸 일도 있는 나인데, 물론 두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어 댄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야. . . . 우리는 세계 혁명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어! 그런 우리가 어떻게 되었나?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비굴해졌다만 말인가?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공포?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아 다좋아. 나는 보잘것 없는 인간이지만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루프스카야는 어땠을까? . . . 그런데 왜 단 한번도 스탈린에 반대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까?


솔제니친은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 솔제니친이 바라는 사회는 작품 속에서 ‘도덕적 사회주의’라고 명명되었다. 도덕적 사회주의는 단순하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인간적인 사회주의이다. 그러나 솔제니친의 작품을 보면서 솔제니친이 원했던 도덕적 사회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고,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너무 매몰되는 느낌이다. 사실 솔제니친의 고발 문학은 우리에게 ‘과도기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는 과도기에 대해 아주 제한적인 언급만을 했을 뿐이다. 과도기 문제는 현 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20세기 혁명에 성공한 소련과 중국을 비교해보자. 두 국가 모두 사회주의 혁명이후 국유화나, 집단농장 강제편입, 사상적 순수성을 빙자한 전문가집단, 종교인집단, 활동가집단에 대한 탄압이 발생했다. 여기에 소련에서는 소수민족의 강제이주와 타 국가에 대한 침략이 명백히 발생했다. 두 국가 모두 제국주의 국가에 둘러싸여 군사적 대결상태가 지속되었다. 경제 발전을 위해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시도는 소련의 경우 혁명직후 시행되었으나 지속하지 못했으며, 중국은 우여곡절 끝에 뒤늦게 시행되어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다. 두 국가 외에도 현재 곤란을 겪고 있는 남미의 베네수엘라나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판단되나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을 안고 있는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건설, 정치활동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야 할지에 대해선 아직도 본격적인 논의가 되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인가, 사회주의 국가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만 하고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소위 ‘과도기’ 문제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론 과도기에 대한 논의가 나의 경험상 일본 공산당에서 활발한편이지만, 어디까지나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을 통해서 검증하는 과정을 밟는다. 일반적인 과도기의 특징을 국유화라고 판단하는 것의 문제점, 또 상당히 장기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제기한다. 이렇듯 사실상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통해서 과도기 논의를 진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혁명이후 사회주의 국가의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논의가 필요하다. 인권과 민주적 절차, 법치주의 등의 확립 문제는 논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솔제니친이 [수용소군도]에서 맹 비난한 소련의 형법 제58조는 사실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성격이 매우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과도기와 민주주의 문제는 상당히 밀접한 논의이다.


여기에 덧붙여 과도기 사회의 철학, 대중의 주도성, 창발성을 살리는 의미에서의 철학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와 함께 민주주의가 철저하게 관철되는 사회가 과도기의 특징이라고 판단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러나 당시 소련 사회의 유물론은 본질적으로 천박한 속물주의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철학을 유물론과 관념론으로 나누면서 일단 관념론이라고 하면 무시해버리는 행태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판단해보면 마르크스주의도 관념론의 풍부한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물질이라는 것은 물질 자체로 아무런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냉철한 이성이라는 것은 감성의 뒷받침없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없는 물질, 감성없는 이성, 직관없는 판단은 힘을 발휘 할 수 없다. 솔제니친 자신은 스탈린체제에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후회하면서, 그 반민주적 성격과 독재적 성격을 전 세계에 폭로한 것이지만, 우리에겐 그것이 ‘과도기의 문제’로서 다가온다. 이런 점이 솔제니친과 우리와의 차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