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불확실성], 이매뉴얼 왈라스틴 지음, 유희석옮김, 창비, 2013년(3쇄)
이매뉴얼 왈라스틴은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하다. 그가 주장하는 세계체제라는 것은 전지구적으로 단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체제들이 있는 세계, 말하자면 ‘세계의 체제’가 아니라 ‘체제들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세계체제론이다. 만일 그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알고 싶다면,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창비 발행, 2014년)라는 책의 제1장 ‘구조적 위기, 또는 자본주의가 자본가들에게 더 이상 이득이 되지 않는 이유’를 읽어보는 것이 좋다. 길지 않으면서도 왈라스틴의 핵심주장들이 거의 다 나와 있다.
현재의 왈라스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두 사람이 있는 데,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과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장기 지속’이라는 용어로 잘 알려진 프랑스 학자이고, 일리야 프리고진은 복잡계 이론을 창시한 화학자 · 사상가로 비평형 열역학 분야에 관한 연구로 197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단선적, 도그마적 스탈린주의로부터 풍부한 마르크스주의를 원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를 박제화된 상태에서 받아들인 사람들은 계급투쟁이나, 자본주의만을 이야기하고 자본의 무한 이윤추구만을 거론하면서 실제 역사서술, 사회서술, 정치서술의 구체성과 풍부함을 생략한다. 이들에겐 원론적 혁명과 사회주의만이 전부다. 페르낭 브로델은 “미래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선적인 것을 거부해야 한다. 하나의 문명이 독창적이라고 해서 그것들 각자가 대양 가운데 있는 하나의 섬을 나타내는 것처럼 폐쇄되고 독립된 세계라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들은 공통적인 풍부한 토대 전부 또는 거의 전부를 점점 더 공유하게 된다.”라고 주장했다.
프리고진도 역시 미래가 근본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평형상태를 예외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물질 현상은 평형상태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진다고 주장했다. 엔트로피를 혼돈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분기점으로 이끄는 것으로 해석하고 엔트로피의 결과는 소멸이 아니라 창조라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적 대칭이 아니라 시간의 화살이며, 인식론적 가정은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며, 과학의 궁극적 산물은 단순성이 아니라 복잡성에 관한 설명이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새로움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결정주의적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와, 모든 것이 부조리하고 원인이 없고 불가해한,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이 다스리는 세계, 즉 소외로 이끄는 이 두 개념 사이에 난 좁은 길이다.” [엔트로피]라는 책에서 제러미 리프킨은 이와 관련하여 “과학자들이 알게 된 것은 모든 현상 하나하나가 독특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건은 다른 모든 사건과 구별된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사건은 세계에서 자기만의 자리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현상과 객관적 사실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주관적으로 발생한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초기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이 발생한 것은 과거에 발생했던 무수한 사건의 그물로 이루어진 집단적인 형태가 그 특정한 사건을 형성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왈라스틴은 브로델과 프리고진의 논리로부터 자본주의 이후에 과연 어떤 사회가 올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불확실성, 혹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다양성과 특수성으로 인하여 사회주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갖게 될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특수성과 개별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예전처럼 무언가 하나의 큰 줄기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태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지만, 기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계관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본주의가 세계체제라는 것은 하나의 전체이면서 부분들의 합이고 개별들의 총체인 것이다. 예컨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심층생태학이나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학설도 왈라스틴이 진행하는 문제의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나는 왈라스틴의 문제의식에 대해 기계론적 결정론적 사고를 극복하면서 보편과 특수, 분리와 통일, 부분과 전체를 구체화된 내용으로 확보해야 비로소 가능한 대단히 벅차지만, 반드시 해결해야 할 오늘날의 인류가 맞닥뜨린 과제를 설명한 것으로 판단한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왈라스틴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변증법에 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라는 말을 내뱉는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고, 변증법을 이야기한다고 변증법적 본질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며, 또는 반대로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변증법의 핵심적 내용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을 전제 했을 때 만일 마르크스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변증법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이비 마르크스주의임에 틀림없다. 왈라스틴이 그토록 신주받들 듯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브로델과 프리고진의 철학이라는 것은 사실 내가볼 땐 변증법적 사고를 자신의 분야에서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변증법적 사고를 어떻게 익히고 배워서 적용할 것인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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