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29일 간호과 엠티에서
간호과에서 ‘간호과에 바란다’는 주제를 갖고 이야기 할 수 있어서 기쁘고, 그 강사를 나로 택한 것이 두렵다. 나는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텍스트 없이 특정한 주제를 갖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선 사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오늘 내 이야기가 지겨울지 모르겠다. 오리엔테이션 해보면 내가 이야기할 때 직원들이 다 졸더라.
오늘 같이 생각하고 싶은 이야기이자 간호과에 바라는 내용은 사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간호과의 중추신경이라 할 수 있는 간호과의 간부들에게 바라는 내용이다. 간부는 내가 볼때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고 있어야한다. 그 두 가지 조건이 무엇인지 같이 의견을 나누고 싶다.
병원이라는 직장에 근무하면서 나는 늘 간호사들이 병원의 핵심적인 일꾼이라 할 수 있는 의사들과의 긴장관계에 있는 것을 느껴왔다. 의사들의 행동들 예를 들면 ‘반말’, ‘고압적인 지시’, ‘일방적인 전달’이 간호사들에게 대단히 상처를 많이 주고 간호사들 자신의 처지를 비관적으로 만든다는 점을 느껴왔다. 의사들 대다수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의사마저 긴장하지 않으면 어떤 의료사고가 발생하지 모른다는 것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로서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간호사들은 어쨌든 의학교육에 있어 의사들과는 다른 내용을 교육받고 훈련받기 때문에 의학의 깊이나 내용이 의사들보다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멀쩡한 사람’에게, ‘아프지 않은 성한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는 곧 환자에게 대하는 태도와 같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어떤 의료기관이든 경쟁이 격화되고 있어 서비스는 생활화 되어있고, 대세가 되어 있지만 그 서비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면 이것은 금방 이해가 될 수 있다.
최근의 경영이론 중에 ‘6시그마’라는 것이 있다. 모토롤라에서 시작하여 제너럴일렉트릭이라는 회사에서 완성한 것으로서 생산제조업에 있어서는 불량품의 개수를 100만개당 3.4개로 줄이고, 서비스업에 있어서는 기존의 ‘고객불만 즉시처리’라는 범주에서 ‘고객감동’이라는 범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술된 대표적인 책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고객이 감동을 받을 때 진정으로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객이 불만을 느껴 그것을 즉시 처리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것’이지만 감동의 수준으로 까지 확대되지 않으면 고객이라고 할 수없고 일시적인,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하게 된다. 이 고객감동에 대해 사람들은 고객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고객의 입장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훈련을 하게 된다. 6시그마 이론은 이러한 내용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경영방침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6시그마이론은 내가 볼 때 불완전한 이론이고 부분적인 이론이다. 고객이라는 주체는 즉 고객을 고객으로서 결정하게 하는 것은 ‘서비스 제공기관’이 있어야 만 가능한 것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손님이라는 주체는 주인이라는 주체가 없으면 규정할 수 없는 주체이다. 즉 어떤 사람이 손님이 되기 위해선 ‘주인’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 예를들어 주인이 없는 빈집에 찾아 갔다면 그는 더 이상 손님이 아니고 ‘구경꾼’이라든가 혹은 ‘관찰자’와 같은 다른 어떤 규정을 받게 되어 있다. 손님이라는 주체는 주인이라는 주체가 없다면 더 이상 손님으로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고객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고객을 고객이게 하는 주체가 없다면 더 이상 고객이 아니다. 고객을 감동시킬 수 있는 주체가 감동하지 않으면 고객은 감동할 수 없다. 어떤 회사의 직원들이 감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동전의 앞과 뒤 중에서 앞만 보고 그것을 동전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동전의 앞뒤가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동전이 아니라 쇠붙이 혹은 납덩이 등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6시그마이론을 우리나라에 선구적으로 적용했다고 하는 삼성SDI의 경우 해고된 직장 동료들을 위해 일일주점을 열려고 하자 일일이 집을 찾아다니며 주점을 못 열게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고객에게는 감동을 주면서 직원들에게는 엄청난 압박을 주는 것으로 작용한다면 6시그마이론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그것은 반드시 실패하고 다른 이론이 나오게 될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모두 이와같다. 수학에서의 마이너스와 플러스, 미분과 적분, 역학에서의 작용과 반작용, 화학에서 원소의 결합과 이탈, 진화론에서 세포의 분열과 증식, 정치에서 권력과 국민 등이 모두 그러하다. 우리 몸의 세포는 늘 분열하고 있다. 하나의 세포로부터 딸세포가 나오고 그 딸세포는 다시 또 다른 딸세포를 분열시키고 등등 하루에도 수십억개의 세포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세포분열은 그 자체만을 놓고 볼 때 분열이지만 인간의 몸을 놓고 볼 때는 진화가 된다. 그것은 곧 세포단위를 넘어설 때 ‘증식’으로 바뀐다. 분열이 곧 증식이 되는 것이다. ‘증식’은 만일 ‘분열’이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다. 오르막은 내리막이 없다면 규정할 수 없다. 올라간다는 개념은 내려간다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오르막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내리막이다. 권력기관이 권력기관일 수 있는 것은 국민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국민이 없다면 권력기관도 없다. 사람사는 세상은 모두가 이렇다. 