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농담

파랑새호 2005. 2. 21. 13:34
LONG 1965년에 밀란쿤데라는 [농담]이라는 책을 썼다. (밀란쿤데라는 책 마지막 장에 자신이 쓴 날짜를 기록해 놓았다.) 1960년대 우리가 역사책을 통해서 알 고 있는 그 시기는 냉전의 와중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확장되던 시기이다. 대표적인 것이 1959년 쿠바혁명이었다. 쿠바혁명은 마치 1960년대가 사회주의의 찬란한 미래를 보장하는 사건이었다. 소련 미사일을 쿠바에 설치하려 했다가 전쟁직전 까지 갔던 해가 바로 1962년이다. 1964년에 미국은 대 쿠바 봉쇄조치를 단행했다. 중국에서는 유명한 ‘문화대혁명’이 1966년부터 시작한다. 요즘엔 누구나 다 좌익모험주의, 극좌맹동주의라고 비판하는 그 문화대혁명이다.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실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1960년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립하면서 사회주의라는 국가가 좀더 팽창할 것 같다는 예감을 갖게 한 시기이다. 바로 그 시기에 밀란쿤데라는 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소련의 위성에 포함된 그 국가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미명하에 유린당하는 개인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한 장의 엽서에 적혀진 ‘농담’으로부터 당에서 축출당한 주인공 ‘루드빅’, 루드빅이 사랑했지만 아픈 강간의 기억 때문에 루드빅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루치에, 그리고 루치에를 변화시킨, 아픔의 기억에서 벗어나 사랑을 느끼게 한 사회주의 국가의 크리스찬 코스트카, 루드빅을 사랑한 유부녀 헬레나. 헬레나의 남편이면서 루드빅이 당에서 축출될때 루드빅의 도움을 외면한 제마넥. 아 이렇게 써놓으니 이 소설이 마치 삼류연애소설 같은 느낌이다. 이 소설의 백미는 줄거리 자체에 있지 않다. 줄거리가 진행되면서 묘사되는 사람들의 생각, 삶, 체코 국민들에게 다가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있다. 시대의 사회상을 드러내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 아니던가? 작가는 어쩌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농담’이었는지 모른다고 조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농담’과 진담을 구별하지 못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시종일관 밀란쿤데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아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다음과 같은 묘사를 음미해보자. “ 그가 대학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강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그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철학이라고 대답했다. (그가 자신의 과목을 이렇게 명명한다는 것은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사오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라고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 교과의 인기가 급격히 하락했고 특히 젊은 학생들사이에서는 완전히 시들해져 버렸다. 때문에 찬양받는 것이 늘 주된 관심사인 제마넥은 마르크스주의를 보다 일반적인 명칭속에 점잖게 감추어놓는 것이었다.) 나는 제마넥이 분명히 생물학을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하면서 놀라는 척했다. 그러한 내 말에는 마르크스주의 교수들에게서 종종 엿볼 수 있는 아마추어리즘을 빈정거리는 반어적 암시가 담겨 있었다 ” 내가 볼 때 밀란쿤데라는 지극히 이념적인 사람이다. 얼핏 밀란쿤데라의 책을 읽다보면 ‘삶’이 투영되지 않는 그 어떠한 이념도 공허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젊은날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한 채 술 한잔 먹으면서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삶의 푸르른 생명나무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루드빅이 당으로부터 축출당한 그 농담 - “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 사회주의 이념의 눈으로만 보면 이 문구는 지극히 ‘도발적’이다. 나는 ‘부르조아’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밀란쿤데라는 ‘도대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무엇 이길래 사람의 그 다양한 삶을 무시하고 있는가?’ ‘내가 트로츠키 만세라고 농담을 한 것이 왜 문제가 되고 있는가?’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아주 좋게 해석하면 이같은 밀란쿤데라의 의도는 사람이 살고, 사람이 있은 후에 이념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주의 이념은 실패한 이념이다. 적어도 현실세계 2004년 지금까지는 그렇다. 사회주의 이념을 실패하게 만든 근본이유는 무엇인가? 자본주의가 너무나도 막강하기 때문인가? 밀란쿤데라의 소설을 읽다보면 사회주의는 그 나라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마르크스-레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모두 특권층이었다. 주인공 루드빅이 당으로부터 축출되어 탄광으로 강제노동을 할 때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적’이라는 낙인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러 모든 지구상의 사회주의가 망해버린 순간(아직 망하지 않은 몇몇 사회주의 국가가 있기는 있다. 중국, 쿠바, 북한이 대표적이다)당시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면서 오직 이념적인 논쟁과 조직, 원칙은 있으나 삶의 생명이 없는 그러한 신기루였다고 판정 내린다. 