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오키나와를 배운다(서승)

파랑새호 2019. 4. 6. 20:00

20190409 녹색병원 오키나와 공부

오키나와를 배운다

우석대 동아시아평화연구소 서 승

 

1.  오키나와야?

우리나라에도 명산 명수가 있고, 외국에도 푸른 바다 뜨거운 태양의 리조트는 많건만, 왜 오키나와로 가지? 근간 오키나와로 가는 한국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오키나와를 찾는 광객이 연간 860만명(제주는 1000만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도 200만명에 이르려 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푸른 바다와 하늘, 만발한 꽃, 독특한 문화를 가진 아열대의 아름다운 섬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급격한 관광객의 증가를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어두운 그림자는 ‘안전’에 대한 의구심일 거다. 즉 쉴 새 없이 방사선 오염 물질을 질질 흘리는 후쿠시마 원전과 언제 동경을 폐허로 만들지도 모르는 수도직하 대지진에 대한 공포다.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그 두 가지 위협에서 자유로운 거의 유일한 장소가 아닐까 한다. 일본사람은 공식적으로는 말은 삼가, 오키나와에 가는 우리나라 관객들의 급증은 분명히 일본 동부지역에 대한 안전성 신뢰의 결핍 탓일 것이다. 푸른 바다와 이국정서에 푹빠지는 것도 좋겠지. 우리나라에서 가깝고 엔저도 일조하여 저렴한 해외여행을 즐기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관광포장지를 뜯어서 그 속에 있는 참담한 오키나와의 역사, 미국의 군사전략의 이용물로 군사기지화 된 사회현실을 보지 않고서는 진짜 오키나와를 보았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에게 오키나와가 왜 친근한가? 첫째 초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전쟁을 겪어 희생물이 되어 평화를 갈망하기 때문이고, 둘째 1609년에서 이어지는 일본의 지배 속에서 우리와 같은 식민지 경험을 했기 때문이고, 세째 동북아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하여 일상적인 전쟁 위협을 느껴 왔으며, 평화를 위해 우리와 함께 해야 할 벗이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에서 우리 문화, 특히 제주와 유사성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남방 폴리네시아 계통의 문화에 속하는 오키나와 문화는 제주의 문화와 유사성이 현저하다. 모계사회, 자연신앙과 무당신앙, 돼지 문화와 돼지변소, 기후와 지형의 근사성, 노래와 춤을 즐기는 민속 등등.

우리와 오키나와의 인연도 얕지 않다. 1477년 제주의 어민이 이리오모테섬(西表島)에 표착하여 2년간 머물다가 돌아오는 기사가 왕조실록에 나와있으며, 이 것이 오키나와에서 가장 일찍이 남겨진 역사기록이다. 이리오모테(西表)에서는 오늘날도 그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가 있다고 한다. 임진, 정유왜란에 참전한 사츠마(薩摩)의 군사는1609년에 유구왕조를 침략하고 실질적인 식민지지배를 확립한다. 그 때 유구왕조가 임진왜란 출병요구를 거부하여 대신 요구한 군량미 공출도 반밖에 내지 않았다 구실 았으며, 조선침략의 예봉을 오키나와로 돌린 것이다.

 

명치유신을 거쳐 유구왕조는 1872년부터 1879년에 걸쳐서 일본중앙정부에 완전히 병합되었다(류큐처분). 1875년에 강화도 사건이 있고, 이 시기에 일제는 서쪽 한반도,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과 남쪽 류큐, 대만에 대한 침략을 동시 진행 것을 알 수 있다. 류큐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 간 다음, 청일전쟁을 전후해서, 오키나와의 황민화정책이 추진되었다. 즉 오키나와 사람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창씨개명), 우치나구치(오키나와 말)의 사용을 금지하고, 각 가정마다 어진영(천황의 사진)을 모시게 했다. 우리 나라에서 실시된 황민화정책이 반세기 일찍이 오키나와에서 실시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1945년 4-6월) 오키나와에 미군이 상륙하고 처절한 지상전 전개되어 군병 합쳐서 20여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 중 민간인은 12만명으로 당시 45만 인구의 4분의 1이 학살 당했다. 필리핀을 탈환한 미군 일본 본토 상륙을 앞두고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했었으며, 그 예상 상륙지가 대만, 오키나와, 대마도, 남부 구주, 제주도 등이었다. 제주에서는 1944년말부터 미군상륙에 대비해서 한라산 중턱을 한 바퀴 둘러서 머리 티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만주에서 7만명의 군인이 전출되었다. 오키나와 전의 참상이 능히 제주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키나와전에는 약 1만명의 징용자와 1000명정도의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가 동원되었다고도 한다.