어떤 한 개념이나 주체의 본질은 그와 맞물려 있는 어떤 측면에서는 대립하고 있는 또 다른 개념이나 주체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의사와 간호사의 어떤 왜곡된 관계는 간호과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병원문화에 전혀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맨 처음에 생소했던 것이 모두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부르는 문화가 생소했다. 더욱 생소했던 것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그 이면에 군대보다 더 강한 조직규율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간호과가 그러한 군대문화가 제일 심하다. 간부와 비간부, 윗연차와 아래연차가 환자케어와 의료사고방지라는 미명하에 알게 모르게 군대식 명령체계로 만연되어 있다. 간부는 직원들이 있어야만 간부이다. 만일 북한에서 추구하는 대로 전군의 간부화를 도모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모든 사람의 간부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간부라고 하는 말 자체가 대다수의 비간부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사람의 간부화라는 말이 간부들이 갖고 있는 판단, 능력, 관리에 대한 내용을 모든 직원들이 갖도록 하자는 이야기라면 무엇하러 간부를 뽑는가? 즉 모든 사람의 간부화는 간부를 뽑지 말자는 말과 같다. 결국 간부라는 말은 대다수의 비간부 직원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어떤 부서의 대다수 직원을 보면 그 부서장의 됨됨이를 알수가 있다. 간부가 간부다운 것은 간부 본인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서원들을 보고 평가한다. 묵자는 군자는 물을 보고 거울을 삼지 말고, 인간을 보고 거울을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만을 볼 수 있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인간의 길흉화복을 모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권위를 결정하는 것은 권력자 자신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권력자의 권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간부의 권위는 곧 부서원들이 결정하는 것이지 간부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부라고 한다면 대다수 직원들의 귀감이자 모범이 되어야 한다.
카이사르와 나폴레옹. 둘의 공통점 - 군인들 앞에서 부하들 앞에서 솔선수범. 동고동락함. 둘의 차이점 - 카이사르는 미래를 제시했고, 나폴레옹은 독려하기만 했다. 카이사르는 당시 공화정이라는 로마의 정치형태를 넘어서는 황제체제의 필연적 도래를 감지하고 그를 준비하는 ‘미래’작업이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다시 ‘황제’시스템에서 ‘민주정’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황제에 집착했기 때문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의 차이는 미래와 과거의 차이이다. 따라서 이후 로마의 황제는 모두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붙이게 되지만 나폴레옹은 고작 ‘풍운아’정도의 수식이 따라 붙을 뿐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설명)
간부는 비 간부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비 간부가 결정하는 존재이지만, 또한 비 간부의 미래이기도 하다. 비 간부의 희망은 바로 간부 자신이다. 역설적으로 지금 간부의 모습은 비 간부의 미래의 모습이다. 수간호사들 자신들을 한번 보자. 자신의 모습이 과연 직원들에게 이것이 너의 미래모습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따르라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미래는 현재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가 미래일 수 있는 것은 미래가 아닌 무엇인가가 미래의 영역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미래의 출발은 바로 현재로부터이다. 과거는 어떠한가 ?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보면서 현재를 안다고 했다. 현재를 알고 싶은가 ? 그러면 역사를 공부하라는 말이 있다. 신영복선생의 ‘강의’라는 책을 읽으면 ‘오래된 미래’라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교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미래는 오랜된 것이다. 희망의 철학이라고 하는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에른스트블로흐의 책을 읽어본다면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세상의 온갖 절망을 이야기한다. 결국 현실의 온갖 절망이 희망을 낳는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희망은 절망을 전제로 한다. 절망속에 갖는 꿈, 블로흐에 의하면 사람들은 ‘기억’ 때문에 ‘희망’을 갖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세상은 두려움, 자기소외, 온갖 고통속에서 어떤 그 무엇에 대한 잠재성,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무엇에 대한 성향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바로 이 미래를 현실속에서 드러낸다. 성경이야기를 잠시 빌리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을 했을 때 예수가 간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었다. 예수는 죄인들만 살 고 있는 곳, 버림받은 땅 갈릴리로 간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늘 상 예수의 부활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가 부활하여 간 곳을 약속한 대로 제자들 보다 ‘먼저’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늘나라의 승천은 그 이후이다. 우리는 예수가 온갖 영화가 있는 하늘나라로 먼저 가지 않고 왜 갈릴리로 갔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결국 간부는 두가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지만 솔선수범과 희망이 그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간부가 되기 위해 우리는 대다수직원들에 모범이 되어야 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