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라는 소설을 딱 20년전에 읽어보았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하지만 당시 책을 읽으면서 지식인의 이중성에 대해 아주 신랄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한국사람에게 한국말이 갖는 어감에 대해서도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임꺽정]을 읽다보면 말이 돌돌 굴러가는 듯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현, 우리 입과 혀에 딱 맞는 어휘들 등등 말 하는 것 자체에 어떤 인위적인 고민이나 표현이 필요없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홍명희의 손자라고 하는 홍석중이라는 북한의 소설가가 [황진이]라는 소설을 썼는데(대훈출판사, 2004년) 남한의 한 단체에서 만해문학상인가 무엇인가를 주었다고 선전을 했다. 읽어보니 [임꺽정]처럼 입에 딱 들어맞는 그런 표현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속담이나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느낄수가 있다. [황진이]는 초점이 양반 사대부 계급의 허위와 위선, 반민중성을 드러내고, 소위 조선시대 '민초'들의 질퍽한 삶, 지혜, 사랑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대부중에 저자가 욕하지 않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다. - 화담 서경덕. 남한의 한 사람이 소설책 뒤에 서경덕과 황진이의 로맨스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으나 그런 내용이 없어 아쉽다고 썻는데, 이것은 아마도 글의 주제상 저자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저자는 조선조 양반의 모든 사람들이 겉으로는 '선비'의 삶의 자세, '유교사상'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계집질, 기생질 등이 꽉차 있는 위선의 전형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경덕은 그런 내용이 없다. 오히려 성리학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여 성리학을 민초의 관점에서 해석했다고 존중받고 있으며, 실제 삶 또한 허위나 위선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설적 재미로서는 서경덕과 황진이를 엮는 것이지만 저자로서는 실제 엮을 게 없다는 생각에 입맛다시면서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1권 말미에 나오는 해설은 물론 이 소설의 장점을 부각 시키기 위해 쓴 것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원작을 깍아내리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주제인 즉, 북한 문학에서는 '성애'에 대한 표현이 거의 금기시 되어 있는데, 소설 [황진이]에서는 그런 표현이 과감히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이는 북한의 대외개방 정책과 아울러 북한의 소설이 갖는 계급과 민족에 대한 단순성으로 부터의 탈피라는 것이다. 허 참 나로서는 북한의 소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교수님이 쓰신 해설에 대해서 사실인지 아닌지 왈가왈부 할 수 없으나 소설 [황진이]의 어디에 '성애'에 대한 표현이 나오는 지 모를 일이다. 해설자가 제시하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놈이의 숨결이 가빠졌다. 후들후들 떨리는 그의 손이 진이의 몸을 더듬었다. 진이는 깜짝
놀라며 그의 손을 뿌리쳐 버리려고 했으나 이미 그럴 힘이 없었다....진이는 달빛속에
누워 있었다. 굳은 살이 박힌 놈이의 거친 손이 그의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진이의 온 몸이 불덩이 처럼 달아올랐다. 입에서 신음소리가 저절로
새여 나왔다. 문득 가슴이 무거워졌다."
사실 이 소설의 뛰어난 장점은 남녀간의 성애를 아주 단백하게 표현하며, 진정한 사랑과 계집질을 분간하는 것에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와같은 성애묘사가 북한소설로서는 참 보기드문 일이라면서 그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어딘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위와 같은 표현은 황석영의 [장길산]에 반도 못 미치는 것이다. 필자는 [장길산]을 읽으면서 이처럼 야한 소설이 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이것은 [장길산]을 깍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만큼 성애에 대한 묘사가 아주 세심하게, 조밀하게, '색'스럽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황진이]자체는 기생의 삶을 주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남녀간의 문란한 성관계가 묘사가 되어 있으나, 직접적인 '성애'묘사는 아주 단백하게 처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북한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여러 경향은 있을 수 있으나 마치 북한에서의 소설이라는 것이 당의 지령을 받고 그 지령에 의해 씌어지고 있다는 구 시대적 논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다. 아뭏든지 필자는 이런 식의 북한소설해설에 대해 반감이 조금 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를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시대에 대한 고민이 바로 사람에 대한 고민이고, 사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진정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표현은 황진이에 대한 사랑고백인 바, 나도 언제가 써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 하지만 사랑이란 가락지와 같아서 끝이 없는가 봅니다. 사랑이란 기름불과 같아서 일단 타
오르면 끌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저는 종내 마음속에 박힌 그 아픈 가시를 뽑아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황진이] 1권, 3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