625전쟁 당시 오키나와 카데나 기지 등이 한반도 폭격의 기지였으며, 이에 (伊江島)에는 북한을 겨냥한 원폭투하 훈련장이었으며, 한반도에 출격하는 미군병사들의 중계기지였다. 625이후에는 카데나 기지 정문 앞의 기지촌인 고자시에는 미군 병사가 한국에서 데려와서 버리고 간 한국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냉전시기(우리나라의 분단시대)를 통해서 오키나와는 동북아 안보를 내세워 엄청난 군사기지 부담(일본의 미군기지의 74%, 오키나와 본 섬의 20%)을 떠 안 왔으며, 오늘날도 한반도 안보위기가 오키나와 군사화의 구실로 쓰여져 있다. 우리는 오키나와 역사에 여러 갈래로 인연을 맺어 왔으며, 오키나와 사람들은 가혹한 역사 속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뜨거운 날씨 탓인지 낙천적이고, 부드럽고 하다. 오키나와 사람과 함께 앉아 아와모리 술잔을 기울려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를 담은 노래가락을 들을 때 오키나와의 문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1. 개요 

오키나와 섬은 동중국해와 태평양의 사이에 위치하고, 오키나와 현 전체 면적 2,277 km² 중 1206km² (제주 면적 1,849㎢의 2/3)이고일본의 주요 4개 섬을 제외한 면적이 가장 넓은 섬이다오키나와의 해역은 동서 1000km, 남북 400 km. 표준경위도: 동경 127°68′11″, 북위 26°21′16″. 주로 산호초 융기암의 363개 섬(유인섬 49개)으로 구성. 

 

인구 약 145만 명(2019.1) 중 약 100 만 명이 나하시(35만명)을 비롯한 오키나와 섬 5분의 1에 해당하는 서남부에 집중되어 있다. ⇔제주도(66만명)

 

◎기후는 아열대/열대. 나하시의 기온은 7월에 28.2℃, 1월에 16.0℃, 연평균 22.3℃이고, 강수량은 전역에서 2,000mm (한국 1300 mm) 내외에 달한다.

 

◎오키나와의 일본에서 으뜸

#실업률11%, 3차산업 76%

#1인당 소득: 20년동안 최하위, 2015년에 꼴치에서 2등으로 (204만5천엔). 세대당 저축액 최저 476만엔(2011)

#이혼률: 1000명당 2.56 (세계1이 러시아 4.7 =5짝 중 42위 미국 2.8=50%,

일본은 1.9=3짝 중 하나).

#술집 점포수, 남성 비만율, DV 발생률,

#여성평균수명 87세(전국3위), 남자는 10년 빨리 죽는다.

 

#오키나와로의 이주자 연간 3만명, 인구증가율이 도쿄 다음으로 전국2위

 

2. 역사

★선사시대: 12세기까지. 고류큐(12세기- 1609년)

대교역시대 14-16세기

1429년류큐 삼산통일(三山統一). 제3대 쇼하시(尙巴志) 중산이 건국.

구스쿠(성)시대12세기-15세기, 300여개의 구스크, 수리성은 15세기 초 축성

아지(按司)-삼산시대, 조공체제 (책봉사와 진공사)

1609년: 사쓰마(薩摩藩)의 침략아마미 제도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되어 류큐는 청과 일본에 이중조공(양속관계=실질은 사쓰마의 식민지) 

1879년 류큐처분(琉球處分=병합메이지 전부는 군 300명과 경찰 160명을

류큐에 파견, 쇼타이(尙泰)을 도쿄 납치. 류큐 왕국멸망. 폐번치현(藩置県)으로 류큐 번(琉球藩)을 폐지, 오키나와 현(설치.

1893년 류큐신보(琉球新報창간.

1899년 오키나와 토지정리법 시행. 지조개정(地租改正).

1903년 토지정리사업 완료. 사키시마 (先島諸島)의 인두세 폐지. 

1912년 오키나와에 중의원의원선거법 적용. 

1914년 슈리(首里)-나하 간 전차 개통.

1921년 황태자(후의 쇼와 천황)오키나와 방문.