우리는 애써 주장하기도 한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모든 문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자체보다는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떠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아니 도대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문제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문제와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가? 최근에 사람들은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라는 고민보다는 ‘자본주의는 왜 망하지 않는가?’ 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의 배경에는 ‘사회주의’가 이미 이야기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밀란쿤데라는 이러한 배경을 형성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시 [농담]으로 돌아가자. 주인공 루드빅이 당으로부터 축출되어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대학으로 복귀했을 때 헬레나가 예전 자신을 축출한 장본인의 마누라라는 점을 알고 그녀와 섹스를 하여 보복을 하겠다는 생각, 그렇지만 여지없이 헬레나 자신도 ‘사람’이라는 느낌, 루치에의 강간으로 인한 상처, 코스트카의 종교에 대한 믿음,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어떤 실존성, 책에서는 이런 점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삶을 고민하고, 느끼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때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을 이기지 못해 동물적 행태를 자행하는 어떤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어떤 일정한 틀에 가둘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모두 사람들이 사는 사회인데, 사람들의 실존이 수억개가 있는데 이념은 너무나 멀리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밀란쿤데라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개개인에게 파편화된, 나의 의미, 내가 사랑하는 것, 나와 관련된 그 어떤 내용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개인을 찾기에는 너무도 비슷하다. 나는 지금 내 동료들과 함께 회사에 다니고 있고, 나는 지금 내 가족과 함께 아등바등 살고 있고, 나는 지금 우리 회사와 비슷한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 아침 일찍 전철을 타기위해 뛰어야 한다. 더더욱 나는 지금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그래서 돈 없이 살수 없는 이 지긋지긋한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비슷한 나와 함께 살고 있다. 결국 나는 무수히 많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밀란쿤데라는 이 수많은 ‘나’를 보지 못한단 말인가? 사회주의가 우리 시대 뒤떨어진 주제라고 한다면 자본주의는 너무나도 추악한 주제이다. 그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수많은 실존은 추악한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교두보이다. 실존은 인간을 파편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무기인 것이다. 주인공 루드빅이 탄광으로 강제노동을 가는데 내가 놀랐던 사실 하나는 ‘돈’을 많이 지급했다는 내용이다. 사실상 죄인들이 강제노동을 하는데 ‘돈’을 많이 지급했다는 점이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또 한가지 루드빅이 그렇게 낙인찍혀 강제노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학에 다시 복학할 수 있었고, 연구소에 취직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밀란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공산당원들은 당에 죄를 지은 사람이 일정기간 동안 농민이나 노동자들 가운데에서 일을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아주 종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에는 복귀라는 종교가 없다. 한번 탈락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ARTICLE (밀란쿤데라 지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방미경 옮김) 언젠가 ‘김종필’이라는 정치인이(그는 지금 정치에서 쫒겨 났다) [말]이라는 잡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김종필’은 “20대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모르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30대에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니고 있다면 그는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몇가지 생각이 후루룩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김종필이라는 정치인이(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이다) [말]이라는 잡지와 인터뷰하면서(내 기억에 그 인터뷰는 기차 안에서 이루어진 내용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꺼냈는지 의아했다. 또 나를 되돌아보건대 가슴은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아울러 다행스럽게도 나는 어쨌든 겉으로나마 사람들에게 머리도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내가 30대에 머물고 있던 시절에 사회주의 국가가 모두 망해버려 가슴속에 남아있다는 것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가능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끝났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고, 나는 애써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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