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장준하의 [민족주의자의 길]

파랑새호 2016. 12. 5. 11:30

[민족주의자의 길], 장준하 지음,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문집 간행위원회 편, 도서출판 사상, 1985년 8월

나는 이 책을 상계역 앞에 있는 헌책방에서 샀다. 장준하의 저서는 [돌베개]가 유명하고 또 많이 읽혔지만, 이 책 [민족주의자의 길]은 한마디로 장준하의 엣센스다. 사실 [돌베개]는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임정이 있던 충칭으로 가는 과정, 그리고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훈련을 받고 한국에 입국하는 과정을 적은 것인데, 나는 장준하가 미국의 스파이교육을 받고 스파이로 활약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의 길]은 장준하가 [사상계], [씨알의 소리], [기독교사상] 등의 잡지에 기고하거나 그의 타살이후 발견한 유고문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에서 장준하만큼 민족의 모순과 민중의 문제를 온 몸에 끌어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는가 생각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미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만큼 교류가 왕성한 시점에서 ‘웬 민족주의?’라는 문제제기도 있을 수 있겠으나, 장준하의 민족주의는 그렇게 국수적이고, 배타적이면서 협소한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절대적 보편성을 제기하였으나, 구현되어야 할 구체성에 대해선 각 민족에게 혹은 각 국가의 민중에게 맡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노동자가 우리 사회의 중심세력이라는 점, 자본의 지배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점 등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그러한 인식은 단지 출발의 계기만을 이룰 뿐이다. 문제는 한반도이고, 한국이며, 한국의 노동자, 한국의 민주주의, 한국의 상황이다. 장준하는 이 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제시하였다. 장준하의 민족주의는 한국판 마르크스주의라고 이야기해도 궁색하지 않다. 독자 여러분들도 반드시 한번은 읽어야 할 책이다.


우선 장준하는 해방 후 정치과정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다.

1) 해방민족의 과제는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세력의 결합이었다.

2) 건준과 같은 통일전선의 모색은 계속되어야 했다. 지나치게 인물중심으로 종파가 갈렸고, 이러한 파벌은 미소 점령군의 분할통치의 일환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3) 임정은 독립투쟁의 전략단위의 하나로 규정하고 평가해야 하나, 임정요인의 환국 당시 개인자격으로서만 돌아오게 한 것은 당시의 미군정이었지만 이를 받아들인 것은 임정의 최대과오였다.

4)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의 합작운동은 효과적인 노력이었고, 백범의 통일운동은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가장 순결하고 애국적인 길이었다.


그러면서 글을 작성한 시점(1973년)에서 장준하는 향후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5가지를 제시하였다.

1) 정치제도의 민주화

2) 민족적 동질성 확보

3) 군사적 긴장완화

4) 민족 공동이상의 개발

5) 민족세력의 형성


이 다섯가지 중에서 지금 평가할 때 어떤 내용이 보다 진척되고 있는 가 판단해보면 분명한 답변을 하기가 어렵다. 나아가 장준하는 이러한 과제를 제시하면서 지금은 통일보다도 통일운동의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자유를 위한 기본 목표를 또다시 3가지로 구별하여 제시하였다.

1) 냉전논리에 입각한 모든 제도, 법률, 가치관, 문화질서 청산 - 현재로서는 국보법 폐지가 절박하다고 볼 수있겠다.

2) 정권을 교체하여 친일, 반민족, 외세 의존적 세력집단 해체하고 구조적 불균등 사회를 장악한 과두적 지배계층과 그들의 부패, 도덕적 타락을 일소한다.

3) 민족 통일운동의 뒷받침이 될 민주, 민족, 민족화해 정권을 확립한다.


향후 과제와 당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장준하는 1) 민중주도와 2) 전쟁반대 평화해결의 두 가지를 원칙으로 제시한다.

“ 비록 총칼 든 전투, 이름난 의사 열사가 아니더라도 들판에서 공장에서 낯선 이국땅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싸우는 민중에게는 바로 민족적인 삶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이었고 국토를 빼앗기는 것은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애국이 자기의 삶과 일치하지 않고 지식과 논리가 삶의 터전에 뿌리박지 못하고 있던 일부 지식인 지도층에서는 민족에 대한 배반도 일어났다. 하지만 항쟁의 길이 고달프고 외로운 듯 했지만, 그 실은 온 민중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그 승리의 영광은 더욱 보람찬 것이었다. . . .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의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통일 없이는 가난 부자유 이 모든 현실적 고통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함을 알고 알려야 한다.”

“ 역사의 똥인 전쟁, 그 가장 더러운 동족상잔을 우리가 청부맡아 했다니 오천년 민족사 앞에 아니 인류의 역사 앞에 무슨 낯을 들수 있으랴. . . . 전쟁에 앞서 평화를 확보한 자보다 이긴 승자는 없다. 하물며 동족과 형제끼리의 싸움에 평화보다 더 영광스러운 승리는 없다. . . . 통일이 급하고 지상과제이기는 하되 전쟁은 참혹하다. 참혹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은 통일로 가는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참혹한 경험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전쟁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음을 거듭 확인해야 한다.”

장준하는 남북 분단이 적어도 두가지 의미에서 우리 민족에게 자기부정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분단의 기본적 계기는 외세에 의한 것이었다는 면에서 자기부정이다. 다음 하나는 분단된 민족은 역사의 실천 단위로서는 적어도 하나의 주체적 자기 존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즉 둘로 나누어진 그 한쪽은 어느 쪽도 하나의 주체적 단위가 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 자기 부정인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만약 국제정세가 이 새로운 후퇴와 동결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맞서 싸워야 하며, 국내 정치적 이유로 이런 일이 획책된다면 우리는 오천만 민족의 이름으로 이를 용납할 수 없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우리가 지도자를 판단할 기준은 바로 이것이다. 바로 민중의 생활과 분단을 실체의 양면으로 보면서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 나아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 점을 절대 외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