1942년 NHK오키나와 방송국 라디오 방송 개시.

★1945년4-6월오키나와 전 (15년전쟁, 1931-45)

★미군정(1945-72)

1945년  9월20일、시의회선거에서 여성참정권 인정. 

1947년오키나와를 25-50년 미국에게 장기 조차할 수 있다는 천황 미시지.

1948년 B엔(미군표) 외의 통화금지.

1951년 류큐대학 개설.

1952년 류큐정부 설치.

1956나하 시장으로 오키나와 인민당 세나가 카메지로(瀨長龜次郞) 당선.

1958년 B엔이 미 달라와 교환.

1965년 사토(佐藤)수상 오키나와 방문.

1967년 오키나와 NHK 방소개시.

1968년 행정주석 선거실시.

★1970년 국정선거 실시. 고자 반미 폭동.

1972년 일본복귀

1973년 오키나와 특별 국육대회 개최.

  1975년 오키나와 국제해양박람회 개최.

1978년 자동차 좌측통행으로.

1987년 제42회 국민체육대회 개최.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가 일장기를 끌어

내려 불태움.

1992년 슈리성 복원.

1994 9 미해병대 등 3명이 초등학교 학생을 강간→10만명 현민 대회

1997년 미일 간에서 후텐마 포함 기지 이전 합의(SACO).

2000년 류큐왕국의 구수크 관련유산군이 세계유산 등재.

2002111세계 최대의 츄라우미 수족관이 개원.  

2003년 나하 공항슈리 간에 모노레일 개통.

2004년 오키나와 국제대학에 헬리콥타 추락.

2013년12월나카이마 (仲井眞弘多)지사가 헤노코 기지 매설공사 승인. 

2014년 1월승인은 공약 위반이라고, 현의회에서 나카이마 지사의 사임 촉구 결의.

11월 오타가(翁長雄志)가 지사당선All Okinawa이데올로기보다아이덴티티

2015년 후텐마 비행장 이설 무제로 오키나와와 아베정부 극심한 대립. 

 

2016년9월16일 후쿠오카 고법에서 헤노코 제로 현이 패소. 

2018년8월8일 오나가 지사 사망.

9월30일 타마기(玉城데니가 지사에 당선.

 

 

3. 오키나와의 

   1) 류큐(琉球)란 무엇이며, 류큐사람(우치난츄)은 어데서 왔는가?

   2) 류큐는 왜 중국에 조공을 바쳤는가? 조공무역과 오키나와 대 교역시대(10-14C)

 #중화체제(조공⇔책봉)→예에 기초한 중국의 특유의 국제관계/안보시스템

3) (薩摩)의 침공과 지배의 실태

4) 양속관계란 뭣인가?→실질적인 사쓰마의 식민지→사츠마의 石高77만석, 류큐 12만석

5) 류큐 처분(병합)으로 오키나와는 일본이 되었는가? 차별은 오늘날도 이어져. 

   6) 오키나와 전: 도민의 1/4사망, 집단자결, 민간인(어린이 포함야스쿠니 合祀.

   7) 일본 천황메시지(1947.9)→오키나와에 대한 반 영구적 미군 점령을 종용.

8) 1950∼60년대 본토(일본) 복귀운동은 무엇을 지향했으며, 무엇을 얻었는가?

9) 오키나와 미군기지와 기지 범죄 및 기지 공해. 공여 군용지 계약지주와 반전 지주.

10) 미군기지와 한국인(조선인군부, 일본군위안부, 양공주).

11) 오키나와 사람의 정체성(Identity). 일본사람인가? 

12) 오키나와 자치/독립의 가능성.

13) 오키나와의 경제→기지(기지건설, 미군 피고용자, 기지촌)+공무원 의존→관광

14) 오키나와 문화의 원류와 성격. 풍수와 시-사(獅子). 돼지와 다시마. 무속신앙(유타우타키)과 가무. 

15) 오키나와의 언론, “류큐신보와 오키나와 타임즈

16) 오키나와의 평화주의→비무장의 나라(카라테)→반전·반기지(후텐마-헤노코) 투쟁

17) 오키나와의 역사적 국제관계→ 조선, 타이완, 중국,일본, 미국

18) 오키나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동서남북인의 평화찾기]오키나와 정체성의 표상, 다마키 데니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입력 : 2019.01.27 20:34:00 수정 : 2019.01.27 20:38:15

 

전주의 시민운동단체 ‘한몸평화’와 함께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기행의 막바지에 이에지마(伊江島)를 찾았다. 오키나와 북부의 모토부(本部)항에서 뱃길로 30분, 10㎞도 안되는 거리다. 둘레 18㎞, 인구 4500명의 땅콩깍지 모양의 조그만 섬에는 2차대전 당시 동양 최대의 군용비행장이 있었으며 섬의 최고봉, 172m의 성산을 둘러싼 공방에서 일본 군민 3500명이 죽고, 1120명의 미군 사상자가 나오는 격전이 벌어졌다. 섬을 점령한 미군은 비행장을 확장하여 훈련장으로 사용했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북한을 겨냥한 모의핵폭탄 투하훈련장으로 이용했다.

 

섬의 절반(지금은 20%)이 군용지로 강제 수용되어 주민들은 2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다 집도 땅도 빼앗기고 내동댕이쳐졌다. 농민들은 1954년부터 토지의 반환과 보상, 미군의 폭력 반대를 외치고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다. 그때부터 수백명의 남녀노소는 섬을 나가서 오키나와의 마을마다 걸식하면서 미군의 포악과 농민들의 곤경을 호소하는 ‘거지행진’을 벌였다. 같은 처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전 오키나와를 뒤흔드는 ‘시마구루미’(온 섬, All Okinawa) 투쟁으로 발전하니, 1958년 미군은 토지사용료의 대폭 인상을 약속하게 되었다.

시마구루미’ 투쟁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2014년 당시, 자민당 소속 나하시장이던 오나가 다카시(翁長 雄志)가 당의 정책을 거슬러 헤노코(野古) 기지 건설 반대를 표명하여 출당되면서도, 범야권 후보로 현()지사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오나가는 “이데올로기보다 아이덴티티”라는 구호로 초당파적 선거태세를 만들어 ‘All Okinawa’라고 불렀다. 일본에 의한 오랜 오키나와 지배와 차별, 그리고 일본 면적의 0.6%에 지나지 않는 오키나와에 주일미군기지의 70%가 몰려있는 부조리를 권력과 돈으로 밀어붙이려는 아베 정권의 오만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러 그들을 각성시켰다. 그래서 오나가 지사는 아베의 헤노코 기지 건설 강행에 완강하게 맞서다가, 작년 8월에 갑자기 암으로 죽었는데, 9월에 다마키 데니(Deny 玉城)라는 이색적 인물이 현 지사로 뽑혔다.

그는 미 해병과 이에지마 출신의 아메라시안(미국인과의 혼혈아) 여성 사이에 태어났다. 다마키는 미국으로 가버린 아버지의 이름도 주소도 모른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라디오의 MC,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경묘한 우치나구치(오키나와 말)로 노인들의 인기를 모았다. 2009년에 민주당 후보로 중의원에 출마하여 내리 4선을 했는데, 소수정당 소속의 그가 국회의원이나 현 지사가 된 것은 다분히 운이 작용했지만, 미군병사를 생물학적 아버지로 둔 가난한 미혼모의 아이가 지사가 된 것은 미군이 버리고 간 아메라시안 아이들이나, 미군기지에 성적 착취를 당하며 사는 여성들이 신기하지 않은, 오키나와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지사선거에서 다마키는 39만6632표를 얻어 자민당 후보에 비해 8만표가 많은, 역대 최대 표차로 승리했다. 선거 출정식을 벽지인 어머니의 고향 이에지마에서 연 것은 정체성에 대한 그의 집착을 시사해준다. 그의 승리요인에는 요즘 보수화되어 가는 젊은이들의 높은 지지율도 있다고 한다. 노래 부르고 춤추고 쉽게 말하는 다마키는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젊은이들의 호감과 지지를 받았다. 오만불손한 아베에게 감연히 맞서는 그 모습은 포스트모던적인 동아시아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오키나와가 아베의 과거회귀 구상에 걸림돌로 버티고 있다. 오키나와는 태평양의 요석(Key Stone)으로 미국의 냉전 최전선의 구실을 해왔다. 한국도 그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지배체제의 구도 속에 위치해 왔다. 바로 그 ‘요석’이 다마키라는 표상을 얻어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아베의 뒤통수를 치려 하고 있으며,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지배에 심각한 균열을 내고 있다. 오키나와는 우리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